소설리스트

신부강탈-38화 (3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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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의 피가 한 번에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 이럴까. 사진 속 소희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심장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질 듯 조여들었다. 지겸이 제 손가락을 타고 흐른 피가 책상 위로 뚝뚝 흘러내리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제 손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지겸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살의를 느낀다. 이런 절망과 분노는 생전 처음이다.

그가 구급함을 뒤져 꺼낸 붕대로 피투성이가 된 손을 대강 감았다. 어떻게든 빨리 가야 한다. 주소를 확인한 지겸이 방을 나서면서 조금 전에 통화했던 소희의 선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짚이는 부분이 있어서다.

“안녕하세요, 바쁘실 텐데 자꾸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 남편분과 같은 병원 근무하는 의사, 한국인 맞습니까?”

- 어머, 네 맞아요. 재림 의대 출신이에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시고….

재림대라는 소리에 지겸의 미간이 구겨졌다.

“혹시 그분 사시는 곳 아십니까? 부킷 티마(Bukit timah) 쪽이 맞는지.”

- 자세한 주소는 모르는데, 어- 맞아요! 이번에 그쪽으로 이사 갔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설마 소희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요? 혹시 아픈가요? 저희 남편도 집에 들어왔는데, 좀 가서 봐달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소희는 고집은 있어도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여권은 지겸에게 있고, 가족도 관련이 있다고 들은 이상 섣불리 행동했을 것 같지 않았다. 분명 병원만 갔다 올 계획이었을 거다. 그렇다면, 그놈일 것이다. 소희를 진료했다는 의사. 지겸이 차를 타며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님. 재림 의대 출신 이승현에 대해 알아봐 줘요. 산부인과 전문의고, 싱가포르 영주권자.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는….”

그 외에도 지겸은 김 실장에게 몇 가지를 더 시켰고, 전화도 몇 군데 더 걸었다.

비가 많이 내렸던 날 밤, 하늘에 뜬 달은 유난히 밝다. 야속하게까지 느껴지는 환한 달빛 아래 지겸의 차가 적막을 깨고 들어왔다. 끼이익. 얼마나 속력을 내며 들어왔는지 주차장 바닥에 까만 스키드 마크가 생길 정도였다. 지겸은 이미 다른 건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소희. 사랑하는 여자, 자신의 오메가. 그녀를 빨리 이 밝은 달빛으로 무사히 구해오기 위해 지겸은 어둠 속으로 기꺼이 내달렸다.

***

두려움은 수치심을 잊게 한다. 속옷만 입고 두꺼운 밧줄에 몸 여기저기가 결박된 상태에서도 소희는 불안감에 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소희가 또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왜냐고? 봐요. 난 임소희 씨를 잘 알아요. 그런데 소희 씨는 나를 모르잖아. 씨발. 그게 너무 좆같아.”

승현이 소희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눈앞에서 메스를 손에 껴 빙글빙글 돌리며 욕을 낮게 뇌까렸다.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소름 돋는 소리를 냈다.

“내가 로열 알파였어 봐요. 소희 씨가 내 이름을 몰랐겠어? 같은 학교를 나오고도 얼굴조차 몰랐겠냐고.”

그가 짜증이 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당신들이 싫어. 소희 씨도 아닌 척하지만 날 보는 눈빛을 봐봐. 뼛속까지 박혀 있는 너희 그 선민의식이 역겹다고. 로열이니 우성이니. 나치나 흑인 노예로 삼던 시절이랑 뭐가 달라.”

자기도 말하면서 더 화가 치솟았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긴장한 소희가 숨을 참았다. 남자를 자극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어쩌다 여기 이렇게 묶여있게 된 것인지 이유를 가늠할 수조차 없어 너무 괴롭고 답답했을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투둑. 결국 참았던 눈물이 다시 하얀 뺨을 타고 흘렀다.

“근데 더 화나는 게 뭔지 알아요? 실제로 당신들이 더 뛰어나다는 거야. 평생 열성 딱지 떼 보려고 죽을힘을 다했는데. 여전히 눈앞은 벽이야. 그 좌절감을 너네들이 알기나 하냐고.”

소희의 눈물을 발견한 승현이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자 소희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움츠렸다. 파르르 떠는 눈꺼풀을 보며 남자가 피식 웃었다. 실제로 사냥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즐거움이리라. 자기보다 강한 자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며, 살려 달라고 제대로 빌지도 못하는 힘없고 가여운 짐승의 모습. 자유가 속박된 채 제 앞의 존재에게 생명을 저당 잡힌 막막함이 엿보이는 눈동자.

정말이지, 짜릿하다.

승현이 흘러내린 눈물을 제 손끝으로 살살 닦아냈다. 고가의 도자기 인형에 흠이라도 갈까 두려운 듯 지극히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차가운 손이 얼굴에 닿자 소희가 움찔댔다. 구토감이 몰려왔다.

“난 쉽게 잡혀갈 짓은 안 해.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니까 그렇게 무서워서 막 떨 필요는 없어요.”

소희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근데 우는 건 계속해요. 막 그렇게 큰 눈을 깜빡이며 한없이 처연한 표정으로 질질 짜는 건 흥분돼. 그 맛에 내가 이 짓 하는 거니까.”

그가 제 손가락에 묻은 소희의 눈물을 혀로 할짝대며 핥아먹었다. 아. 차마 그 모습까지 견디기 힘든 소희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하게 되어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면 시야를 차단한다. 그녀에게 지금 유일하게 가능한 방어책이기도 하다.

“제발 살려 달라고 구걸하는 게 제일 보기 좋던데. 보니까 소희 씨는 워낙 자존심이 센 편이라 그런 건 안 하네. 아쉽게.”

순간 남자가 말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아… 어떻게 하면 더 울려나. 역시 아예 싹 벗겨버릴까?”

승현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끼쳐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가슴 쪽 밧줄이 더 살을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운 소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 참아야죠. 난 인내심이 꽤 강한 편이라. 제일 재밌는 파트는 관람객이 있을 때까지 남겨 두려고.”

크크크.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섞인 웃음. 연신 내뱉는 남자의 저 웃음소리를 듣는 게 너무 힘겨웠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왕자님께서 한 15분이면 구하러 올 테니. 슬슬 준비해 볼까요.”

타다닥. 탁. 무언가를 끌어오고 조립을 맞추는 듯한 둔탁한 소리에 놀란 소희가 눈을 떴다. 대체 이보다 뭘 더 한다는 거지? 그런 그녀 앞에 삼각대와 카메라 한 대가 설치됐다. 렌즈가 정면에서 정확히 소희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녀린 턱이 파르르 떨렸다. 승현이 씨익, 웃었다.

카메라에 빨간 불 들어온다.

“이름.”

카메라 렌즈가 소희를 정면으로 향했다.

“…네?”

“아 실수, 실수. 얼마나 예쁘게 나오는지 본인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겠죠.”

승현이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꺼내 소희가 직접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돌렸다. 그 장면을 차마 볼 수 없어 소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 뜨고. 다시, 이름.”

소희가 눈을 더 꽉 감고 입술도 깨물며 답하지 않는다.

“소희 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막 그렇게 성격이 좋진 못해서요. 큰 직업적 사명감이나 흥미 따위 없고. 소희 씨랑 한번 제대로 재미 보고 어떻게 되어도 별 미련은 없는 사람이라. 그러니까 우리 이런 거로 너무 힘 빼지 말죠.”

남자가 어떤 이유로 이걸 찍으려 하는지 모를 만큼 소희는 바보가 아니었다. 완고한 그녀의 표정에 승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신사적인 걸 가장했던 말투가 슬슬 달라졌다.

“그 예쁜 입술에 바로 내 좆 박아넣기 전에 눈 뜨고 입도 열지. 이름.”

소희의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들렸다.

눈앞의 남자가 두려워서 눈물이 가득 고이고 몸을 덜덜 떨면서도 소희는 승현을 똑바로 노려봤다. 곧 지겸이 올 거다. 그러니까 버티자. 그가 올 때까지만.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가장 미웠던 사람이 이제는 제일 간절하다.

소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승현이 입을 꽉 깨문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올려 눈을 맞췄다. 이런 중에도 남자를 노려보는 힘 있는 눈동자가 그의 성질을 더 돋았다. 이 상황에서 자존심 따위나 세우다니.

“소희 씨. 와- 진짜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마지막 기회예요. 이번에 제대로 못 하면 구지겸이 도착할 때 당신 아래에 내 것 넣고 허리 흔드는 거나 보게 될 거야. 알겠어?”

“흑, 흐으….”

소희도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도, 이런 인간 앞에서 무릎 꿇고 싶지 않아서 꼿꼿하게 견뎌보려 했던 의지도 불타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살았구나. 마치 구원의 종소리 같은 맑은 소리가 지겸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 하윽. 흐으으.”

더는 울고 싶지 않아 한계까지 참고 참았던 울음이 지겸이 왔다는 소리에 그제야 터져 나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말없이 현관문을 연 남자가 지겸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정신없이 뛰어온 티가 날 정도로 흐트러진 꼴이 보기 좋았다. 그럼에도 지겸과 눈을 마주친 승현은 순간 숨을 멈췄다. 자신의 뻣속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지겸의 맹수같은 눈빛이 위압적이었다. 분노로 인해 날 것 그대로 드러난 강한 페로몬도 심히 압도적이었다. 괜히 긴장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승현이 부러 더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빨리도 왔네. 안달 난 강아지 새끼처럼.”

지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답하려고 하다가 참는 게 승현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승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눈앞의 지겸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자신의 오메가를 찾으러 온 알파는 보통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분노하며 폭력부터 행사하거나, 문을 열어주자마자 무릎 꿇고 울며불며 짜거나. 지겸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냉철하고 논리적인 인간일 거라고 예상은 했다. 지금 저 머릿속에서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겠지. 승현에겐 그것 또한 흥미로웠다. 잔잔하고 고고해 보이는 수면에 더러운 돌덩이를 던져 마구 흩트리고 망가뜨리면 꽤 짜릿할 것이다.

“구지겸. 아니지, 구 교수라고 불러야지. 오랜만이네? 나 알죠?”

뭐라 대꾸를 하기에는 지겸의 기억에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을 보고 승현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순간 자존심이 상했으나, 어차피 오늘은 로열 알파와 오메가, 이 대단한 커플의 모든 게 제 손아귀 안에 있었다.

승현이 지겸의 눈앞에 열쇠를 하나 흔들었다. 지겸은 놈이 흔드는 열쇠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소희가 있는 방의 열쇠겠지. 허튼수작 말라는 경고겠고. 그는 승현의 안내에 순순히 따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희의 체향을 느꼈다. 각인한 짝을 찾는 본능이 계속 경종을 울렸다. 그녀가 이 안에 있다.

물론 문이 열리고 승현이 고개를 내미는 순간 멱살을 틀어쥐고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때리고 싶었다. 맹세컨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폭력적인 충동이 속에서 격양된 건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겸은 분노든 무엇이든 제 안의 감정을 차갑게 식혀 얼린 뒤 조용히 칼을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참고 또 숨기며 살아왔는데. 무엇보다 자칫하면 소희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이 정도 쯤은….

고요한 수면 아래 어떤 발길질이 있는지 상상할 수 없는 승현은 즐겁기만 했다. 커다란 맹수의 목줄을 틀어쥐고 맘대로 끌고 가는 희열. 승현은 목 뒤가 쭈뼛쭈뼛 설 정도의 쾌감을 느끼며 소희가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여기야. 직접 열어보지 그래?”

승현이 문에 걸린 자물쇠를 연 뒤, 고개를 까딱하며 문 쪽을 가리켰다.

입술을 굳게 다문 지겸이 문고리를 천천히 당겼다. 그런 지겸의 뒤에 서 있던 승현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지금 저 남자의 속이 얼마나 엉망진창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승현의 눈빛이 섬뜩하게도 즐거운 기색으로 빛났다. 아닌 척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지겸의 손과 팔 그리고 제 말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그에게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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