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방 안에 소희가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체향으로 가득한 공간에 그녀만 결핍됐다.
지겸은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우선 사 온 음식이며 꽃 등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기다렸다. 처음엔 그녀가 너무 답답해서 잠깐 산책하러 나간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 호텔은 큰 쇼핑몰뿐 아니라 아트 앤 사이언스 박물관과도 연결돼 있어 구경할 게 많으니까.
싱가포르에 도착했던 날 함께 식사하며, 그녀가 그곳에서 진행 중인 전시가 보고 싶다고 했던 것도 떠올랐다. 형언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목을 죄어오는 것만 같았지만 견뎠다. 맛있는 게 먹고 싶다며 희미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고 1시간, 또 1시간이 지나고, 소희가 돌아오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자 지겸은 초조해졌다. 지갑과 휴대폰은 소희가 가지고 나간 것 같았으나 여권은 그가 금고 안에 뒀던 터라 찾지도 못했을 거다. 아닐 거야.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부러 그 틈을 타 도망을 간 것은 아닐까. 설마. 갈 곳도 없을 텐데. 대체, 어디에. 아까 방을 나서기 전에 봤던 그녀의 표정이 어땠더라. 눈은 분명 웃고 있었는데, 아니… 입가가 떨렸던 것 같기도 하고. 지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 한구석이 뻐근했다.
소희를 놓쳤다.
우습게도 이 방에 들어와 그녀가 없다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그의 심장에 통증이 일었다. 누군가 두꺼운 쇠사슬로 지겸의 심장을 칭칭 동여맨 뒤 양쪽에서 반대로 당겨 찢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내내 괜찮을 거라고 위안하면서도 실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다렸다. 보고 싶다고,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라도 없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Tu me manqes. I miss you. Du fehlst mir.
보고 싶다는 말에 쓰이는 동사들은 왜 다 이 모양인가. 결함이 있는, 불완전한, 놓치다, 결핍되다. 상대방이 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결함투성이의 불완전한 인간이 되어 허덕이면서, 더 꽉 붙들지 못하고 놓쳐서는 그립다고 힘겨워하는 꼴이란.
한심하다, 구지겸. 그가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갑게 식은 손끝에 닿는 눈가가 뜨겁다. 조금 축축한 것도 같고. 2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꽉 붙잡으려고 안달할수록,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잡았던 지겸의 손을 먼저 놓고 떠나버린다.
지겸이 제 손바닥을 천천히 펼쳐 내려 봤다. 이 손이 기억한다. 죽은 사람의 몸이 얼마나 차가운지. 생명의 온기가 사라져 파랗게 질린 손끝이 얼마나 아연하고 섬뜩한지. 어머니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열 살의 그였다. 그녀는 즐겨 입던 트위드 소재의 셋업 슈트를 입고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계셨다. 하얀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와 가지런히 정돈된 윤기 나는 머리카락. 여느 때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엄마! 하고 부르며 달려가 끌어안는데 그날따라 너무 이상했다. 엄마에게선 늘 부드럽고 좋은 냄새만 났는데 아무 온기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기둥을 대신 품에 안은 것처럼 너무 딱딱하고 차가워서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먼저 제 몸을 떼어냈다.
소리를 질렀던가. 아니면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무나 그녀다웠던 어머니의 죽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악몽처럼, 자꾸만 잔상처럼 떠오르는 그 순간을 곱씹으면 아직도 엄마에게 미안하고 죄스럽다. 외롭고 힘겨웠을 그녀를 마지막까지 더 깊이 안아드리지 못했던 게. 비록 그의 손을 놓고 가버린 엄마였다 해도 자기가 먼저 그 품을 빠져 나와 버렸다는 사실이.
그가 주먹을 다시 꽉 쥐었다. 20년 전 어린아이처럼 보고 싶다고 울며 주저앉아 있는 멍청한 짓은 안 할 거다. 찾아오자. 그녀의 온기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어느덧 밖이 다시 어둑해졌다. 석양이 지고 있었지만 덩달아 비구름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한차례 쏟아졌다 멈춘 비가 다시 내리려 했다. 흉흉한 회색 하늘 아래 바람이 거셌다. 어디로 갔을까. 이러려고 일부러 그에게 음식 심부름을 시켰던 걸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참 신기하다. 그가 싫다고 도망간 여자를 떠올리는 데도, 그래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이 파고드는데도 원망보다 걱정이 앞섰다. 지겸에게서 도망쳐 머무는 곳이 안전하고 편안하다면, 정말 잘 있는 거라면 차라리 좋을 텐데.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떤 불쾌한 예감이 그를 감쌌다. 지겸이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에 알아보라고 했을 때, 싱가포르에 소희 지인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아, 소희 양 대학교 때 선배가 결혼해서 사는 거로 압니다, 도련님.
“연락처 지금 저한테 보내세요.”
제발, 그 선배와 함께 있기를.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짧은 순간에도 지겸은 간절하게 빌었다.
다행히 소희의 선배라는 여자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에게 자신을 소희의 약혼자라고 간단히 소개하니,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가 되돌아왔다.
- 어머,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아까 연락이 와서 걱정하던 참인데. 약은 잘 처방받았다고 하죠?
그녀가 소희와의 전화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줬다. 물어봐서 병원 진료 예약도 대신 잡아줬다고. 남편이 중요한 수술이 있어 곧 있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저 평온하게 지겸의 전화를 받는 것 보니, 소희의 행방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산부인과라…. 억제제를 처방받으려고 했던 걸까. 지겸은 그 선배에게는 일부러 소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전하지 않았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소희에게 알려주셨다는 병원 주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우선 김 실장에게 소희 폰 GPS 추적을 요청했다. 받아 든 병원 주소를 보던 지겸이 일단 병원 쪽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충 아무 옷이나 꿰입었다. 소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봤다. 아까부터 벌써 수십, 아니 수백 통은 건 것 같지만 여전히 전원은 꺼져 있었다.
후…. 소희야, 어디 있는 거야. 제발,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그런 마음으로 다시 소희에게 전화를 거는데,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연결음이 멈췄다. 탈각.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건 소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흐윽, 으….”
울먹이는 소희의 신음에 좀 더 흥분한 승현은 콧노래까지 불러댔다. 그가 소희의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수백 통의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들어오며 쉬지 않고 진동이 울렸다. 지이잉. 징. 그리고 곧 승현의 예상대로 전화가 왔다.
“거봐, 바로 오죠? 오호…. 저장도 하지 않은 번호라. 흥미롭네.”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승현이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스피커폰도 켰다.
- 소희? 소희야! 어디야. 괜찮은 거야? 설마 어디 다친….
수화기 너머 지겸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멈칫.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지겸이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 당신, 누구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보통 전화를 건 사람이 먼저 통성명을 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하. 지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 미친 새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소희의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낯선 남자. 어떤 식으로든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다.
- 구지겸.
“구…지겸? 뭐? 그… 구지겸? 구지훈 쌍둥이 동생?”
상대방의 놀라는 듯한 반응에 지겸도 당황했다. 뭐야,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그가 누군지, 형의 이름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 당신 누구야. 소희는… 어디 있어.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지겸의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그가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와 이거… 두 사람, 내 예상을 벗어나네. 그러니까 당신이 구지겸이란 말이지.”
승현이 재밌다는 듯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 쓸데없이 말 돌리지 마. 소희 옆에 있어? 바꿔, 당장.
“워워, 구지겸 씨. 너무 흥분하지 말고.”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거칠게 나오려던 욕을 지겸이 애써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럴 때일수록 절대로 흥분하면 안 된다.
- 소희, 정말 거기 있냐고. 혹시 손끝 하나라도 건드렸다면 내가 널….
“아이고 잘 있어. 굳이 곧 만날 건데 목소리는 뭐 하러. 내가 주소 보낼 테니 바로 여기로 오면 돼. 당신 똑똑한 인간이니 설마 꼬리 달고 오는 바보짓은 안 하겠지?”
- 허튼수작하지 마. 소희 괜찮은지 직접 목소리 들어야겠으니까. 당장 바꿔.
“아이고 무서워라. 그래그래, 뭐 봐줬다. 임소희 씨. 걱정되신다잖아요, 그리운 임께 한마디만 해 주죠?”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소희가 덜덜 떨고 있었다. 휴대폰 너머 지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 남자가 지겸을 여기로 부르려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고민하는 찰나, 승현이 그녀의 턱 바로 아래 메스를 들이밀었다. 까닥, 그가 머릿짓을 하며 휴대폰을 가리킨다. 뭐든 빨리 말하라는 뜻이겠지.
“흑. 저…예요.”
- 소, 소희야? 정말 소희야?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정말 괜찮아?
스피커폰으로 새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실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미운 사람이었는데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서 아는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몸에 긴장이 풀렸다. 후두둑. 아직도 남은 눈물이 있었는지 소희의 볼을 타고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괜찮, 아요….”
전 정말 괜찮아요.
소희다. 애타게 찾던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겸이 잠시 안도했다.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귀를 휴대폰에 바짝 가져다 댄 지겸에게 무언가 들렸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분명 낮게 가라앉은 소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죽이고 싶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지금 수화기 너머 소희 옆에 있는 저 인간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당장 달려가 죽을 때까지 흠씬 두드려 패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 너, 뭐야.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지.
최대한 화를 삭이려 대신 주먹을 책상 위로 짓이기듯 눌러댔다. 손가락 마디마디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남자가 지겸의 말에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무서워라.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하시고. 일단 후딱 뛰어와. 그리고 허튼짓하지 말라고, 사진 하나 보냅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당신 여자 사진 떠도는 꼴 보기 싫으면 똑바로 해.”
띠링. 지겸이 뭐라 더 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곧 주소와 함께 사진이 한 장 전송됐다.
퍽. 사진을 확인한 지겸이 주먹을 그대로 책상 위로 내리꽂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주먹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유리 조각이 박혀 들고, 손과 손목은 물론 책상 위까지 피가 튀었다.
사진 속에 소희가 묶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