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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롱이 나을까, 아니면 초콜릿 케이크가 나을까. 지겸은 호텔 1층 베이커리 한쪽 Sweet shop 앞에 한참을 서서 고민 중이었다. 아,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프랄린 초콜릿 세트도 소희가 좋아할 것 같은데. 생각할수록 소희가 귀여웠다.
몸도 마른 데다가 꼭 샐러드만 먹게 생겨서는, 실은 버터가 잔뜩 들어간 크루아상 같은 빵이나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것이라든가. 커피는 꼭 우유와 설탕이 들어간 것만 먹는 점도 그랬다. 아침에 그녀가 카푸치노 거품이 묻은 제 입술을 혀로 살짝 핥던 광경이 떠올라, 지겸은 자기도 모르게 귀 끝이 빨개졌다. 지금 당장, 소희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요리를 포장해 오는 길에 꽃과 과일을 잔뜩 사고 디저트까지. 지겸은 결국 진열된 디저트를 종류별로 전부 포장해 달라고 했다. 빨리 배불리 먹이고 싶었다. 며칠 동안 너무 무리시킨 것 같아 반성이 됐다. 오래 기다렸다는 핑계로 제 욕망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한심한 놈.
겨우 2시간 남짓 외출했을 뿐인데, 너무 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지낸 후로 방에서는 줄곧 소희의 체향이 가득하다. 복숭아와 딸기 향을 섞은 듯한 지독히도 달콤한 페로몬.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까지 내려오는 걸 기다리는 겨우 몇십 초가 너무 길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그의 코끝에 벌써 그녀의 체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1, 2, 3…. 숫자가 올라갈수록 지겸의 심장박동도 같이 빨라졌다.
스위트룸이 위치한 코너까지 돌아 걷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들어가서 받으면 소희가 괜히 신경 쓸 테니 밖에서 받고 들어가자.
“네.”
- 지겸이냐. 소희는.
지난 번 통화 때와는 달리 구 회장, 아버지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저 혼자 있습니다.”
- 다시 묻는데, 지훈이 얘기. 그 아이한텐 정말 안 했겠지?
“뭐 자랑할 일이라고 소희한테까지 그걸 말합니까. 게다가 아버지가 소희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제가.”
- 네 말대로 하마.
한숨 섞인 구 회장의 말에 지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드디어, 됐다.
“…정말입니까?”
- 그래. 그러니 신유현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 너도 어서 돌아와. 나머지는 만나서 의논하고.
“의논은 무슨. 제가 내건 조건을 기억하실 텐데요. 향후 동일 시술 및 검사 전면 금지, 회사가 보유 중인 해당 자료 전량 폐기. 타협은 없습니다.”
- 거참! 알겠다고 하지 않냐. 네 말대로 할 테니, 일단 한국으로 와.
“그 약속, 정말 지키실 거란 확신 없이는 안 가요. 신유현 기자도 계속 대기할 겁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 끝까지 믿어선 안 된다. 지겸은 완강했다.
- 하…. 지겸아, 너도 참 답답하구나. 그 아이, 소희 생각은 안 하냐?
그의 입에서 소희의 이름이 나오자 지겸이 멈칫했다. 이게 무슨. 아버지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걱정하는 척하는 게 불쾌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만든 이 상황에 대한 책임감과 소희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그가 동요하는 걸 느끼고 구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훈이 말대로군. 지겸은 소희에게 진심인 것이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
- 혹시나 몰라 보호한다고 거기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인가 본데, 괜찮으니 그냥 오거라. 너도 내 자식이야. 게다가 임 재단장 내외가 무척 걱정하고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소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지겸은 결코 냉정해질 수 없었다. 그녀를 제대로 이해시키지도 못한 채 억지로 붙잡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내내 불안하고 괴로웠다. 오늘 지겸은 그녀에게 대부분의 사정을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소희가 그를 용서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녀의 몸 상태가 너무 불안정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익숙한 장소에서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있을 테니 그녀가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훨씬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아버지가 먼저 들어오라고 종용하는 게 찝찝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눈에 띄게 수월하게 느껴지는 대화도 조금 어색했다. 지겸은 다른 가능성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구 회장은 지겸이 다른 생각도 못하도록 빨리 말을 이었다.
- 임 재단장 내외랑 얘기했다. 너랑 소희, 둘이 결혼시키기로. 그러니까 들어와.
“저희 둘 문제를 왜 맘대로 결정합니까? 결혼하든 말든 그건 소희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한국 들어가는 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게 말씀하신 약속, 제대로 이행하시는지 먼저 지켜보지요.”
전화를 끊고도 지겸은 문 앞을 좀 더 서성였다. 소희와 결혼이라. 무엇보다 지겸이 원하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으려나.
그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카드키를 꺼냈다. 복잡한 생각도, 다른 고민도 지금은 잠시 잊자. 이 방 안에 있을, 임소희, 그 여자만 생각하자. 양손에 주렁주렁 매단 음식과 꽃을 훑어봤다. 이 중에 단 하나라도 그녀 맘에 드는 게 있기를. 그래서 작게나마 미소 짓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티리릭. 작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
으으.
소희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뜨기 위해 애써 눈을 깜빡였다.
“흣.”
뭐지. 온몸이 찌뿌둥, 아니 갑갑하고 무겁다. 손도 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건가. 조금씩 정신이 돌아올수록 점점 더 이상했다. 가위에 눌렸다면 손가락 끝도 움직일 수 없었을 텐데 감각이 있다. 고개도 끄덕이거나, 양옆으로 흔들 수 있고.
“잘 잤어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 깜짝 놀란 소희가 그제야 눈을 번쩍 떴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옜다. 누구였더라. 생각을 차근히 더듬으니 그제야 떠올랐다.
“선생…님?”
그녀를 진료한 의사, 승현이었다.
“와- 겨우 그 정도 양의 수면제에 이 정도로 푹 잘 줄이야. 평생 불면증 같은 거, 시달려 본 적도 없죠?”
하긴 그럴 거야. 그 배경에, 외모에. 뭐가 아쉬워서.
진료실 안에서처럼 단정했던 남자의 얼굴은 더 이상 없었다. 그의 표정은 뒤에 이어진 말을 짓씹듯 내뱉으면서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인 소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그의 권유로 주사실에서 영양제를 맞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지금 이곳은 주사실이 아니었다. 어디지…? 짙은 회색 벽이 둘러싼 작은 공간에는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와 그 앞 책상이 가구의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모니터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확실한 건, 이곳이 병원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 내 집입니다. 여기.”
집? 왜 저 사람 집에 자신이 와 있는 거지. 막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면제의 영향인지 생각도 말도 느릿하게 나왔다. 이상했다. 무엇보다 왜 이리 답답하지. 몸이 어딘가에 꽉 매여져 있는 것 같았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고 급하게 차올랐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진 소희가 그제야 시선을 내려 제 상태를 확인했다.
“히익!”
똑바로 서 있는 채로 소희의 몸 여기저기가 두꺼운 밧줄에 전체적으로 묶여 있었다. 전면엔 X자 모양으로 양쪽 가슴을 두르며 압박하고 있었고 팔은 뒤로 접혀 단단히 묶어놓았다. 연결된 밧줄은 양쪽 허벅지를 벌리며 교차하듯 동여매 있어, 어떤 식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끔 매듭지어 있었다.
“푸, 풀어줘요. 대체, 왜 이런…!”
놀란 소희가 밧줄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을 바르작댔다. 물론 아무 소용없었다. 도리어 그녀가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단단히 묶인 밧줄이 파고들어 여린 살이 쓸려 상처가 생겼다.
“읏….”
“조심, 조심해야죠. 안 그래도 살이 이렇게 하얀데, 상처 생기면 보기 싫잖아.”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가 천천히 소희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완전 잘 묶었죠? 귀갑 묶기라고. 내 일본인 친구 하나가 예전에 가르쳐줬던 거거든. 그 나라에는 그거 배우는 전공도 있다더라고요?”
몸도 아프고 피부 여기저기가 쓰라렸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소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를까 싶었지만, 개인 집이라고 했으니 소용없을 터였다. 제 앞의 여자가 떠는 모습을 보며 승현의 눈에는 반대로 만족감이 서렸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뭐죠. 도, 돈이라면….”
“돈?”
하하. 소희의 말에 남자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싱가포르는 의료비가 비싼 나라예요. 내가 뭐 돈 때문에 이러겠어요?”
“그럼 대체 왜. 이, 이해가… 안 가요.”
“고귀하신 로열 오메가께서 나 같은 열성 알파의 생각을 어찌 이해하겠어요. 안 그래?”
“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이 사람 열성 알파였구나. 어쩐지 알파인 것 같은데 느껴지는 페로몬이 약하다고 생각했었다. 재림대 학생의 95% 이상이 우성 알파/오메가다. 열성 알파가 재림 의대였다면 어마어마하게 노력했다는 뜻일 것이다.
“수석 입학, 수석 졸업했던가요? 임소희 씨?”
남자가 등을 돌려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난 재림대에서, 그것도 의대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루 한 시간도 못 자고 공부만 했죠. 그때 습관이 아직도 배어 있어서 새벽에 2시간마다 깨. 그런데 우성이니 로열이니 하던 동기들? 전날 클럽 가서 밤새워 놀고 떡도 치고 시험을 쳐도 나보다 잘 보더군요.”
드르륵 탁. 그가 서랍에서 박스를 하나 꺼냈다. 다양한 사이즈의 메스며 수술용 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승현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천천히 도구함을 뒤져 작고 날카로운 메스를 하나 꺼내 손에 쥐었다.
“히끅.”
잔뜩 겁을 먹은 눈동자로 남자의 행동을 쫓아가던 소희가 깜짝 놀랐다. 그런 그녀 입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정수리와 명치를 타고 소름이 번졌다. 메스의 칼날을 이리저리 가늠해 보는 남자의 모습이 무섭다 못해 괴이했다. 불길한 예감에 소희의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불공평하죠?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왜 이러는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아등바등 애를 써도, 너희 그 타고나신 우성들 발끝도 못 따라가는 나 같은 열성 찌꺼기의 심정을, 우리 재림재단 공주님께서 알 리가 없지. 안 그래요?”
저벅저벅. 소희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구두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가 손에 든 메스의 날카로운 칼날에 형광등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흐, 흐으….”
투둑. 소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이 덜덜 떨렸다.
“아흑!”
남자가 소희의 눈앞에 메스를 들이밀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쉿. 겁먹지 마요. 해치진 않을 거니까.”
스륵, 스슥.
그가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들더니 아래서부터 위로 메스로 스윽 그었다. 섬뜩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 천 쪼가리 안이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의식이 없을 때 벗기면 재미없잖아.”
남자는 마치 수술 집도 중인 의사처럼 정교하고 조심스럽게 옷을 잘라 벗겨냈다. 점차 드러나는 살결이 보다 더 세게 떨리고 있었다.
“흑.”
차마 감은 눈을 뜨지 못하는 소희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상황이 모욕적이었지만 무서움이 더 컸다.
휘유. 승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속옷만 입은 채 밧줄에 묶인 여체가 예상보다 더 색스러웠다.
곧바로 남자의 발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온몸의 촉각이 곤두섰다.
“자, 임소희 씨. 여기 좀 볼까?”
싫었다. 이렇게 묶여서, 옷도 걸치지 못한 채 낯선 남자의 눈을 마주칠 용기 같은 건 없었다.
“소희 씨. 지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나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고개 들고, 여기 봐.”
어쩔 수 없이, 아주 천천히 소희가 눈을 떴다. 투둑, 맺혔던 눈물이 다시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찰칵. 찰칵.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지, 지금 무슨!”
소희의 눈앞이 하얘졌다.
“자 웃어 봐요. 예쁘게!”
찰칵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가 연이어 터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꽉 묶인 밧줄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 마! 하지 마요! 제발….”
승현은 소희의 울음 섞인 애원을 가볍게 무시했다. 수십 장의 사진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었다.
필요한 만큼 사진을 다 찍은 승현은 그녀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두려움이 가득하던 소희의 눈에는 이제 절망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자, 이제 준비도 대충 끝났겠다. 주인공을 모셔 봐야겠지요?”
무슨 헛소리인가. 이 남자는 정신병자가 분명했다. 소희가 그를 노려봤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남자의 목적이 단순히 자신을 해치려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게 무슨 얘기예요?”
“아니 여자 주인공이 이렇게 떡하니 있는데. 남자 주인공이 없으면 안 되지. 그럼 이제, 솔직히 말해 봐요. 소희 씨한테 각인한 거, 구지훈 아니지?”
“뭐라고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소희의 모습에서 승현은 긍정의 답을 얻었다.
“그렇잖아. 어느 오메가 여성이 약혼자랑 노팅했다고 사후피임약을 먹겠습니까? 다- 뻔한 스토리죠. 그래서 그 반반한 얼굴에 죽고 못 사는 애인이라도 따로 있었어요? 사랑의 도망? 그것도 아니면. 아, 다른 알파한테 납치돼 강간이라도 당했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비웃음이 절여 있었다. 이 모든 사태가 너무나 즐겁다는 듯 흥분한 모습이 더욱 끔찍했다. 소희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술을 꽉 다물었다. 풋. 남자가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뭐, 답해 줄 거라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에요. 어차피 휴대폰만 켜보면 바로 알겠지. 각인까지 한 제 오메가가 사라졌는데, 정신이 멀쩡히 붙어 있을 알파는 없거든.”
남자가 즐거운 듯 소희의 휴대폰을 까딱까딱 흔들더니 전원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