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35화 (3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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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가끔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비가 올 것을 예감하며 낮게 나는 잠자리든, 밤하늘에 높게 뜬 달무리든. 그러니까 소희도 미리 눈치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호텔 엘리베이터가 점검이라 멀리 돌아가야 했을 때. 로비에서 뛰어가던 아이와 부딪혀 무릎방아를 찧었을 때. 입구를 나서자마자 갑작스레 쏟아지는 장대비에 어깨가 잔뜩 젖었을 때. 그것도 아니면 남편이 오늘은 오프라며 동료 의사를 소개해 준다고 선배 언니가 말했을 때에라도.

소희가 택시를 타고 내린 곳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붐비고 번화한 오차드 거리의 한 병원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고 천둥과 번개까지 울려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흰 구름이 떠다니던 파란 하늘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니 놀라웠다.

동남아 날씨란 정말 변화무쌍하구나. 치마 끝자락에 흥건한 빗방울을 털어내며 소희는 내심 감탄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가 오는 통에 습하고 불편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며 투덜거리던 선배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13층에 위치한 병원에 도착했다. 회색 벽지와 흰 대리석으로 꾸며진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소희 말고도 두 명의 여자가 더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은은하게 풍기는 오메가 페로몬 때문에 단번에 그들이 우성 오메가임을 알 수 있었다. 소희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제 차례를 기다렸다. 유정과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느라, 다른 여자 둘이 소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흘끔대며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선배 언니는 싱가포르 현지인과 결혼하였는데, 소희가 찾아온 곳은 그 형부와 다른 의사가 공동으로 개원한 개인 병원이었다. 주로 오메가 여성들의 산부인과 진료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오늘 만날 의사가 한국계라고 하니 자신에게도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후배시라고요.”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하는 의사는 키가 제법 크고 짙은 쌍꺼풀 때문에 인상이 진한 남자였다.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명패를 보니 적힌 이름은 낯선 것이었다. ‘Seung Hyun Lee(이승현) ’.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희에게 편안히 앉으라 권한 그가 진료를 시작했다.

“네, 안녕하세요. 미리 예약하지도 못했는데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그래야죠. 최근에 억제제 부작용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부작용이라기보다는 복용하던 약의 종류가 바뀌어서….”

소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라 말끝을 흐렸다. 사춘기 시기, 발현할 때의 첫 발정기를 제외하고 일부러가 아닌 이상 히트/러트 사이클을 무모하게 거치는 알파나 오메가 성인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가 먼저 좀 보겠습니다.”

심장박동, 호흡수(Vital sign), 체온, 혈압 등을 검사하던 남자가 미간을 아주 희미하게 찌푸렸다.

“최근에 혹시 히트 사이클 겪으셨습니까?”

“…네?”

당황하는 소희를 보고, 의사는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걸 알았으나 모르는 척했다. 그녀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녀가 진료실을 들어오는 순간 머리가 쩡 하고 울릴 정도로 강한 알파 페로몬이 느껴졌다. 오메가가 이 정도로 알파의 페로몬에 적셔질 수 있는 건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발정기에 서로 수없이 관계를 맺고 노팅을 하는 것.

게다가 우성 알파로 둘러싸인 의대를 거친 승현조차도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한 페로몬이었다. 아마 상대는 로열 알파일 것이다. 강한 알파일수록 소유욕과 과시욕도 세지는 것은 만물의 이치다.

“심하지는 않지만, 저체온, 저혈압 증상이 있습니다. 지금 어지러우시진 않으세요?”

그러고 보니 소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가슴이 좀 답답하고 어지럽다고 느꼈다. 최근 며칠간 여러 가지로 무리했을 뿐더러 원래 기립성 빈혈 증상이 가끔 있던 터라 그 연장 선상이 아닐까 했는데.

“아… 오는 길에 숨쉬기 힘겹고 산소가 부족한 듯 머릿속이 뿌옇고 어지럽기는 했어요. 정말 히트 사이클… 이후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나요?”

소희가 히트 사이클, 이란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꺼냈다. 보통의 알파와 오메가가 그렇듯 소희도 처음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로는 꾸준히 억제제를 복용해 왔기 때문에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 적도 없었고 관련 정보에도 약했다. 순간 약간 떨리는 듯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승현은 쉽게 알아챘다.

“전형적인 히트 사이클 직후의 몸 상태예요. 저혈압 증상은 흔한데 다만 저체온은 잘 나타나는 경우는 아니라. 몸이 많이 지쳐있는 것 같으시네요. 말씀처럼 바꾼 억제제가 환자분과 맞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사이클도, 잘못된 억제제 복용으로 호르몬 주기가 틀어지면서 발생했을 수도 있고요. 기존에 드시던 억제제가 어떤 제품이었죠?”

“베논… 제약 제품을 오랫동안 복용했어요.”

“아, 이프로슈트안 계열의 억제제겠군요. 베논 제약 것은 아니지만, 싱가포르에서 많이 사용되는 같은 계열 억제제가 있습니다. 그걸로 처방해 드릴게요.”

“선생님 그리고… 저, 사후피임약도 처방 부탁드릴게요.”

사후피임약이라는 소리에 의사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어 소희를 훑었다. 긴 머리를 내려 가렸지만 목덜미에 아주 희미하게 각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며칠 전 히트 사이클을 겪은 오메가이니 그때 자신의 알파 연인과 각인이나 노팅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녀 온몸을 감싼 페로몬만 봐도 알기 쉬웠다. 그런데 사후피임약이 필요하다라….

오랜만에 발견한 흥미로운 케이스에 승현이 한 손으로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잠깐 진료만 볼 테니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척할 계획이었는데.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소희가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느릿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오메가용 사후피임약, 같이 처방해 드리지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소희가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남자가 같이 일어섰다. 괜히 놀란 소희가 살짝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그가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런데 임소희 씨. 저… 몰라요?”

아, 정말 어디서든 안면이 있던 사람일까?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느껴지던 기시감을 떠올리며 소희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대답을 차마 못하고 난처해하자, 그의 얼굴에 실망하는 듯한 표정이 잠시 스쳤다. 그러더니 곧 피식 웃었다.

“저 재림 의대 나왔는데. 소희 씨랑 같은 교양 수업도 들었을걸요. 물론 전 알파라 교실은 따로였지만.”

“어머 정말요?”

반가움에 소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민망한 상황이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동창을 만난 건 그다지 싫지 않았다. 게다가 재림대는 부모님이 평생을 바쳐 운영하신 곳이니, 소희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어쩐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가지로 세심하게 진찰해 주시고 빠른 처방 내려주신 것도 감사해요. 타지에서 같은 학교 출신을 뵈니까 반갑네요.”

임소희. 그녀를 모르는 재림대 학생은 아마 없을 거다. 재림대 공주님. 재림 재단의 하나뿐인 딸이자 인형같이 예쁜 외모와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지닌 로열 오메가. 그녀는 재림대를 다니는 모든 알파 남자들의 선망 대상이었으나, 동시에 꿈조차 꿀 수 없는 신화나 동화 속 존재 같은 여자였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베논 제약 구지훈의 약혼녀니까.

며칠 후, 두 사람의 결혼식이 몰디브에서 진행된다는 걸 승현도 사실 알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가십 기사야 굳이 찾지 않아도 포털 여기저기에 뜨곤 하니까. 궁금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자세한 내용을 알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최근 한 기사에서는 그녀가 입기로 한 웨딩드레스가 어떤 디자이너의 작품인지까지 알아내 대서특필해댔을 정도다.

요란한 결혼식을 앞두고 둘이 밤도 대단하게 보냈나 보지. 그러니 승현은 그녀의 각인 상대에 대해서도 별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희가 그에게 사후피임약을 처방해 달라고 했던 순간, 승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서렸다.

“네 저도. 생각해 보면 제수씨가 재림대 출신이니, 당연히 동문이었을 텐데. 들어오시는 걸 보고야 알았네요. 참 소희 씨.”

반가운 마음에 소희가 여전히 눈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를 응시했다.

“네?”

“몸이 많이 상했어요.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영양제 좀 맞고 가세요. 제가 그냥 놓아드릴게요.”

“아… 제가 링거는 계속 맞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30분 정도만 맞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영양제에 호르몬 주기 안정에 도움 되는 것도 함께 넣어드릴게요. 그거 맞으시면 한동안 사이클이 불쑥 시작될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동창을 만나 반가워 그러니 사양하지 마세요.”

원래 소희는 사후피임약과 억제제만 받고 빨리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던 터라, 당연히 거절하려 했었다. 하지만 히트 사이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솔깃했다. 게다가 동문의 호의. 30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음,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진료실 나가시면 오른편에 주사실 있습니다. 간호사에게 따로 안내받으세요.”

깔끔하게 웃으며 승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참 웃음이 많은 사람이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눈가에 걸리는 미소와 많은 환자를 대해 본 의사답게 젠틀한 표정을 바라보며 소희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한국 오실 일 있으면, 제가 식사든 차든 꼭 대접할게요.”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아, 그리고 결혼 축하합니다. 뭐… 워낙 유명한 커플이시니까.”

“아… 네….”

결혼이라는 말에 소희가 조금 당황하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때 승현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던 것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곧 간호사가 와서 소희를 주사실로 안내했다. 보통의 영양제가 아닌지 컬러가 투명한 하늘색이었다.

똑, 똑. 방울방울 떨어지며 약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쳐서 그런가.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으니 그녀도 모르게 살살 졸음이 왔다.

30분 정도는 괜찮겠지. 소희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딸깍. 밖에서 주사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잠든 소희는 미처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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