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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워.
소희는 침대에 기대앉아서, 조금 전 외출한 지겸이 한 말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고맙다니.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니 사다 달라고 한 건 소희였다. 그런데 그는 마치 자신의 부탁을 소희가 들어주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디저트는 무엇이 좋은지, 과일도 사 올지 재차 묻는 그는 들떠 보였다. 사실 소희는 게나 새우 같은 갑각류 음식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칠리크랩이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라고 하니까.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하며 먹고 싶다고 말했더니 지겸은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 점심으로 먹으려면 빨리 움직여야겠다. 아무래도 뜨거울 때 바로 먹는 게 맛있을 텐데. 같이 가서 먹는 건… 무리려나.
소희가 대답 대신 짐짓 피곤한 표정을 지었더니 지겸은 더 묻지 않고 방을 나가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왔다. 편한 대로 써. 대신 부모님께는 아직 연락드리지 마. 그게 네게도 더 좋을 거야, 소희야.
그녀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지겸이 혹시라도 소희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눈치챈다면 아예 호텔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 아, 그런데 소희 너… 게 요리 못 먹지 않았어?
순간 그녀도 흠칫 놀랐다. 어째 그는 소희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바보같이도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 어릴 땐 그랬는데, 지금은… 잘 먹어요.
- 그랬구나. 그럼 빨리 돌아올 테니까 쉬고 있어. 알겠지?
어느덧 그녀 쪽으로 허리를 굽힌 지겸이 소희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등을 돌렸다.
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그의 뒷모습이 자연스레 소희 눈에 들어왔다. 어깨와 등, 허리까지 탄탄한 근육이 셔츠 안에 빈틈없이 맞물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미묘한 주름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녀는 저 얇은 옷감 아래 몸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절정의 순간,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붙들며 손톱을 박아 넣었던 어깨의 단단함이라든지, 등을 따라 허리까지 이어지던 움푹 팬 남자의 척추골 같은 게 떠올랐다. 그러자 명치 주변이 조여들며 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미쳤어, 임소희. 정말 별생각을 다.
이제 보니 그동안 눈치 못 챈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지겸은 분명 지훈보다 키도 조금 큰 것 같고 어깨도 더 넓다. 지훈도 체격이 좋은 편이었지만, 팔이나 등에 자잘한 근육이 많이 잡힌 탓인지 지겸의 몸선이 전체적으로 더 두껍다는 인상이었다.
그뿐인가. 지겸은 지훈보다 목소리도 살짝 더 낮고 말투도 묘하게 느릿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강했다. 지훈은 아버지와 같이 소희를 하대하듯 대했으나 반면 지겸은 기본적으로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밴 것 같았다. 한마디를 해도 바로 내뱉지 않고 충분히 생각한 뒤에야말로 옮기는 편이었다. 특히 소희와 대화할 때의 지겸은 주로 듣는 편이었다. 대부분 자신 위주의 화제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지훈과는 아주 달랐다.
소희가 오랜만에 받아든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지난번처럼 수십 통, 혹은 수백 통의 부재중 통화가 쌓여 있지 않을까 긴장했는데 생각 외로 조교 예은이 보낸 문자 말고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걸까. 최근 통화 목록을 보니 가장 위에 지훈의 이름이 보였다. 며칠 전, 어떤 상황에서 그와 통화했었는지를 떠올리니 심장이 다시 쿵쾅거렸다.
생각해 보면 지훈과 지겸은 모든 게 달랐다. 조금만 의심을 했다면, 한 번만 제대로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면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소희가 그동안 지훈에게, 아니면 남자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 차이를 더 느끼지 못했던 걸까. 얼마 전 자신의 집에 잠깐 왔을 때나 싱가포르에서도 소희는 지겸이 지훈이 아닐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평소의 지훈보다 더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졌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아니, 사실은 소희 스스로 속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뭔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이 들 때마다 그걸 억누르고 무시한 건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지훈인 척 그녀 곁에 있던 지겸의 따뜻함이, 그 곧게 뻗은 애정이 실은 달콤하고 좋아서.
잠깐, 그럼 그동안 다녀왔던 휴가도… 그때도 지훈이 아니라 지겸이었던 걸까? 소희는 이전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누가 지훈이고. 누가 지겸이었을지를 가늠해 봤다. 이유야 어쨌건 지겸은 분명 그녀를 속인 게 맞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도 자신에게도 화가 나는데, 생각할수록 가슴 한쪽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뭐랄까.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
소희는 지겸에 대해서,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우선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그와 마주하고 대화를 더 나눠보자.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고,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적어도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유정에 대해서도 좀 더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소희는 통화목록에서 유정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뚜- 뚜-. 신호음이 오래 울렸지만, 유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어 번 더 전화를 해 봤지만 연결되지 않자 소희는 대신 톡을 보냈다.
[유정아 혹시 많이 바빠? 전화 통화 가능할 때 연락 부탁해.]
방금 전화를 받지 않은 사람치고 소희의 톡을 읽었다는 표시가 빨랐다. 어, 전화를 못 받는 게 아니었나.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유정에게 답이 왔다.
[당분간 전화하지 말아줘. 내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아. 소희는 멍하니 앉아 유정의 문자를 한참 쳐다봤다. 두 문장에 담긴 명확한 거부의 의사를. 그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알겠어 유정아. 언제든 좋으니 연락 부탁해. 몸, 조심하구….]
그녀는 황망하고 착잡한 기분에 휴대폰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싱가포르에 사는 선배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정의 일이 신경 쓰이고 속이 답답했지만, 지금은 사후피임약을 받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 그녀는 전화를 바로 받았고, 형부가 일하는 병원 주소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소희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녀에게 억제제를 잘못 먹어 사이클이 엉망이 된 것 같다고 대충 둘러댔다. 열이 나고 아팠다고 하니 선배가 결혼식이 코앞인데 어떡하냐며 걱정해 줬다. 아직 소희의 결혼식이 깨졌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배는 오늘 남편이 학회 일로 자리를 비워서, 파트너 의사가 진료를 본다고 알려주며 자신이 대신 전화해 예약을 잡아주겠다고 말했다. 소희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겸이 옮겨뒀던 건지 서재 쪽에 그녀의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소희는 아무 원피스나 대충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 서두르면 지겸보다 빨리 호텔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그가 포장해 온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
지겸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크랩 요리 전문점에 도착했다. 웬만한 미슐랭 레스토랑보다 예약하기 어려워서, 최소 한 달 전에 전화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곳이었다.
“Hi, I am the person who just called(안녕하세요, 방금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I know. One Chili and one pepper crab, right? But as I said, It’s our restaurant policy that we don’t serve take-out but only dine-in to keep food’s quality as its best(압니다. 칠리 크랩 하나랑 페퍼 크랩 하나 부탁하셨죠?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저희 레스토랑은 음식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포장 판매를 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오직 레스토랑 안에서만 드실 수 있어요).”
식당 매니저의 단호한 태도에 지겸의 눈썹이 미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이런 게나 파는 레스토랑 따위가. 아예 가게를 하나 사버릴까 생각하다가 소희를 떠올리며 참았다. 진심으로 호소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자기보다 한참은 키가 작은 매니저에게 허리를 굽혀가며 재차 부탁했다.
“I understand, but I can pay more(이해합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비용을 더 지불할 생각이 있습니다). My wife is very sick and really wants to have this(사실 제 아내가 몸이 많이 안 좋은데 꼭 이곳의 칠리크랩을 먹고 싶다고 해서요).”
그런데도 매니저는 안 된다며 완강했다. 소희의 부탁이다. 지겸에게 뭔가를 해 달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지겸은 한숨을 푹 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김 실장에게 전화했다.
- 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그 건이라면 제가 이미 보고서를….
“아니, 그거 말고요. 그 우리 회사에서 관리하는 VIP 중에,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 아들, 그 누구였죠. 리 홍….”
- 아 리홍이 님 말씀입니까?
“나나 구지훈이 싱가포르 오면 밥 산다고 난리 아니었었나?”
- 네 몇 번이나 초청했었지요. 그런데 그건 왜….
“그 사람 연락처 주고, 내가 레스토랑 이름 하나 보낼 테니까 오너 연결해 줘요.”
- 알겠습니다.
곧 지겸의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지겸은 웃는 얼굴로 대화 몇 마디 나누더니 끊었다. 잠시 후 레스토랑 안쪽에서 직원 한 명이 다급히 뛰어왔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매니저에게 내밀며 중국어로 몇 마디 건네자, 매니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매니저가 지겸을 돌아봤다.
“Take that one(전화 받아 보시죠).”
지겸이 픽, 웃더니 말했다.
매니저는 사장의 전화로 추정되는 전화를 받고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사과하더니 곧 지겸에게도 와서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Sir, I am so sorry for making you wait. I will prepare your food right away. Please wait few more minutes.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주문하신 음식 바로 포장해 오겠습니다.)”
지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황급히 레스토랑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하늘이 보통 때보다 더 환하고 파랬다. 비가 많이 오는 동남아답게 커다랗고 다양한 모양의 구름이 몽실몽실 예쁘게도 펼쳐져 있었다. 왠지 소희가 좋아할 것 같은 아기자기한 하늘인데. 점심을 먹고 오후엔 둘이 잠시 산책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음식 포장을 받고 나와 조금 걸으니 꽃집이 눈에 띄었다. 싫어할까 싶어 조금 망설이다가 지겸이 안으로 들어갔다. 장미나 튤립은 너무 흔해. 소희에겐 보다 은은하고 향긋한 꽃이 어울렸다. 그런 그의 눈에 자그마한 하얀색 종이 매달려 있는 듯한 아기자기한 꽃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우아하면서 사랑스럽고, 처연한 듯 귀여웠다. 꼭 그녀의 웃음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Lily of the valley. 한국에선 흔히 은방울꽃이라 불리는 꽃이다. 지겸이 그 가게에 있는 은방울꽃을 모두 포장해 달라고 하니, 비싼 수입 꽃을 한 번에 팔게 되어 신난 가게주인이 요즘 부케로도 유행하는 꽃이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그 가게주인은 민트색 리본으로 꽃을 포장하며 은방울꽃의 꽃말을 넌지시 알려줬다.
‘아침이 오듯이, 당신에게 반드시 찾아올 행복.’
지겸은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꽃말을 입 안에 머금어 소리 내지 않고 반복해 말해 봤다. 어쩌면, 그가 소희에게 해 주고 싶은 말. 가장 해 주고 싶은 일.
잠시 후면 그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지겸의 심장이 다시금 뛰었다.
어쩐지 그녀와 함께, 곧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