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소희를 향한 지겸의 고백은 점점 애원으로 변해 갔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지, 사랑해 달라 비는 건지 불명확할 정도였다.
그에게 어떤 답도 할 수 없어서 소희는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기분 좋은 신음을, 마치 대답처럼 들릴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임소희.”
그 손을 지겸이 잡았다. 끌어내려 깍지를 끼더니 드러난 입술에 쪽,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이번엔 소희가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지겸의 눈가가 어쩐지 조금 촉촉해 보였다. 설마.
“이용해.”
“네…?”
“약도, 억제제도 이제 없잖아. 그러니까 필요하면 날 써. 내 몸이라도. 원하는 게 내 몸뿐이라도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소희 네가 곁에 머물러만 준다면.
“정말, 당신은.”
이상해. 미친 게 분명해. 그렇게 욕하고 싶은 소희의 속마음을 읽어낸 양 남자가 웃었다. 하는 짓은 순 사기꾼에 나쁜 놈인데, 지겸은 어쩜 저렇게 소년처럼 말간 미소를 짓는 건지. 소희의 얼굴도, 온몸도 마치 끓는 듯 뜨거워졌다. 그의 키스가 닿은 자리마다 불길이 솟는 것만 같았다.
구지겸, 이 남자는 ‘적당히’가 없다. 소희를 어떤 식으로든 들끓게 한다.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쾌락을 얻고 싶은 욕정이든,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강한 분노든. 그녀의 감정을 기어이 100℃까지 끌어올려 결국 끓어 넘치게 만드는 거다.
이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온몸이 활활 타고 마음마저 온통 녹아버리면 어떻게 하지. 소희는 걱정하면서도 한참을 더 퍼붓는 지겸의 다정한 키스를, 결코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
“소희야 먹을 만해? 크루아상 더 가져달라고 할까? 혹시 수프 너무 식었으면 다시 데워 달랄까?”
“…됐어요. 충분해요.”
이 남자 앞에서는 어떤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고소한 커피 향과 풍미 좋은 버터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지자, 소희는 우습게도 식욕이 돌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링거를 맞으며 버텼다. 그뿐인가. 이 몸 상태로 구지겸, 저 남자와 몇 번이나 몸을 섞고…. 휴. 생각하면 다시금 아랫배 주변에 빠듯하고 야릇한 감각이 모여드는 듯해 떨쳐내려고 소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겸은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아까부터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저 큰 체격에, 짙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하고서도 어딘가 생글거리는 모습이 이제는 조금 귀엽게까지 보이는 스스로가 소희도 참 어이없었다. 꼭 덩치는 큰데 주인 옆에 딱 달라붙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길 기다리는 개 한 마리가 자꾸 떠오른달까.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그녀는 심란해 죽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하고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운데. 이 남자는 뭐가 이리 간단명료하고 흥이 나는지.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제에. 사기꾼 주제에.
소희의 볼멘 질문에도 지겸은 솔직히 그녀가 그에게 먼저 뭔가를 물어봤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았지만.
“아… 네가, 뭘 먹으니까.”
지겸이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하게 답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조금 부끄러운지 귀 끝이 살짝 빨개졌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소희가 아침 먹는 모습을 넋 놓고 쳐다봤다. 그녀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과일이며, 요거트며, 빵조각을 입 안에 넣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음식을 씹는 중에 맛있는지 입꼬리를 미묘하게 올리거나, 커피를 마시기 전에 눈을 스르르 감고 향을 음미하는 1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을 안겨줬기 때문이었다.
“…네?”
남은 크루아상 조각에 라즈베리 잼을 바르다 말고 소희가 멈칫했다. 이 남자가 진짜, 지금 뭐라는 거야. 겨우 생긴 빵 맛도 달아날 지경이라. 소희는 한숨을 쉬고는 식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만 먹게? 조금만 더 먹지.”
“충분해요.”
“몸은 좀 어떤 것 같아? 계속 뻐근하고 아프면 말해. 약 처방 받아줄 테니.”
몸, 이라는 말에 소희의 얼굴이 속절없이 붉게 달아올랐다. 몸이라도 이용하라고. 적어도 자신의 몸은 좋아하지 않냐고 좀 전까지 애원인지 협박인지를 쏟아냈던 이 남자의 간절하던 표정이 떠올라서.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염려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물끄러미 마주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남자의 시선은 곧게 소희만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 온 내내 그랬던 것 같다. 그의 사랑한다는 고백을 그저 거짓이라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쓰는 수에 불과하다고 무시하기엔 저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저런 것까지 속일 수 있을까. 온통 진심이라고 소리치는 듯한, 똑바로 그녀만을 향하는 저 시선까지.
“아.”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지겸이 상체를 조금 일으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또 키스하려나 싶어 놀란 소희가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피식. 그런 그녀를 보며 귀엽다는 듯 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다행히 열은 없네.”
그의 큰 손이 담백하게도 소희의 이마에 얹혔다 떨어졌다.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 보여서. 혹시나, 하고. 그런데 아쉬우면… 해 줘?”
민망해진 소희가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전혀.”
쪽. 순간,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그녀의 왼쪽 뺨에 닿았다.
“생각 없다니까…으읍.”
짜증 내며 고개를 돌리던 소희의 턱이 그의 손끝에 가볍게 잡혔다. 그녀의 뒷말은 지겸의 입술 속으로 삼켜졌다.
그가 소희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빨아 당기니 놀란 그녀가 숨을 탁 뱉어냈다. 그 틈에 벌어진 입술 새로 지겸의 혀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 안을 쓸고 매만졌다. 혀끝이 얽힐 때마다 살살 휘감다 아슬아슬 비껴가는 게 왠지 감질나게 했다.
그동안 지겸과 키스하면 꼭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그가 고개를 꺾어 혀를 좀 더 깊이 집어넣더니 소희의 허리를 감싸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허리 주변부터 척추를 타고 가만가만 간지러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와의 키스에서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쪽.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색색, 소희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지겸은 타액으로 젖은 소희의 입술을 손끝으로 닦아주고는 그녀의 허리 쪽에 뒀던 핫팩을 꺼냈다.
“벌써 다 식었네. 좀 더 데워올게.”
탁. 소희가 몸을 돌리는 그의 팔을 잡았다.
소희도 어렴풋이 지겸이 구 회장, 즉 그의 아버지와 지훈에 대해 그녀에게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건 눈치챘다.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는 것도 그와 관련된 일이리라. 하지만 이제 소희가 가장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원래 이러냐고. 아무 여자한테나 이렇게 다정하게 키스하고, 끌어안고, 사랑한다 고백하느냐고. 만약 그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지겸에게 그렇게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면, 유정에게 일어난 일은 다 무엇이냐고. 요일별로 바뀌는 여자들은 또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 유정이, 안다고 했죠?”
“유정 씨? 알지. 유현이 동생이잖아, 네 친한 친구고. 왜?”
너무나 거리낌 없는 대답이었다. 주춤하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하나도 걸리는 게 없다는 지겸의 말끔한 표정에 소희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유정의 표정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녀에게서 지겸과 만나고 있다고 처음 들은 지도 반년은 넘은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정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다.
지금 그의 낯빛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다면, 눈썹이라도 찌푸렸다면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좀 더 추궁했을지도 모른다. 유정이와 만나고 있었던 걸 소희도 안다고.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말이다.
한국에서 유정은 임신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누군가와 터놓고 상의도 못 하며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지겸은 유정의 이름이 나와도 일말의 동요도 없다는 게 분했다. 저 사람에게는 누군가와의 관계가 이토록 쉽고 간단하다는 게. 그러니까 소희에게도 이렇게 뜨겁게 행동할 수 있는 건가. 화르륵 타올랐다가 식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 애정의 대상을 언제든 원하는 대로 바꾸면 간단하니까.
각인 때문이라고 변명해 봐도, 소희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꾸만 저 남자에게 끌리는 자신이 싫었다. 몸정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건가. 방금 그와의 키스에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멈추자. 지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 자신이 먼저 그를 제대로 끊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에요. 핫팩, 아까는 너무 뜨거웠어요, 좀 덜 데워주면 좋겠어.”
“그럴게, 잠시만 기다려.”
침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희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가 쉽게 여권을 돌려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우선 휴대전화라도 쓰게 해 달라고 하자. 유정과 먼저 통화하는 게 중요했다. 한국의 가족들도 알고 있다면, 소희의 집안과 가까운 유정도 이미 이 사실을 들었을 것이다. 지겸이 어떤 식으로 가족들에게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정이 혹시나 자신 때문에 더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분명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한 각인을 깰 방법이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건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최대한 빨리 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희가 고개를 숙여 제 배 쪽을 봤다.
사후피임약을 먹자.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친했던 대학교 선배 중에 싱가포르에 사는 언니를 떠올린 소희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결심했다. 분명 언니의 남편이 산부인과 의사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언니네를 보러 가려면 우선 호텔을 잠시라도 빠져나가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지겸이 돌아왔다.
“혹시 이것도 너무 뜨거우면 말해. 더 식혀오게.”
지겸이 핫팩을 그녀의 등과 베개 사이에 끼워주고, 그 뒤에 베개를 겹겹이 대어 그녀가 편히 기대앉을 수 있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진지한지 소희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아.
명백히 그를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에 지겸은 입 안이 써지는 것을 느끼며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고는 일어섰다.
“소희야 그럼 좀 쉬어.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주고.”
필요한 거, 있다.
“전화. 휴대전화 잠깐 쓰게 해 줘요.”
“응?”
“뭐든 말하라면서요. 부모님께는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제 친구, 유정이에게 일이 좀 있어요.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요.”
사실상 소희가 지겸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똑바로 마주하고 깜빡이며 묻는 청을 그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어. 가져다줄게.”
“그리고.”
소희가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먹었던 룸서비스 테이블을 응시했다. 짧은 순간 떠올랐다. 그녀가 빵 조금 먹는다고 연신 미소를 짓던 그의 모습, 그리고.
“나, 먹고 싶은 거 있는데. 사다 줄 수 있어요?”
이 호텔룸을 빠져나갈 좋은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