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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가 눈을 떴을 땐, 다시 침대 위였다. 아침이 밝았는지 살짝 열린 커튼 틈새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따다닥, 따닥, 따닥. 가까이에서 빠르게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Well…. Then, just send me the first test result as soon as you get it. I appreciated. Bye.(네, 그럼 첫 번째 검사 결과 나오자마자 저한테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고맙습니다.)”
상체만 살짝 일으키니, 침실 안 책상에 앉아 있는 지겸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통화를 마치고도 꽤 한참을 모니터를 살피며 심각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아. 안경을 쓰고 있네…? 얇은 금테 안경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지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나자, 안경을 쓴 그의 모습도 지훈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스락. 그가 뭔가를 쓰거나, 자세를 바꿀 때마다 입고 있는 흰 셔츠가 팽팽히 당겨졌다. 움직임에 따라 주름이 가고, 조금씩 소리도 났다.
뭐랄까.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큰 체격에도 묘하게 섬세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피아노를 친데도 어울릴 법한 길고 곧은 손가락도 그렇고.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지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지겸이 그제야 그녀 쪽을 돌아봤다. 벌써 일어났는지 몰랐다는 듯 그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곧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소희야. 잘 잤어…?”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웃는 거지. 어제 자신은 그로부터 도망쳤다. 분명 화를 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서도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런 무해한 웃음이 나올까? 역시 이상한 남자다. 저러니까 유정의 말처럼 그렇게 많은 여자에게….
그렇게 생각에 골몰한 동안 지겸이 몸을 일으켜 소희 쪽으로 다가왔다. 면바지에 흰 셔츠 차림이었는데 윗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어 갈라진 가슴근육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그 틈으로…. 울긋불긋한 몇 개의 울혈 자국과 손톱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 정사의 흔적. 화르륵.소희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앙. 흑… 오, 오빠.]
[힘들면 날 깨물어. 할퀴어도, 좋고.]
끊이지 않는 거센 추삽질로 힘겨워하는 소희에게 그는 자신의 몸을 제물(祭物)처럼 갖다 댔었다. 소희의 몸이야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물고 빨고 씹어댄 흔적으로 온통 울긋불긋했지만. 지겸의 몸도 만만치 않았다. 퍽퍽 쳐오는 성기의 압박감을, 발끝부터 올라오는 찌릿한 쾌감을 버텨내기 위해 소희는 그의 가슴, 등, 어깨 여기저기를 물고 빨았다. 손으로 잡아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버둥대다 손톱으로 긁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밝은 아침의 빛 아래 남자의 몸에서 그런 제 흔적이 엿보이니 쳐다보기 힘겨울 수밖에. 소희는 입술을 말아 한쪽을 깨물었다.
“아니.”
그의 손이 쑥 그녀 앞에 다가왔다. 흠칫 놀라며 소희가 몸을 뒤로 물렀다.
지겸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가 때리기라도 하려던 사람인 것처럼 소희는 겁이 난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느릿하게 깨물린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풀며 살살 매만졌다.
“깨물지 마. 입술 터진 거 겨우 나아가는데.”
겨우 그것 때문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희가 지겸을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한없이 다정하다.
믿으면 안 돼. 저 눈으로 또, 그녀의 마음을 흔들려는 게 분명하다. 전부 다 속이기 위한 거야.
탁. 소희가 그의 손을 쳐 뿌리치며 물었다.
“당신… 원하는 게 뭐에요?”
“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소희를 당황한 표정으로 내려 보던 지겸이 그녀에게서 몸을 물렸다. 그 표정이 쓸쓸해 보였지만 소희는 무시하기로 했다.
“말했던 것 같은데….”
“못 들었어요.”
“너.”
“…네?”
“내가 원하는 게 뭐냐며. 너야, 임소희. 너였어. 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자신을 원해서 지훈인 척했다고? 그런 남자가 요일마다 다른 여자를 만나 잠을 자고, 유정을 임신시키기까지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희는 이제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못 미더운지, 얼마나 질이 낮은 사람인지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런 달콤한 말과 표정에 속아 넘어갈 줄 알았나 보지.
“이제 보니 입만 열면 거짓말이시네요.”
“소희야. 화날 수밖에 없는 거 알아. 날 믿을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적어도 그런 거짓말은, 네 앞에서 절대 하지 않….”
“그럼 어떤 거짓말을 하셨는데요?”
지겸이 흠칫하자 소희가 조소를 섞으며 덧붙였다.
“묻잖아요. 지금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다른 건 거짓말이라는 뜻이니까. 안 그래도 묻고 싶었어요. 나한테 줬던 억제제. 그거 정말 억제제 맞아요?”
지겸이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이 돌아왔다. 아무리 모든 게 진심이고 실은 그녀를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결국 그녀의 히트 사이클을 억지로 만들어 내고 그 기회를 이용한 건 그였다. 기만이고 범죄였다.
후. 깊은 한숨을 뱉어낸 그가 소희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흡. 소희는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지훈과 똑같이 생겼지만 눈빛은 전혀 다르다. 며칠 내내 그랬지. 이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소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지금도 말도 안 되게 맘이 약해지려 한다. 게다가 그의 페로몬. 일부러 절제하고 있는 게 느껴지는 데도 그녀에게 다가온 그의 체향에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린다.
“그건… 내가 정말, 정말 잘못했어. 어떤 식으로든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야. 하지만 소희야. 내가 다 설명할게. 아무것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딱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기회요?”
소희가 차갑게 되물었다.
“당신은 나한테 무슨 기회를 줬는데요? 그날 밤, 당신과 그, 그런 짓을 했던 건 당신이 내 약혼자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나를 속여서 선택할 기회를 빼앗아놓고, 거짓말한 건 미안하니 당신에게는 기회를 달라고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각인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모님은 무슨 낯으로 보고 지훈에겐 또 어떻게…. 우선 이 남자한테서 벗어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돌아간 후에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엉망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소희가 인상을 쓰면서 눈을 질끈 감자, 지겸이 얼른 손을 뻗어 그녀 이마에 손을 대 열이 있는지 체크했다.
“어젯밤 미열이 있었어. 혹시 지금도 머리 많이 아파? 몸은. 몸은 안 추워? 만약 떨리거나….”
“나가요.”
“…응?”
“못 들었어요? 이 방에서 나가라고!”
소희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일 것이다.
“…알겠어.”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담담하지만 쓰린 표정으로 지겸이 소희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런 접촉조차 불쾌해서 소희는 그의 손길에서 고개를 홱 뺐다.
천천히 걸어 나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희는 또 구역질이 올라와 화장실에 가서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먹은 게 거의 아무것도 없어서, 노란 위액까지 뱉어졌다.
그녀는 결국 그대로 주저앉았다.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그 분노의 대상이 그 남자인지 자신인지도 헷갈렸다.
그가 자신에게 한 짓들이, 이 남자 자체가 증오스러운데. 우습게도 가까이에 붙어 있으니 가슴이 뛰고 몸이 자꾸 그에게 동했다.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뺨을 쓰다듬어줄 땐 좋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미쳤나 봐. 정말 짐승이 아니고서야. 각인과 노팅이 머리와 몸을 이렇게까지 따로 반응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줄 몰랐다.
참담했다. 마음껏 미워할 수도 마음껏 좋아할 수도 없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 소희는 출구도 없는 미로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
지겸이 몇 번이나 룸서비스로 시킨 요리를 방 안에 건네줬으나 소희에게선 한 숟갈도 뜨지 않은 접시만 돌아왔다. 아무리 어제 내내 그가 링거를 놔줬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큰일이 나고 말 거다. 밖이 어두워지는 걸 확인한 지겸은 차라리 다시 링거라도 맞게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막 통화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소희가 있는 침실 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 보니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혹시 몸이 더 나빠진 건가? 가위라도 눌린 걸까? 놀란 지겸이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소희야, 괜찮…”
문을 열자마자,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짙고 강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그를 압도했다.
“소희야?”
그녀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면서 제 음부를 혼자 만지고 있었다.
“흣, 흐으, 으으….”
그녀가 자위하는 모습을 발견하자 순식간에 지겸의 몸에 열이 올랐다. 귓가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눈가가 빨갛게 충혈됐다. 알파로서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지겸이 자신을 발견한 걸 알면서도 소희는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아득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았을 뿐이다. 자신에게 보이지 않으면 상대방도 보지 못할 거라 착각하는 바보 같은 어린아이처럼. 소희가 잔뜩 발기해 도드라진 클리토리스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어찌 해야 할 줄 몰라서 그저 만져지는 부분을 닥치는 대로 비벼대고 문질렀다. 우스꽝스러운 제 행색에 눈물부터 났다.
“아앙… 응.”
그런 소희를 바라보는 지겸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 들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