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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통화를 마친 지겸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5년 전 제게 아버지가 그러셨지요. 서른 살 될 때까지만, 형 앞에 걸리적거리지 말고 죽은 듯이 살아라. 그러면 그 후엔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 그, 그건. 지겸아. 내가 그 약속 꼭 지키마. 하지만 지금 너 이러는 거….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이젠 제가 갖겠습니다. 임소희. 형의 신부, 말입니다.”
후우.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나면 습관적으로 편두통이 일었다. 물론 처음부터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거나 순순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지겸의 아버지, 베논 제약 구 회장은 기대보다 더 질 낮은 철면피였다.
지겸이 가장 걱정하는 건 제대로 감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베논 측이 가진 모든 증거를 삭제하고 소희의 부모님이 몸담고 있는 재림 생명 공익재단에 죄를 전부 뒤집어씌울 가능성이었다. 아버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게다가 자신이 혹시 소희에게 한마디라도 흘렸을까 봐 두려워하고 협박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야비했다. 반성보다 죄를 덮으려 급급한 모습이 아들인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현에게 미리 자료를 넘겨둔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언론사에 자신의 비리 자료가 넘어갔으니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지겸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터. 게다가 유현의 아버지가 누군가. 정경유착을 극도로 멸시하고 언론의 자유를 신뢰하는 언론인 출신 오너 아닌가.
- 형 괜찮아? 지금 두 집안 다 난리던데.
아버지와 전화를 끊고 지겸이 통화한 건 유현이었다. 신유현. 소희의 절친, 신유정의 친오빠. 지겸과 유현은 부모님끼리의 친분으로 어린 시절에도 알던 사이긴 했지만 정작 친해진 건 미국에서였다. 지겸이 보스턴에서 메디컬 스쿨을 다니던 시절, 같은 학교 저널리즘 스쿨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유현과 가까워졌다.
“뭐. 그럭저럭.”
- 소희는 괜찮…은 거죠? 얘기는 해 봤어요?
“아직. 이제 천천히 해야지. 아무래도… 너무 놀랐을 테니.”
- 그랬겠죠. 이제 형이 잘해야죠!
“까분다, 신유현. 그보다 전에 얘기한 건. 혹시 인터넷 뉴스나 타블로이드 신문들에….”
- 약혼 깨진 기사? 일단 형이 하라고 했던 대로 그… 김 실장님이랑 같이 주요 인터넷 언론은 이미 만나서 입막음했고요.
“혹시 빠진 언론사 있는지 추려서 나한테 메일로 보내줘. 내가 직접 연락해볼 테니까.”
형의 약혼녀를 쌍둥이 동생이 가로챘다. 이보다 더 좋은 가십거리가 있을까? 게다가 지훈과 소희는 나름 셀레브리티 커플이었다. 이 일이 여기저기 알려져 소희가 질 낮은 가십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주요 언론이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인터넷 언론은 이미 처리를 했지만, 아직 불안했다.
- 형은… 괜찮아요?
“뭐?”
녀석. 별 시답지 않은 걱정을 다.
-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계속 고민했잖아요. 그… 소희 때문에….
“그랬지. 그런데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럼 이젠 제대로 책임지고 수습해야지.
수백 번, 수천 번 생각했었다. 지겸 스스로도 거듭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혔던 질문이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그녀를 속여야 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걸 고백하고….
아니다. 그러려면 재림 생명 공익재단이, 소희의 부모님이 해 온 만행을 그녀 앞에 전부 공개해야 한다. 소희가 자신처럼 제 가족에게 실망하는 건 원치 않았다. 나쁜 짓은 그가 다 하고, 욕도 전부 다 자신이 듣고. 그래서 소희는 그 등불 밑에서처럼 언제나 그렇게 예쁘게 미소 지을 수 있었으면.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아졌을까. 지겸이 소희가 자고 있을 방 쪽을 돌아봤다. 아까 걱정되어서 슬쩍 들여다보니 기절한 듯 잠들어 있어서 들어가 후처리를 도와줬다. 많이 배고플 텐데 죽은 먹었나.
정작 본인은 한 끼도 안 먹었으면서 지겸은 소희 걱정만 했다.
“어….”
그런데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방문도 살짝 열려 있었다. 분명 그가 좀 아까 통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꽉 닫았던 것 같은데.
쿵, 쿵.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 알아. 알파는 제 오메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뭐든 다 안다고. 그건 본능이다.]
어머니 일로 아버지께 따졌던 시절, 그는 늘 그 말을 반복했었다. 어렸던 지겸은 분노했었다. 엄마가 불쌍했다. 그놈의 본능. 망할 알파와 오메가. 그게 뭐길래. 뭐가 그리 대단해서….
하지만 결국 그걸 이용해 소희를 자신이 만든 덫에 가둬버린 건 지겸이 아닌가. 역시 어쩔 수 없는 부전자전인 걸까.
터질 듯한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지겸이 천천히 소희가 있을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소희야?”
아… 없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언제 깨어난 거지? 혹시 몰라 화장실도 들어가 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찾아서 정리해 둔 가방까지 없어진 걸 보면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런 걸 거야.
그러나 안도해 보려고 해도 곧 다시 소희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해서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일 텐데. 막 돌아다니는 게 위험할 수도 있는데.
지겸이 급하게 방을 나섰다. 반대쪽 복도 끝 코너에 소희의 방이 있었다. 제발 거기에 있기를.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는 지겸과 한 공간에 있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피한 거겠지. 어차피 그녀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있다.
복도 끝 쪽에 사람의 형태가 어른거렸다. 커리어를 들고 가는 뒷모습이. 아, 소희다. 그녀가 맞다.
“소희야…!”
그의 부름에 뒤돌아본 그녀가 깜짝 놀라더니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도망가는 걸까?
“윽.”
소희가 도망간다. 그의 오메가가 떠나려 한다.
소희를 따라 뛰던 지겸이 우뚝 멈춰 섰다.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조여들었다. 잠시 멈춰 서서 천천히 숨을 고르는데, 생경한 압박감이 섞인 고통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지는 것 같았다. 각인한 알파에게 오는 증상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를, 잡아야 해.
가슴의 통증을 인내하면서 지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 층에 내렸다. 저 멀리 택시 스탠드가 있는 서쪽 게이트로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겸도 따라서 뛰었다.
밖으로 나가자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에 가려 소희가 어디 있는지 분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택시 줄에 서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지하철. 맞은편에 있는 지하철역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쪽 방향으로 몸을 트는데, 100미터 쯤 앞에 우뚝 서서 하늘로 고개를 쳐든 소희가 보였다.
비가 이렇게 거센데. 우산도 없이. 추울 텐데.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여전히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아프고 갑갑한 가슴을 무시하면서 지겸이 한 걸음씩 소희에게 다가갔다. 굵은 빗물 아래 서 있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임소희!”
풀썩. 소희가 쓰러졌다.
그 순간 지겸은 실제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
“아….”
목에 갈증을 느끼며 소희가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운 걸 보니 한밤중…? 탁자 위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20분 정도였다.
읏.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통증이 인 왼쪽 팔뚝을 바라보자 링거를 맞았던 건지 큰 밴드가 붙어 있었다. 그때였다.
“아니, 아니야. 가지, 마. 제… 제발. 으으.”
이건 무슨 소리지?
웅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희가 몸을 잠시 움츠렸다. 곧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앞을 보니 소파 위에 잠든 지겸이 보였다.
“구지겸….”
결국 잡혔구나. 하긴 그런 식으로 뛰어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더 바보다.
“으, 으흑. 안, 돼…. 안 돼….”
왜 저러지. 뭐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가위라도 눌렸나.
무시하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고 했으나 절실하고 외롭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결국 소희는 제 침대 위에 있던 담요 하나를 집어 소파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워낙 키가 큰 남자인지라 2인용 소파로는 어림도 없어서. 소파 아래쪽으로 그의 종아리 대부분이 빠져 나와 있었다.
후우, 무슨 걸리버 여행기 같네.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가, 소희가 다시 입매를 고쳤다. 미, 미쳤어. 아무리 자고 있대도 그렇지. 지금 이 남자 앞에서 웃기나 하다니…. 그녀를 안고, 탐하고, 거침없이 움직일 때는 무슨 단단한 큰 바위나 나무같이 보였었는데. 이렇게 누워서 잠꼬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몸만 커져 버린 소년 같이 보이기도 했다.
소희는 그의 얼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눈가로 살짝 내려온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넘겨봤다. 움찔. 짙고 선이 곧은 눈썹이 순간 찌푸려졌다.
“인상 좀 펴지….”
무표정일 땐 유독 차가워 보이는 인상인데 미간까지 찌푸리니 최악이다. 소희가 대담하게도 그의 미간을 검지로 지그시 눌러 위로 당겨본다.
“구지겸. 당신… 왜… 그랬어요?”
나한테. 유정이한테. 지훈 오빠에게. 우리 가족 모두에게. 대체 왜 그랬어요.
각인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몸정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걸까. 배신감과 분노는 아직 가슴속에 치밀었고, 그만큼 이 사람이 끔찍하고 싫다. 그런데… 속았다는 걸 알기 전, 다정했던 남자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밉지가 않다.
솔직히 조금 궁금하기까지 했다. 대체 왜 그랬는지.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앞으로 유정이에겐 어떻게 할 건지. 그리고 그녀와는 어떻게 할 생각인지….
절정의 순간 그녀를 껴안으며 더 깊어지던 까만 눈동자가. 분명히 사랑을 담았다고 느꼈던 그 반짝임이. 그녀의 입술과 온몸에 부딪혀 오던 뜨거운 입술이.
그 모든 것이 정말… 거짓이었을까.
임소희.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찰싹찰싹. 소희가 정신 차리기 위해 가볍게 제 양 뺨을 때렸다.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거다. 게다가 새벽이라서. 멍청해, 임소희. 벌떡. 일어서서 몸을 돌려 침대로 돌아가려는데 툭.
그녀의 손목을 뜨거운 온기가 낚아챘다.
“어어…!”
스윽, 그 온기에 끌어당겨 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가지, 마….”
“읍, 이거 좀 놓고….”
뒤에서 그녀를 꽉 껴안은 단단한 팔을 떼 보려 손으로 몇 번 내리쳤지만, 꿈쩍도 하질 않았다. 소희는 몇 번 더 시도하다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모르겠다. 저를 감싸 안은 등이, 온몸이 따뜻해서 그런가. 다시 잠이 쏟아졌다. 졸려…. 여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스르르 감겼다.
“임소…희….”
여전히 깊은 잠에 취해 있던 지겸은 잠결에도 그의 코끝을 간질이는 제 오메가의 체취에 악몽을 끝내고 깊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