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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괜찮아? 아까 전화 안 되길래. 응, 그게 나… 지금 공항이야.”
- 뭐 공항? 내일 출국이라며.
“오빠가 약속 취소됐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어. 남은 비행기 표가 지금밖에 없었다나 봐.”
- 그랬구나. 아니 우리 오빠, 워싱턴 특파원 갔었잖아. 오늘 귀국했거든. 좀 전까지 가족 식사하느라 전화 못 받았네.
“유현 오빠 들어온 거야? 그랬구나! 안부 연락 한번 드려야 했는데.”
유정이네 집은 국내 대형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다. 몇 년 전엔 종합편성채널을 개국했고, 유정과 유현 모두 기자다. 경영에 참여하기 전 실무부터 제대로 배우라는 그녀 아버지의 확고한 가치관 때문이다.
- 연락은 무슨. 어차피 다 결혼식에서 만날 텐데.
“그렇긴 하네…. 그나저나 너… 몸은 좀….”
- 난 괜찮아. 우리 어차피 결혼식 전날, 같은 방 쓰기로 했잖아. 그때 많이 얘기하자, 소희야.
유정을 생각하니 소희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날과는 다르게 부러 더 씩씩하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느껴져서 더 속이 상했다.
“그래도 유정아, 난….”
- 야, 임소희. 지금은 너만 신경 써. 다음 주면 유부녀 되는 애가. 지훈 오빠랑 연인으로서의 마지막 휴가 달달하게 잘 보내야지. 알겠지? 지금 제일 행복해야 하잖아.
“그래도 무슨 일 생기거나 얘기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연락해야 해. 알겠지?”
- 아이고 알겠다니까! 오빠 기다리시겠다. 전화 그만 끊고. 도착해서 톡이나 해.
응, 유정아. 소희가 못내 아쉬운 듯 전화를 끊었다.
“…유정 씨?”
퍼스트 클래스 전용 라운지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던 지겸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네. 그런데 오빠 유정이… 알고 있어요?”
왜 몰라. 네 제일 친한 친구잖아.
아. 그의 답에 소희가 조금 갸우뚱했다. 그동안 소희가 유정의 얘기를 그에게 여러 번 하긴 했지만, 지훈은 늘 별로 반응도 않고 듣는 척만 했으며 곧잘 그 이름도 까먹는 듯 보였다.
“참 신유현, 오늘 한국 들어왔지?”
“어, 유정이 오빠와 아는 사이예요?”
“응… 잘, 알지.”
그랬구나. 소희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직 그녀조차도 지훈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구나.
“유정 씨, 혹시 무슨 일 있어?”
“네? 아… 아니에요.”
“그래. 그럼 됐고. 소희 네가 걱정하는 것 같길래.”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겸이 그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머리칼에 와닿는 그의 온기가 다정하다.
순간 잠시 고민이 됐다. 유정이 임신한 것, 지훈 오빠에게 얘기해 볼까. 엄밀히 말하면 그의 동생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유정이 일을 자기 맘대로 떠들 수는 없었다.
둘은 소희 집에 잠시 들러 미리 챙겨 놓은 캐리어와 여권을 챙겨 바로 인천 공항으로 왔다. 소희가 집으로 전화하자 그녀의 엄마는 구 서방에게 미리 얘기 들었다며 먼저 싱가포르에 가 있으라고 했다. 지훈의 주말 약속이 취소되고 소희와 함께 출국하게 됐다고 하니 기쁘신 모양이었다.
“근데 오빠 오늘은 둘만… 가요?”
소희는 그가 가져다준 핫초콜릿을 조금 홀짝이다 물었다. 유난히 초콜릿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비서진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동안 휴가를 떠날 때면 베논 제약 쪽 비서와 그녀 아버지의 비서 두 명이 꼭 붙어 따라다니곤 했었으니까.
“이제 곧, 부부잖아.”
더 감시받을 필요 있나.
어깨를 으쓱하는 지겸을 물끄러미 보다 소희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상해. 얼마 전 그 날 일 때문일까. 그의 눈을 마주하면 괜히 심장이 뛰었다.
“참, 이거.”
그가 소희에게 핑크색 약이 든 약통을 하나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이걸로, 먹어.”
“아… 네 오빠.”
소희의 억제제는 늘 지훈이 건네주곤 했다. 베논 제약에서 특별히 만든 오메가용 억제제. 평소와는 다른 색의 약이긴 했지만, 가끔 그런 경우도 있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느꼈다.
“지금. 먹을 시간 아닌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희가 약병을 열었다. 그렇지, 보통 자기 전에 먹으니까. 그녀는 두 알을 꺼내 입에 넣고,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소희가 입에 약을 넣고 삼키는 모습을, 지겸이 유심히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던 걸 그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알베르 비쇼 샤블리 크뤼 2016년산. 술을 잘 못 하는 소희지만 화이트 와인은 곧잘 즐기는 걸 지겸은 알고 있었다. 드라이한 와인치고는 풍부하고 강한 꽃 향과 과일 향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어딘가 알싸하게 입 안을 감돈다. 마치, 그녀의 체향 같다.
옆자리에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누워 잠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가볍게 한잔해서인가. 깊이 잠들었는지 평온해 보인다. 지겸은 팔을 뻗어 얼굴로 흘러내려 온 머리칼을 슬쩍 귀 뒤로 넘겨줬다.
“으응….”
추운가. 몸을 살짝 웅크리는 것처럼 보여서, 지겸은 제 담요를 그녀 위에 덮었다.
잘 자둬 소희야. 내일은… 아마 자고 싶어도 못 잘 테니까.
지겸이 소희의 볼을 손등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들릴 듯 말 듯하게 속삭였다. 라운지에서 그가 건넨 약은 억제제가 아니라 호르몬제. 오메가가 먹으면 24시간 내 무조건 히트 사이클을 겪도록 만들어졌다. 심지어 소희는 우성 오메가인 만큼 더 빠르고 강하게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잘 때조차도 페로몬을 풍기는 걸까.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꽃이 가득 피어난 따스한 봄 잔디에 누워 있는 기분이랄까. 그녀에게 닿은 제 손끝조차 간지럽다.
“소희야…미안해.”
지겸이 그녀 이마에 가볍고 보드랍게 입을 맞춘다.
드디어 소희와 함께 있다. 하지만 마냥 설렐 수만은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지겸은 그녀를 속였다. 지훈인 줄 알고 키스하게 하고, 집에 들이게 했고, 이렇게 비행기까지 따라 타게 했다. 지훈 대신 지겸이 갔던 그녀와의 휴가도. 소희에겐 모두 지겸이 아닌 지훈과의 추억으로 기억되어 있겠지.
아버지와 구지훈….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그녀만은 속이고 싶지 않은데.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고 제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은데.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이 계획을 준비하는 내내 그를 괴롭혔다.
내겐, 이 방법이 최선이었어, 곧 다 설명해 줄게. 그리고 앞으로 내가 네 곁에서 평생 갚으며 살게. 그러니까 소희야. 20년을 기다려왔으니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봐줘.
***
6시간 30분을 날아와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다. Red-eye flight(새벽 비행)라 피곤한 둘은 먼저 일주일 동안 묶기로 되어 있는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체크인, 각자의 스위트 객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리나 베이 샌즈에 있는 큰 몰에서 간단히 스시를 점심으로 먹고 수영을 했다. 싱가포르의 12월은 한국 초여름의 날씨와 비슷해서, 적당히 습하고 참을 수 있을 만큼 더웠다.
저녁은 지겸이 예약해 둔 프렌치 레스토랑에 갔다. 고급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뎀시힐에 있는 ‘The White Rabbit’이라는 음식점이었다.
“어머! 이 빵!”
트러플 버섯을 넣어 구운 빵에 트러플 솔트를 뿌린 소고기 세비체를 곁들여 먹는 애피타이저. 맛있는지 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야, 토끼 한 마리가 자기와 꼭 어울리는 이름의 음식점에 와 있네. 지겸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맛있어?”
끄덕끄덕. 양쪽 볼이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음식을 물고 오물오물 먹는 소희를 보며 지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소희가 프렌치 요리를 좋아했지. 그렇다고 너무 팬시한 것 말고, 가정식같이 정겨운데 맛있는 것. 이곳은 그런 소희를 위해 지겸이 예전에 싱가포르 학회를 왔다가 눈여겨 둔 곳이다. 성당을 개조한 레스토랑은 실내가 온통 하얀 인테리어로 도배되었고, 아기자기한 식기에 음식이 담겨 나왔다.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옆에 다른 음식점도 있어 보이던데요?”
“아, 이 레스토랑에서 같이 운영하는 바. 이름이… The Rabbit Hole이던가?”
“역시! 앨리스구나!”
“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요. 그 바쁘다며 시계 보며 뛰어가는 흰 토끼를 따라갔다가 모험을 하게 되는 소녀 이야기.”
아, 그 애들 보는 동화.
“앨리스를 쓴 작가. 루이스 캐럴, 아니 본명은 찰스인데, 하여튼 그 사람 수학자였어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수도 했고.”
“오…그래? 그건 몰랐네.”
“그래서 앨리스 인 원더랜드를 꼼꼼히 읽어보면 수수께끼나 수학적 비유 같은 게 엄청 많아요.”
지겸은 대화 내용보다는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소희의 모습 자체가 예쁘고 좋았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책 이야기를 할 때 유독 신나 보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뭐였더라.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그게 그 사람이 한 얘기지?”
“응응! 오빠도 아는구나. 그리고 사실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근대 아동문학의 시초로 불려요.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이야기로 여겨졌던 동화를 문학의 반열까지 끌어올린 사람이기도 하고.”
열변을 토하던 소희는 문득, 한쪽 턱을 괴고 맞은편의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남자를 느끼고 말을 멈췄다.
“왜…?”
“아니 너무….”
오빠가 그렇게 뚫어져라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뭐라고 해야 할까. 그의 눈동자가 그녀 몸속까지 속속들이 파고드는 느낌이 든달까. 게다가 보통 때 지훈과의 식사 자리에서 소희는 늘 듣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소희가 더 많이 말하고 있었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반응하는 그가 낯설지만 참 좋았다.
그와의 대화가 편안해서인지, 아니면 음식이 입에 맞아서인지, 소희는 어느 때보다 오늘의 저녁 시간이 즐거웠다. 입맛도 돌았다. 아버지 앞에서나 평소 지훈 앞에서 깨작이던 그녀답지 않게 양이 제법 되는 코스요리마다 싹싹 접시를 비워냈다. 지겸은 생각보다도 더 잘 먹는 소희를 뿌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잘 먹으니 기특하네.”
대뜸 그가 손을 뻗어 소희의 볼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흣…. 그의 체온이 그녀의 몸에 닿으며 기분 좋은 향도 함께 풍겨왔다. 순간, 소희는 아래에서 뭔가 습한 기운을 느꼈다. 배꼽 주변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살짝 뜨거운 것도 같았다.
빠르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볼을 발견한 지겸이 뭔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마쳤다.
“어젯밤 비행기에서 자서 피곤할 거야. 오늘은 우리 둘 다 일찍 호텔 들어가 쉬자. 관광은 내일 하고.”
“음… 좋아요.”
실은 일찍 자는 것도, 내일의 관광도 불가능하겠지만.
지겸은 그런 생각과 함께 레스토랑을 나서며 소희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데 그녀 귓가와 목덜미 근처에서 야릇하고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소희의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