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10화 (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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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럼 그때 그 소년이 교수님의 약혼자예요?”

“대박 사건. 진짜로요? 완전 운명이네!!”

소희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학생들이 흥분하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무슨 동화 속 왕자님 같다는 둥. 뭐가 이렇게 완벽하냐는 둥 난리였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지훈은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양 허벅지와 팔뚝 여기저기 15곳 정도 물렸다고. 그나마 목을 물리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소희의 허벅지에도 그날의 상처가 작게나마 남아 있으니, 그의 몸에는 더 큰 흔적들이 남아 있겠지. 만약 그날 그 정원에 지훈이 없었으면 소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확정된 집안끼리의 약혼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두 집안의 관계는 더 공고해졌다. 무엇보다, 소희의 부모는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도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지훈 부의 부탁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게 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후각이 예민한 개들이 가끔 우성 알파나 오메가의 독특한 페로몬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아이들이라 해도 그 미묘한 차이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챈다고. 소희의 부모가 동물을 키우는 걸 반대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던 거다.

“자… 이제 듣고 싶은 얘기는 다 들은 거지?”

“네! 참 교수님!”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쇼핑백 하나를 들고 와 내밀었다.

“이거 저희 수업 듣는 학생들끼리 함께 모아서 산 선물이에요. 비싼 건 아니지만…. 결혼 정말로 축하드려요!”

“너희가? 세상에….”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실크 스카프였다.

학생들이 그녀에게 보여준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감동이라 소희는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고맙구나, 정말. 너무 예뻐. 보답으로 전원… A! 를 주고 싶지만.”

“에에~!!!”

“아 교수니임~”

“개강하고 내가 한번 이 강의들은 학생 전부 다 초대해서 맛있는 거 쏠게. 알겠지?”

와아. 밖에서 말고 집에서요! 구지훈 전무님, 아니지 교수님 남편분도 꼭 보여주셔야 해요! 꺄르르 신난 학생들을 소희는 뿌듯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들도 방학이겠지만, 소희도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이었다. 내년 봄, 다시 강의를 시작했을 때는 유부녀가 되어 있겠지. 미묘한 긴장감을 지우려고 소희는 아이들을 보며 부러 더 크게 미소 지었다.

***

이천에 위치한 한 납골당. 지겸이 운전해 온 세단에서 혼자 내렸다. 손에는 붉은 장미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보통은 흰 꽃을 가져가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 꽃을 가장 좋아하셨으니. 지겸이 작은 연못을 지나쳐 예배당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뱉는 숨이 찬 공기에 닿아 뿌옇게 날아올랐다. 하아…. 지겸이 일부러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지겸의 어머니는 유독 겨울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정원에 눈이 내리면 엄마와 이렇게 둘이 벤치에 앉아 입으로 김을 뱉어내며 장난도 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반면 지훈은 추운 건 질색이라며 절대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지겸아 만져봐. 어때?

엄마는 눈이 떨어져 녹아내리고 있는 흙바닥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지겸도 얼른 그녀를 따라 했다.

- 앗, 차가워.

- 그래. 딱딱하고, 차갑고. 초록색이 다 죽어버린 풀이나, 까만 흙과 자갈들을 봐봐.

지겸이 얼어버린 겨울 땅에서 손을 재빨리 떼 냈다. 손이 얼 것만 같았다. 차가워진 손을 가져간 엄마가 아들의 손에 호, 호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온기 속에서 지겸의 손은 금세 따뜻하게 녹았다.

- 그런데 지겸아, 조금만 기다려 봐. 봄이 오면, 이렇게 굳었던 땅이 다시 살아난다?

- 응?

- 엄마는 그게 늘 신기해. 죽은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아니야.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봄이 돌아오거든. 차게 식은 땅 위에서 다시 풀이 자라고, 예쁘게 꽃을 피워내. 그러니까 지겸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없어.

그때 이미 그녀는 마음을 먹었던 걸까. 아들도, 자신을 옭아매는 남편도, 그리고 그녀에게 한겨울 같았던 세상도 등지기로. 그리고 얼마 후, 그다음 봄이 오는 걸 보지 못하고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예배당 아래 납골당에 들어선 그가 익숙하게 어머니의 자리를 찾았다. 지겸과 지훈을 양팔에 끌어안고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 앞에는 지난번에 지겸이 방문했을 때 두고 간 장미 꽃다발이 바싹 마른 채 남아 있었다. 지훈도, 아버지도 절대 이곳에 들르지 않는다는 것을 지겸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 올해는 기일에 맞춰 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왔어요.”

화려하고 향기로운, 꼭 이 붉은 장미꽃 같은 사람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모두의 찬양과 애정이 쉽게도 아름다운 그녀를 향했다. 그런 점을, 아버지는 극히 싫어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다른 이의 손을 타서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게 독점하고 싶어 했다. 산소가 부족한 유리관 안에 든 장미꽃은, 오히려 더 빨리 시들고 말 텐데도.

몇 년만 지나면 자신도 사진 속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지겸은 제 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겨울날 꽝꽝 얼어붙은 땅처럼.

“싱가포르에 가려고요, 소희와.”

그가 준비해 온 계획을, 이제부터 지겸이 소희에게 하려는 짓을 알면 어머니는 뭐라고 말할까. 거짓말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거라고. 신뢰를 저버리는 순간 친구든 가족이든 그 관계도 끝난다고 가르쳤던 사람이니 아마도 지겸을 말리거나 혼을 냈겠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 설득했을 수도 있겠다. 솔직히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다음엔 같이… 올게요.”

소희가 허락해 준다면요. 그렇게 만들어야만 하겠지만.

아주 오래전, 지겸의 엄마가 소희에 대해 말했던 걸 떠올렸다.

- 웃는 거 봐. 꼭 봄꽃 같은 아이구나.

어머니는 봄이 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가버렸지만, 지겸은 그녀처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정말 봄이 오기 전까지는 아직 봄이 온 게 아니다.

이 겨울이 지나 봄이 와도, 어차피 소희 없이는 그의 삶에 꽃이 피는 일 따윈 없을 거다.

그래서 지겸은 지금 간다. 그의 봄, 임소희를 찾으러.

***

수업이 끝난 소희는 연구실로 돌아와 조교 예은과 함께 남은 시험지를 채점하고,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평가했다.

“아직 미제출한 리포트는 메일로 보내줘. 싱가포르에서 확인할 테니.”

“네, 교수님. 내일 출국하시는 거죠?”

“응. 시간 정말 빠르네.”

어느덧 다음 주말이 결혼식. 내일 낮, 소희는 엄마와 먼저 싱가포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교수님 이제 어서 퇴근하세요! 벌써 7시가 넘었어요.”

“저녁은? 같이 먹자. 예은이가 좋아하는 스시 사줄게.”

조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교수니임….”

“응?”

“전 한국 돌아와서 사 주세요. 교수님은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거든요.”

“나? 나 괜찮은데? 출국도 내일이고….”

그런데 조교 예은이 자꾸 소희의 등 너머, 연구실 문 쪽을 초조하게 쳐다봤다. 왜 저러지? 누가 왔나…?

“그래, 소희야 퇴근부터 하자. 나 배고픈데.”

어라, 이 목소리는.

“…오빠?”

지훈이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연구실까지 온 것은, 아니 학교에 찾아온 것 자체가 처음이라 소희는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보통 금요일 저녁은 가장 바쁠 때라고, 연락도 잘 없지 않았었던가.

‘교수님 약혼자분… 진짜 너.무. 잘 생.기.셨.어.요. 사진보다 더 멋져요.’

예은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게 소희에게만 살짝 입 모양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좀 그렇긴 한가. 소희는 어쩐지 지난 주말 그녀의 집에서 그와 있었던 일이 떠올라 볼이 달아올랐다가, 연달아 그다음 날 부모님 집에서의 일도 기억나 어색해졌다. 괜히 혼란스러운 기분에 소희가 머뭇거렸다.

“그, 그래. 그럼 먼저 가볼게, 예은아. 모더니즘 작가 개론 리포트 다 제출되면 톡 한 번 줘. 알겠지?”

“네 교수님!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 소희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다가서자, 문가에 서 있던 지훈도 그런 예은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여 화답했다. 그 동작이 새삼 젠틀하고 다정해서 소희는 뭔가 아주 미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지훈 오빠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소희가 그를 낯설게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실은 지훈이 아니라 지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소희는 알 리가 없었지만.

“일은 잘 마무리했어?”

교수 전용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길, 바람이 꽤 세게 불었다. 지겸이 자연스럽게 소희의 손을 쥐더니 제 코트 주머니에 쏙 넣었다. 그의 체온이 높은 탓인지 주머니 속도 퍽 따뜻했다. 싫지 않았다.

“네…. 근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일도 골프 약속 있다고.”

“아… 그거. 취소했어.”

“네?”

소희가 기억하는 한, 지훈은 한 번도 잡혀 있던 스케줄을 소희와의 일 때문에 취소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무슨 보건복지부였나, 장관님과의 약속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소희의 아버지도 꽤 관심을 기울였었고.

“생각해 보니, 둘이 가고 싶어서.”

“어디를요?”

“싱가포르. 원래대로 같이 가자, 지금.”

지겸이 제 주머니 속에서 소희의 손을 좀 더 꽉, 잡았다.

결혼식까지는 이제, 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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