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9화 (9/104)

-9-

이번 학기 마지막 ‘20세기 모더니즘 오메가 작가 개론’ 수업. 강의 중인 소희는 평소와 다르게 사뭇 카리스마가 넘쳤다.

재림대는 오메가와 알파에 따라 학부를 나누고 수업도 완전히 따로 진행했다. 학교생활 중 서로 겹치는 빈도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학교 내 일어날 수 있는 성적인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모든 재학생과 교수진의 억제제 복용을 규칙적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지적 능력이 탁월한 대부분의 우성 알파와 문학적, 예술적 능력이 월등한 오메가는 중고등 통합과정을 수료하고 17~18세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다. 학부 졸업은 보통 20세면 끝마쳤고 소희도 작년에 석박사 통합과정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고 조교수로 임용된 경우였다.

“자, 이렇게 이번 수업의 마지막 책. 버지니아 클로넬의 ‘A Room of One’s Own’을 끝마쳤네. 어땠어요?”

학생들이 눈을 반짝인다. 어렵지만 흥미로웠다는 둥. 원래 가장 좋아하는 여성 소설가인데 에세이는 처음이라 좋았다는 둥. 오메가들의 인권이 덜 신장했을 때 그 권리와 사회에 뿌리 깊은 차별을 담담하게 지적해서 감동했다는 둥. 학생들의 열띤 의견이 오고 갔다.

“초반에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져요. 만약 유명한 극작가이자 알파 남성인 셰익스피어에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오메가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동생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강의실 모두가 고개를 옆으로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요. 작가는 그녀가 오빠와 같은 대작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광기에 사로잡혀 파멸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지요. 애당초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기 힘들 테니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끊임없이 약자였던 오메가, 그것도 오메가 여성 가운데서 그러한 천재는 태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사회에 강요받고 법과 관습의 강제력에 억눌려야 했을 테니까요.

“현대사회 들어 억제제가 보편화하고, 페로몬과 히트/러트 사이클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오메가의 인권은 유린당하고 무시 받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알파들의 욕정의 대상. 그들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람들. 아무리 오메가들의 예술적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그 능력조차 제대로 빛을 발하기 힘든 구조였어요.”

학생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대부분 좋은 집안에서 자란 우성 오메가라 실질적으로 차별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오메가가 억눌려 살아왔는지 공부하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역사 속에서는 평범한 베타보다도 더 억압받아 온 게 오메가였다.

“그러나 버지니아 클로넬의 담론이 흥미로워지는 건 그 이후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 클로넬은 철저한 페미니스트였고, 오메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였지요.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아요. 여성이냐 남성이냐, 알파냐 오메가냐를 따지지 않고 그 구분을 넘어 작가로서 바람직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지점이 소희가 이 책을 좋아하고, 작가로서 버지니아 클로넬을 존경하는 이유였다.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베타. 로열 오메가로 태어나 수많은 수혜를 입고 자라온 자신이지만 늘 마음속 어딘가 무겁고 죄스러웠다. 아직도 너무나 당연하게 차별하고 차별받는, 마치 계급사회처럼 세 계급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책에 대한 질문과 자유로운 토론이 오갔다.

“마지막 레포트는 수업 끝나고 앞에 제출하고 가고. 혹시 끝나기 전에 궁금한 거 있는 사람 있어요?”

“교수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응? …첫사랑?”

“아니 이런 심각한 주제를 토론하고 나서 갑자기 첫사랑 얘기를 해 달라고?”

여기저기서 까르르 하고, 풋풋한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구지훈 전무님이 첫사랑이죠?”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어요?”

“언제 처음 만나셨어요?”

난처해하는 소희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학생이 일제히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고등학생 교생 실습도 아니고….

에구. 그 어떤 수업을 들을 때보다 반짝이는 눈들을 마주하며 소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못 말리기는. 모두, 소희와 지훈의 스토리가 듣고 싶은 게 분명했다.

후유. 당황하던 소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안끼리의 오래된 약혼이기도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오랜 시간, 진심을 다해 구지훈의 약혼자로서 살아온 진짜 이유.

그건 그가 제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

일곱 살 때였다.

연노란 아카시아 꽃이 줄기마다 포도처럼 매달려 바람에 따라 일렁이던 봄. 코끝으로 알싸하고 은은한 아카시아 향을 가득 들이마시며 소희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까운 로열 알파/오메가 집안들끼리의 저녁 식사였던 것 같다.

어떤 국회의원 아저씨의 집이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오빠도 온다고 했다. 나중에 커서… 딴따다단, 하고 소희와 결혼할 사람. 그래서인지 엄마는 소희에게 하얗고 예쁜 새 원피스를 입혔다. 반짝이는 보석 리본이 달린 구두도 선물 받은 새것이라 하얗고 반질반질했다.

정원은 소희가 다니던 유치원 앞 놀이터보다도 훨씬 컸고 천사 동상이 서 있는 작은 분수까지 있었다. 어디선가 뾰로롱, 하고 새 소리도 들렸다. 이제 막 해가 지고 있었다. 파랗던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더니 온 세상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 순간 소희 머리 위 큰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작은 등에서 탁, 하고 불이 들어왔다.

“우와…!”

타다다닥, 하고 순식간에 정원 전체 나무 등에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 꼭 얼마 전 봤던 애니메이션 피터팬에 나왔던, 요정 팅커벨이 마법 봉을 휘두르며 마법 가루를 뿌린 것 같았다.

“임…소희?”

뒤를 돌아봤더니, 자기보다 키가 한참은 큰 오빠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얇은 금테 안경을 쓴, 새까만 눈이 예쁜 오빠였다.

“맞구나, 너.”

씨익, 웃더니 소년이 소희 옆에 와 섰다. 아, 풀냄새. 나무와 풀이 가득한 정원에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이 오빠에게서 나는 냄새일까. 소희의 심장이 이상하게도 자그맣게 콩콩 뛰었다.

“음…오빠 방금 그거 봤어요?”

“응? 어떤 거?”

“하늘이 어두워지니까 갑자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불이 타다다다닥! 하면서 켜졌어요! 마법 같죠!”

“아….”

난 또 뭐라고. 애는 애구나. 소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건 마법이 아니라 썬 스위치라고, 저 등 속의 센서가 주변의 빛을 감지해서….”

그러나 소녀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설명을 하든 말든 이미 저 앞으로 걸어가 발꿈치를 살며시 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가로등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의 비밀을 스스로 밝혀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 불빛이 비쳐 반짝였다.

두근.

“오빠도 와서 봐봐요! 너무 예쁘죠!”

“그래… 정말, 예쁘네.”

아마도, 네가.

“멍멍!”

그때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렁찬 소리를 보니 제법 큰 개인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어올 때 입구 쪽에 개집을 봤던 것 같다. 소년은 지난번 왔을 때도 이 집에서 큰 개를 몇 번 봤던 기억이 났다. 이름이… ‘체셔’였던가?

“와와와! 강아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뚫어지라 등불을 보고 있던 소녀는 어느새 소리를 따라 신나서 뛰어갔다.

“신기한 것도 참 많네.”

소년은 피식,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느라 바람에 펄럭이는 소녀의 흰 원피스 자락을 천천히 쫓아갔다.

소희는 동물을 정말 좋아했다. 특히 강아지가 제일 좋았다. 너무 키우고 싶어서 아무리 아빠와 엄마를 졸라도 절대 안 된다는 속상한 대답만 돌아왔었다. 우성 오메가는 강아지 같은 동물은 조심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녀는 아직 우성인지, 아니 오메가인지도 발현된 게 없는데도.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가니, 정원 한구석에 거의 소희만 한 커다란 흰 개가 묶여 있었다. 답답했던지 아이들이 다가오는 걸 본 개가 왕, 왕 세게 짖어댔다.

“묶여 있어서 힘들었겠다! 나랑 같이 놀까?”

소희가 점점 더 가깝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름이 뭐야?”

작은 손이 거의 개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순간.

“컹컹!”

“꺄아악!”

개가 순식간에 소희에게 달려들었다. 소녀의 한쪽 허벅지를 덥석 물고 뜯어버릴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아악! 아, 아파아! 아파! 악!”

“임소희!!!”

놀라서 뛰어온 소년이 주저하지도 않고 그대로 개 뒤에서 올라타듯 껴안고는 소희를 문 주둥이를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10살 치고 체격도 힘도 좋은 소년이었지만, 흥분한 짐승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몇 번 힘주어 당겨도 소용이 없자, 소년은 개를 발로 마구 차기 시작했다. 그러다 옆으로 손을 더듬어 잡히는 스테인리스 개 밥통도 들고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놓아줘! 놓으라고! 놔!”

푸르릉.

소녀의 허벅지를 물고 있던 여린 살을 입에서 놓았다. 개가 센 콧김을 내뱉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자신을 때린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이 잔디 위에 쓰러지고 개가 그 위로 올라탔다. 그가 쓰고 있던 금테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흑… 안…경. 오빠….”

소년의 신음과 왕왕, 개가 무섭게 짖는 소리, 여전히 코끝을 감돌던 아카시아 냄새. 다리에서 느껴지던 참을 수 없이 괴로운 통증.

소희가 기억하는 장면은 여기까지였다. 기절한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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