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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야?”
엄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 죄송해요….”
소희가 괜히 고개를 푹 숙였다. 지훈은 그런 그녀를 별로 개의치 않아 하며 답을 했다.
“지겸이요? 네, 한국 들어온 지 이제 1년 좀 안 되었죠.”
“구 서방이랑 참 많이 닮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네 뭐. 어릴 때부터 봐온 비서들도 여태껏 헷갈릴 정도니까요.”
“아, 그럼 두 사람이 일란성 쌍둥이인가?”
“아닙니다. 이란성인데도, 신기할 만큼 비슷하죠.”
“어머나 그럼, 우리 구 서방처럼 일등 신랑감이겠네. 어느 집안이랑 약혼했던가?”
피식. 소희 엄마의 질문에 구지훈의 입가에 묘한 비소가 걸렸다.
“글쎄요. 지겸이는 아직 혼자인 게 편하다고 하더군요.”
“어머… 그럼 그… 소문이.”
소희 엄마의 얼굴이 사뭇 어두워졌다. 그녀가 종종 나가는 부인들 사교 모임에서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워커홀릭에 깔끔한 지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그 동생은 사생활이 문란하다고 들었다.
“당신, 오늘 말이 좀 많네. 그만하고 국 좀 더 내오지.”
“아, 내 정신 봐. 구 서방 성게 미역국 좋아하는구나. 더 가져다줄게요.”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두 분이나 있어도 음식만큼은 꼭 안주인이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원칙에 따라 오늘의 식사도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가 준비했다. 소희도 그런 엄마의 곁에서 종일 도왔다.
식사가 끝나고 간단히 과일과 디저트를 먹은 후, 지훈은 아버지와 이야기할 게 있다며 서재로 들어갔다. 소희도 독립하기 전까지 본인이 쓰던 방으로 들어가 조금 쉬었다. 그러다 유정을 떠올렸다.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전화해 볼까, 고민하던 찰나.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 해?”
“…지훈 오빠? 아버지와 이야기는 잘 마친 거예요?”
“그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소희가 일어나려 하자, 지훈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몇 번 저었다. 그리곤 맞은편에 자리한 암체어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네가 그렇게 말랐나?”
“네?”
“아니 아까 아버님이 그러시길래. 난 별로 못 느꼈는데. 너무 둔한 체형은 내 취향도 아니고.”
“아….”
좁은 방 안에 또 둘이. 소희는 어느 때보다 더 긴장했다. 어젯밤 그와 나눴던 농밀한 키스와 또…. 그의 입맞춤이 여기저기 내려앉을 때마다 아찔했던 감각이 고스란히 피부 위에 남아 있는 듯했다. 소희는 괜스레 블라우스 앞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그의 손끝에 옷이 쉽게도 풀어지며 피부를 사그락대던 촉감이 떠올랐다.
고개를 드니 지훈이 소희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미묘하게 기분이 불쾌해지는 눈빛이었다. 마치 품평회에서 전시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시선같이 건조하고 무심해서였을 것이다.
“가까이 와봐.”
지훈은 한쪽 손잡이에 기대 턱을 괸 채 다른 손가락을 까닥였다. 마치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부르는 사람처럼. 기분이 이상했지만, 소희는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키스하자는 걸까. 어젯밤처럼. 생각하니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다리까지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여기, 올라와.”
“…?”
지훈이 제 허벅지 위를 툭툭 쳤다. 소희가 조금 머뭇대고 있으려니 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소희의 몸이 기울어지며 그의 다리 위에 앉혀졌다. 무릎 살짝 위로 오는 플레어스커트가 조금 들쳐져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약혼자가 되어서 그런 것도 모르네.”
지훈이 소희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슬쩍 더듬으며 물었다.
“키스, 해 봤어?”
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지. 어제 자신과 그렇게 오래 키스해 놓고서는.
“다른 남자랑.”
아. 그런 질문이었구나…. 당황한 소희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길이 조금 불편했다.
“아, 아니요.”
“그래? 흐음. 나는 경험 없어서 너무 굳어 있는 건 질색인데.”
로열 알파에 신체적, 경제적 조건이 뛰어난 지훈에겐 평생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눈앞의 소희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껏 오는 여자도, 가는 여자도 잡은 적 없고 같은 여자와 한 달 이상 관계를 유지한 적도 없었다. 아, 신유정. 걔만 빼고.
사실 한 대 때리면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다 울어버릴 것 같은 소희는 딱히 지훈의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열 오메가인 만큼 침대에서는 꽤 쓸 만할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먹어 본 우성 오메가들도 베타나 열성 오메가보단 훨씬 박을 만했으니까. 어차피 평생 닳을 때까지 독점할 수 있는 그의 여자였다. 아버지, 구 회장이 거듭 주의를 주지 않아도 그는 이미 제 손에 쥐어진 먹이를 기미할 정도로 여자에 굶주린 적이 없었다.
다만 식사 중 재단장 앞에서 잔뜩 움츠러든 소희를 보니, 지훈 내면의 뒤틀린 가학심이 고개를 들며 꽤 구미가 당겼다. 얇은 아이보리 블라우스 밑에 언뜻 비치는 짙은 색 속옷도 괜히 평소보다 그를 흥분하게 했고.
지훈이 손가락을 들어 소희의 입술을 매만졌다. 파란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하얀 몸에 비해 유난히 붉고 도톰하다. 이 입에 제 좆이라도 물리면 만족스러울까. 지훈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이제 2주 뒤면 그의 여자가 될 터였다. 오랜 시간 매너 좋은 척 연기하느라 보통 답답한 게 아니었는데, 사실상 이 방 안에서 자기가 좀 심하게 군다고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들인 게 아까우니까, 조금만 더 참아야지. 그런 결론에 도달한 지훈이 조금 거칠게 소희의 입술 새를 만졌다. 참는 건 참는 거고. 그 탓에 기분이 좆같은 건 어쩔 수 없으니.
그의 느닷없는 접촉에 소희의 몸이 조금 빳빳하게 굳었다. 분명 어젯밤 키스하기 전의 그도 이렇게 그녀를 쓰다듬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지훈이 어제와는 다른, 평소의 그 불편했던 체향과 페로몬을 풍겨서일까. 어제는 그의 손끝이 입술에 닿는 것만으로도 배꼽 주변이 살살 간지럽더니,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의 허벅지 아래 닿은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너무 긴장되고, 싫었다.
“빨아봐.”
“…네?”
“혀 얼마나 잘 쓰는지 좀 보게.”
“그게 무슨….”
소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이 제 검지를 소희의 입술 틈새에 푹 밀어 넣었다. 무신경하고 배려 없이 들이닥친 손가락, 그 날카로운 손톱 끝에 소희의 여린 잇몸이 홱 긁혔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혀로 감아서 핥고 소리 내서 빨아봐. 키스는 안 해 봤어도 사탕은 먹어봤을 거 아니야.”
소희의 작은 입 안을 손가락으로 마구 휘저으면서 지훈이 덧붙였다. 어제도 이렇게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오래 입을 맞췄다. 가슴까지 저며들 것처럼 자극적이고 아찔해서 몸이 바들바들 떨렸었는데. 하지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지금처럼 그녀의 입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움직이며 관찰하는 지훈의 행위는 당황스러울 뿐 떨리지도 좋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끄럽고 어딘가 모욕적이게까지 느껴졌다.
“아니 아니, 혀로 돌리면서 핥으라고.”
꾹, 꾹. 어쩔 줄 몰라 어색하게 움직이는 소희의 혀를 그가 손끝으로 꾸짖듯 눌러댔다.
“우으. 흡.”
아팠다. 아까 생긴 상처에서 흐른 피가 자꾸 목 뒤로 넘어갔다. 그때 지훈의 손이 우악스럽게 소희의 한쪽 가슴을 손에 쥐었다.
“흣.”
“하. 뭐야, 생각보다 크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솟아오른 젖가슴을 주무르는 악력이 너무 세서 소희는 몸을 뒤틀었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통증이 느껴져서였다. 그 와중에도 지훈은 손가락을 그녀 입 안에 틀어박았다 뺐다가를 반복했다.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타고 뚝뚝 흘렀다.
어제는 그가 어떻게 했더라. 자세한 건 기억나지도 않아. 다만 그녀와 눈을 맞추고,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여기저기 입 맞췄던 것은 떠올랐다. 그의 손이든 입술이든 자신에게 닿기만 해도 나비가 피부 위에서 팔랑이는 것처럼 간지럽고 설렜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젖었던 음부와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축축한 속옷을 확인하고 난감했던 것도 떠오르는데.
“야, 가슴 조금만 더 내밀어 봐.”
“으읏.”
놀라 눈을 뜬 소희의 시야에 묘하게 휘어 올라간 그의 입매가 드러났다. 소름이 돋았다.
싫어. 그만하고 싶어.
소희가 입을 벌리고 몸을 살짝 뒤로 빼며 지훈의 손가락을 뱉어냈다.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지훈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놓고 지그시 잡아 살짝 밀쳐냈다. 멈춰 달라는 뜻이었다.
“그만, 그만해요.”
“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가 재밌는지 이죽대던 지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의 짙은 눈썹 한쪽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를 오래 알았지만,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소희는 하려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2주일 남았잖아요. 기다, 리고 싶어요.”
얕게 떨며 내뱉은 그녀의 말에 지훈이 핏, 조소와 함께 그제야 조금 표정을 풀었다.
“아. 그렇지. 그래, 서두를 필요 없지. 어차피 차차 가르치면 될 테니. 대신.”
지훈이 소희의 가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세게 쥐었다 손을 떼며 말했다.
“한 번은 봐주지만, 앞으로 내 허락 없이 그만하고 싶다느니 하지 말라느니. 그런 말은 안 돼. 네 아버님 말씀, 잘 들어야지?”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소희는 대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참았다. 게다가 그의 다리 위에 앉아 있으려니 더욱 강하게 풍겨오는 특유의 알파 페로몬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제부터 내내 유정을 너무 신경 쓰느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제와 오늘, 완전히 다른 약혼자의 온도 차에 혼란스러워서일까. 소희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 앞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을 때마다 늘 그녀가 하던 방식으로.
소희가 조금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지훈이 소희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곤 내려놓았다. 마지막까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미안, 내가 좀 과했지. 결혼식 때문에 내내 일을 몰아서 하느라. 이해해.”
“괘… 괜찮아요.”
숨쉬기가 조금 힘겨웠지만, 소희는 이 상황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와 결혼하고, 부부 사이가 되어 좀 더 친밀한 시간을 갖게 되면 이 불안감도 분명 사라지리라 믿기로 했다. 어젯밤 다정하고 달콤했던 그를, 다시 상기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