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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는 한참을 유정이 곁에 앉아 있다가 완전히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서야 나왔다. 이촌동, 자신의 집 앞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제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어떤 큰 형체가 소희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지훈… 오빠?”
가까이 다가가니 지훈이었다.
“오빠가 이 늦은 시간에 여길 어떻게…?”
처음이었다. 그가 약속도 없이,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은.
“보고 싶어서.”
오늘은 정말, 참기… 어렵더라.
“네?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추운데 감기 걸리면 어쩌려…. 오…빠?”
그가 손을 뻗어 소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따뜻해. 막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 선 것처럼, 온몸이 풀어지고 편안하게 녹아내렸다. 처음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했지만, 소희는 곧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조금 더 얼굴을 파묻었다. 함께 저녁 먹고 헤어진 지 불과 몇 시간이나 지났던가. 이상하게도 그녀는 지금의 그가 훨씬 더 가깝고 안온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유정이 때문에 머리와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괴로워서. 그녀도 모르게 그에게 투정을 부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짧았던 키스 이후로 손을 잡는 정도 말고는 스킨십도 없었다. 이렇게 그가 끌어안는 것도, 그런 그의 품에 얼굴을 부비는 것도 소희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깐. 너, 왜 이렇게 몸이 차?”
“네? 그런…가?”
“너 설마, 히터도 안 켜고 운전했어?”
“아, 맞다….”
“어떻게 밖에서 기다린 나보다 몸이 더 찰 수가 있어. 너야말로 아프면 어떻게 하려고. 지금, 제정신이야?”
그러고 보니 유정을 걱정하고 구지겸,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느라 히터 켜는 것도 깜빡한 모양이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추운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에게 동생, 지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유정의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는 없었다.
그는 소희의 하얗게 질린 뺨, 붉게 달아오른 귀를 제 손으로 거듭 감쌌다. 바보같이 왜 그랬냐고 화도 냈다가 걱정도 했다가 하면서.
평소와 달리 부산스러운 그가 어딘가 몸집이 큰 강아지 같기도 해서. 골든 리트리버, 아니다. 그의 이미지에는 그래, 아주 커다랗고 털이 반질반질하고 눈이 새까만 시베리안 허스키가 어울릴지도 몰라. 쿡.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얘가 지금 태평하게 웃네. 빨리 들어가. 얼굴 봤으니 됐어.”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소희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스치는 말을 툭, 던졌다.
“오빠. 잠깐… 들어갔다 갈래요?”
심란해서였을 거다. 겨울 한기도 잊게 하는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몸을 녹여준다고 여기저기 주무르는 애정 어린 손길이 싫지 않아서. 그리고 지금 그에게선 어쩐지 그녀의 심장을 간질이는, 지난여름의 체향이 느껴져서. 그래서.
***
소희에게 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겸으로서는 촘촘히 짜온 덫에 마침내 모두가 걸려들기 직전이었고,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마음속이 시끄러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전혀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연구소 업무가 남았는데도 그답지 않게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었다.
참을 수 없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질투? 그럴 리가.
물론 토요일 저녁, 오늘이 지훈과 소희가 데이트하는 날인 걸 알았다. 게다가 겨우 그런 일에 휘둘리기엔 지겸은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참고 견뎌왔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에 지겸은 몹시 불쾌해졌다. 자기주장이 강한 저 알파의 페로몬이 누구 것인지 모를 수 없다. 개자식.
그래도 지훈이 어떤 식으로든 자진해서 찾아와 준 덕분에 그의 억제제를 쉽게 손에 넣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일 정도, 그의 집에 직접 가거나 본가에 들를 예정이었는데 수월하게 됐다.
지훈이 돌아간 뒤에도 서재에서 한참을 더 일에 열중하던 지겸의 머릿속에서 계속 그가 내뱉고 간 말들이 맴돌았다.
소희를 향한 모욕적인 언사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지훈의 엿 같은 취향.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하면, 네가 2분 먼저 태어나지 그랬냐.]
한두 번 들은 말도 아니었다. 평생 지겸의 아버지가 여러 방식으로 그에게 강요했던 논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참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참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충동적으로 소희의 집까지 차를 몰면서도 몇 번이나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꽤 늦은 시간이었고, 소희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저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더 그녀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희미하게나마 소희의 페로몬이라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야 할 자리에 차가 없었다. 8층, 소희의 집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지훈과는 이미 한참 전에 헤어져 돌아왔을 시간인데. 주말 이 시간에 일하러 연구실에 갔을 리도 없고.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위험한 상황에 놓인 거면 어떡하지.
지겸의 의문이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은 곧 극심한 걱정으로 바뀌어 갔다.
비참했다. 소희가 걱정되어 돌아버릴 것 같은데. 지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어디냐고, 괜찮냐고 묻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 벤치에 앉아 거듭 멀리서 들어오는 차의 헤드라이트를 노려보며 제발 저 차가 소희의 차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그래서였다. 소희의 차가 들어오고, 아무 일 없는 모습으로 내린 그녀가 제 앞으로 걸어오자 지겸은 자기도 모르는 새 손을 뻗었다. 제 품에 그녀를 안고 고개를 내려 소희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싱그럽고 달큼한 그녀만의 체향이 아득히도 그를 간지럽혔다. 아… 임소희, 그녀다. 그녀가 맞다. 그제야 겨우, 안심됐다.
섣불리 소희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가서도, 특히 스킨십은 더더욱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한번 품에 안고 나자 도저히 놓아지지가 않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품에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려던 순간. 아, 소희가 지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랑한 볼의 감촉과 작고 촉촉한 입술의 느낌이 코트와 셔츠 자락을 넘어 그에게까지 느껴졌다.
몸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자신의 짝을 알아보는 알파의 본능. 쏟아져 나오려는 알파 페로몬을 억제하기 위해 짧은 순간에도 지겸은 진땀이 날 정도로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오빠. 잠깐… 들어갔다 갈래요?”
“…뭐?”
차가운 그녀의 몸을 녹이는 데 집중하느라 그나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소희의 질문에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저 질문은 사실 그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거절해야 한다. 하지만.
“처음이잖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그냥…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요.”
아, 커피 마시기엔 너무 늦었나. 어딘가 시무룩하게 덧붙이는 그녀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래서 이렇게 늦은 것일까.
“그래, 그러자 그럼.”
그 말에 소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가로등만 비추는 어스름한 골목에서 홀로 지나치게 빛나는 눈동자였다. 지겸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참… 그, 오빠… 동생….”
“응?”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들어가요.”
소희는 그에게 동생인 지겸에 대해 뭔가 더 물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마주친 그의 깊고 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너무 무고하고 또 고고해 보여서,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소희의 집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지겸은 제 결정을 후회했다. 주인을 닮은 단정하고 아늑한 공간에는 온통 그녀의 냄새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온 오메가의 페로몬이 지겸의 온몸을 빠듯하게 자극했다. 억제제를 더 먹고 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구지훈 그 자식은 정말로 온 적이 없었던 건가. 아무리 집안끼리의 공고한 약속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의 페로몬에 본능을 억제할 위인이 아닌데.
“여기 처음 들어오죠…. 정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왔는데, 엉망일 거예요. 놀리지 않기.”
자신의 공간에 남자를 처음 들인 소희는 모든 게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아무리 약혼자라고 해도, 아까부터 이상하게 긴장되고 온몸이 예민하다. 그의 품에 안겼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더 포근하고 기분 좋아서, 소희는 자꾸 그 감촉을 곱씹었다. 제 몸에 감기던 팔, 단단한 가슴, 머리카락에 와닿던 입술과 찬 공기 중에도 뜨겁기만 하던 숨결. 무엇보다 기분 좋은 체향까지. 저녁때 레스토랑에서와 전혀 달랐다. 일이 있다더니, 또 그 임상 시험 중인 약이라도 먹은 걸까.
“어… 오빠? 안 들어와요?”
이미 부엌까지 들어온 소희와 달리 지겸은 아직도 현관에 서 있었다.
“정말 들어가도… 괜찮겠어?”
네, 그럼요. 하고 부드럽게 짓는 미소를 보고, 지겸은 낮게 한숨을 지었다.
실은 내가 안 괜찮아. 이미 커피 머신 쪽으로 몸을 돌린 그녀의 등 뒤로 지겸은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커피잔이 어디 있더라….”
손님이 오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혼잣말을 내뱉은 소희가 찬장을 열어 손을 높이 뻗었다.
아. 내가 꺼낼게, 하고 말하며 지겸이 다가서는데 소희의 동작이 좀 더 빨랐다.
“앗!”
와장창. 겹쳐져 있던 접시가 소희 발밑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임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