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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들리던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말소리가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똑똑.
“들어와.”
서재 문을 벌컥 열고, 지훈이 들어왔다. 입에는 또 담배를 문 채였다.
“타이밍 좀 잘 맞추지. 두 번은 더 뺄 수 있었는데.”
아쉽게.
책상에 앉아 미국 협력연구소에서 온 자료와 CT를 확인하던 지겸이 홱 뒤를 돌아 지훈을 노려봤다. 언제 씻었는지 샤워 가운을 걸친 지훈은 아까와 다르게 다시 안경을 찾아 쓴 채였다.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지겸과 닮았던 남자가 안경을 쓰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지훈은 눈이 살짝 더 작고 눈꼬리가 올라간 것이 지겸보다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더 큰 형 집 놔두고 왜 매번 여기서 이래? 게다가 또 내 이름으로….”
“몰라서 묻냐. 나 몇 년 전에 그 누구였더라…. 아이돌, 그…. 하여튼 걔랑 하다가 아버지한테 들켜서 다리 부러질 뻔했잖아.”
그걸 왜 기억 못 하겠는가. 오메가든 베타든 여자면 가리지 않는 구지훈 때문에 아버지가 난리 친 일을. 그 탓에 미국에서 레지던트 과정 잠깐 멈추고 귀국하느라 전문의 따는 게 늦어졌는데.
그뿐인가. 버젓이 약혼자가 있는 지훈이 구설에 휘말리는 걸 걱정한 아버지가 그 아이돌 여자 앞에서 네가 만나온 남자는 지훈이 아니라 실은 지겸이라고 둘러대기까지 했다. 그 후로 지겸은 문란한 로열 알파의 표본으로 온갖 추문에 휩싸여 왔다. 지금까지도.
“그러니까 제발 이제 좀….”
다시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는 지훈을 보고 지겸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말했잖아. 내 집, 금연이야.”
쌍둥이라도 미세하게 키가 더 큰 지겸이 눈을 위압적으로 내리깔고 지훈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으며 말했다.
“어후~ 무서워라. 미안, 미안. 결혼 전에 미리 좀 많이 피워 놓으려고. 섹스도. 최소 한 달은 소희한테 올인해야지. 그래도 신혼인데.”
큭큭. 뭐가 웃긴지 연신 웃어대는 지훈을 보는 지겸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지훈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꽉 쥔 지겸의 오른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 결혼, 할 거야? 분명 5년 전에 나한테….”
다 알면서도 지겸은, 그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지훈의 진심을.
“그거야, 한 명의 오메가한테 속박되기 싫어서 한 얘기였고. 여전히 내키지는 않지만… 뭐, 아버지가 까라면 까야지.”
지겸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리고 솔직히. 소희, 좀 꼴리잖아. 내가 로열 오메가는 아직 못 먹어보기도 했고.”
“뭐…? 형 너는 대체….”
아무리 제 형이라지만, 눈앞의 개자식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무던히 애쓰는 지겸을 향해 지훈이 덧붙였다.
“재밌을 것 같지 않냐?”
“뭐가.”
“아니 걔 눈 막 이만하잖아. 그 큰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지훈 오빠 제발 그만해요. 아파요, 제발요…. 막 이러면서 애원하면 진짜 존나…. 허. 나 섰다.”
“…개새끼.”
“파하하! 뭐야 너 아직도 소희 못 잊었냐? 첫사랑이다 이거야? 이제 좀 잊어. 네 형수님 될 여자야.”
지겸이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분노가 치솟아 뒷골이 얼얼했지만 참았다.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닥치고, 이제 나가. 나 일해야 해.”
“네네네~, 우리 구 닥터. 전무 나부랭이 형은 이만 나가드립지요.”
지훈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서재에 벗어뒀던 제 재킷을 집어 나가려다 말고, 짐짓 표정을 바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억울하면, 네가 2분 먼저 태어나지 그랬냐.”
크큭. 또 예의 그 기분 나쁜 웃음을 덧붙여 흘리고, 지훈이 서재 밖으로 사라졌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확인한 지겸은 그제야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몇 번 내리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질 않아, 낮게 욕을 짓씹으며 거칠어진 숨을 조금 몰아쉬었다.
그때 뭔가 생각난 듯 지겸이 주머니 속에서 연두색 알약을 하나 꺼내 유심히 바라봤다. 조금 전에 형 지훈의 재킷 안주머니에 꺼낸 억제제였다.
조금만. 그래 조금만 더 참자. 이제, 거의 다 왔어.
지겸이 그렇게 지훈의 알약을 손에 으스러질 듯 쥐고, 모니터 속 연구결과를 노려봤다.
소희와 지훈의 결혼식까지는 이제 D-14.
***
유정이 살고 있는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 소희는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따뜻한 유자차를 끓였다.
“유정아, 일단 이거라도 좀 마셔 봐…. 너 저녁은 먹은 거야?”
부은 얼굴의 유정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소희가 거듭 권하자 겨우 컵에 입을 대고 차도 한 모금 마셨다.
“언제… 알았어…?”
“오늘 오전에. 알잖아, 나 생리 주기 정확한 거. 기껏해야 2~3일 늦어지는 게 다인데 이번에 2주 넘게 늦어지더라고….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뜨길래 산부인과 다녀왔었어….”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섣부른 위로도 걱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소희는 그저 집중해서 제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보통 이 정도면 아기집도 안 보이고 임신낭 정도 보일까 말까일 거라 하더라고. 근데 있잖아… 소희야. 아기… 그 쪼그만 게 심장이 뛰더라.”
임신 6주래. 벌써 0.43cm래.
유정이 손에 계속 쥐고 있던 초음파 사진을 내게 건넸다. 마치 하트 모양처럼 보이는 검은색 아기집 안에 아주 작은 동그라미가 보였다.
울컥. 가만히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소희도 눈물이 났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친구의 뱃속에서 피어난 애처로운 저 작은 생명이 귀하고, 또 마음이 아파서. 하지만 나오려는 울음을 이를 꽉 물고 속으로 삼키며, 가늘게 떨리는 유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정아… 그… 남자친구 분께는 얘기했어? 아무리 결혼 전이고 그 사람이 알파라고 해도. 만나는 사람이 임신했는데 나 몰라라 할 리 없잖아.”
사실 유정이 만나고 있는 남자, 구지겸은 소희의 약혼자 구지훈의 쌍둥이 동생이다. 집안끼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에 그동안 소희는 유정에게 일부러 더 캐묻지 않았었다. 다만 그 남자가 초등학생 때부터 미국에서 혼자 유학했고 최근 핵의학과 전문의를 땄다는 것 정도는 약혼자 지훈에게 들어서 알았다.
지훈과는 이란성 쌍둥이인데도 모두가 일란성 쌍둥이라고 착각할 만큼 생김새와 목소리가 거의 똑같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그를 어린 시절에 몇 번 스치듯 봤던 기억은 있으나 대부분 흐릿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아마 의식적으로 모든 어른이 계속 소희와 지훈만 함께 있게 뒀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평생을 베논의 약혼녀로 살아온 소희에게 베논 집안의 나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바보는 없기에, 항간에 떠도는 지겸의 풍문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몰랐다. 다만 여자관계가 조금 복잡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정이와 만나고 있다면 그런 건 정리했다는 것 아닐까.
페로몬으로 쉽게 오메가를 유혹할 수 있는 알파의 특성상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많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로열 알파, 오메가 집안 출신인 그가 평판을 생각하지도 않고 계속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었다. 소문이 거짓일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훈의 동생이 아닌가. 지훈을 닮았으면 실제로는 단정하고 예의 바른, 좋은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까 유정이도 1년 넘게 그 사람을 만났겠지.
피식. 유정이 그 말을 비웃듯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남자…친구?”
조금 당황한 소희가 친구를 쳐다봤다.
“소희야… 내가 왜 그 사람한테 연락 못 하고 있는지 알아?”
글쎄. 걱정스러운 소희의 대답에 유정이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목요일밖에 연락 못 해.”
“…뭐? 그게 무슨…?”
소희는 유정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그 남자의… 룰이야. 정해진 요일이 아닌 날 내가 먼저 연락하면, 우리 관계는 끝이야. 다른 요일에는, 다른 여자가 있거든….”
소희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제 친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가 외계어처럼 들렸다.
“잠깐만 유정아. 내가 지금 들은 말이…. 그럼 그 사람 너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는 뜻이야?”
“여자도 아니고… 여자들. 요일마다, 달라.”
허억.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난 그 사람을 잘 알아. 임신했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걸. 지우라고 당장 병원으로 끌고 갈 사람이야. 나… 그런데 이 아이 낳고 싶어. 소희야, 어떻게 하지…?”
다시 히끅히끅 울음을 터뜨리는 친구를 소희는 꽉 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차마 괜찮을 거라는 얘기도 할 수 없고 힘내라는 말조차 가벼운 것 같아서. 소희는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자기보다 키도 더 큰 유정을 품에 깊게 안고 다독였다.
“내가 옆에 있을게. 어떤 결정을 하든, 내가 있을게. 도울게. 꼭, 꼭 네 곁에 있을게.”
소희는 그 말만 반복했다. 고작 말뿐지만 진심이었다. 소희의 최선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꾸 쓴소리가 나오려고 했다. 바보같이 왜 그런 사람을 계속 만나고 있었냐고. 겨우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 좋아한 거냐고. 너 같이 똑똑하고 예쁘고 멋진 사람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소희야. 내가 오메가였으면, 만약 너처럼 로열 오메가였으면… 그 사람도 날 특별하게 생각했을까?”
목요일에 만나는 베타 여자 정도로가 아니라.
울먹이는 유정의 솔직한 물음과 흔들리는 젖은 눈동자에, 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모든 구성원이 알파, 오메가인 집안의 유일한 베타가 된 그녀가 그동안 부모님께 받은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유정은 한 번도 자신이 베타라는 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그 사실을 싫어한 적 없었다. 자존감도 높고 늘 밝은, 참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다.
구지겸…. 지훈 오빠의 쌍둥이 동생. 순간 소희 안에서 그 남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보다 단단하고 멋지던 친구를 이렇게 상처 입히다니. 같이 만든 생명인데, 그 사실조차 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관계를 종용하다니. 이기적이고 최악이다.
본능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알파와 오메가라지만, 소희와 지훈처럼 많은 이들이 그걸 억제하고 절제하며 살아간다. 자신과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뿐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 같은 행동으로 피해를 보는 다른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 시민으로서의 교양. 그런 게 완전히 결여된 사람이라니. 내 친구가 그런 사람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지다니.
소희가 제일 증오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곧 가족이 될 사람이라지만. 그녀 남편의 동생이지만, 끔찍했다.
울다가 지친 유정은 결국 잠들었다.
‘침대에서 자야 할 텐데….’
방으로 옮겨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소파에 누운 그녀에게 이불을 챙겨와 덮어주고, 유정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소희는 제 입 속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화가 났다. 언제나 모두에게 관대한,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고 애정하는 소희로서는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한 인간이 이렇게 미울 수 있을까. 게다가 잘 모르는 사람을.
소희는 이 구지겸이라는 남자가, 정말로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