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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신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신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보다 자신과 더 닮은 생명을 만드시니, 바로 알파와 오메가라. 신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세상은 불공평했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주어진 뛰어난 능력이 베타에겐 없었다. 보통 사람인 베타에 비해 신체적으로도 지능적으로도 월등한 알파와 오메가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을 독식했다. 그중에서도 우성과 열성이 나뉘었고, 열성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며 서로 증오했다.
로열 알파와 로열 오메가. 그들은 우성 중에서도 우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손꼽힐 정도로 희소했고, 우수한 자신들의 유전자를 더 폐쇄적으로 이어 나가기를 희망했다.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 사이에서만 임신할 수 있었다. 아주 가끔 알파가 베타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도 돌았으나 1% 미만의 낮은 확률이었다.
자연스레 대부분의 로열 알파, 로열 오메가로 이뤄진 집안은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서로 약혼시키고, 결혼식 전까지 순결을 강요했다. 완벽하게 혈통을 관리하고, 알파와 오메가를 짐승 취급하는 베타들 위에 제대로 군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누구도 자식들이 발현하는 10대의 나이가 되기까지는, 그들이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심지어 우성인지 열성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10년이 넘은 약혼이 깨어져 공고하던 기업끼리의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0.1%의 확률. 둘 다 한국에 몇 없는 로열 알파/오메가 가문. 모두 소희와 지훈의 경우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전 세계 러트/히트 억제제 판매량의 40%를 점유하는 글로벌 제약회사 베논(Vernon)의 차기 후계자로 알려진 구지훈 전무. 지훈의 할아버지가 창립한 베논(Vernon)은 현재 전 세계 3위, 한국 1위 제약회사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선정한 100대 핵심 의약품 중 10개를 개발했을 정도로, 제약 산업 전반에 걸쳐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다.
소희의 집안은 한국에서 최초로 알파/오메가 전문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한 재림재단이다. 한국 정계, 법조계 인사 대부분이 재림대 출신이며 대대로 재림재단장이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국내 교육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 특히 재림의과전문대학원은 매해 의학전문대 평가에서 글로벌 3위권을 유지하는데다가 재림생명 공익 재단이 운영하는 의료법인인 ‘재림의료원’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종합병원이다.
국내 1위 제약회사와 대형 의료법인의 만남만으로도 세기의 결속이라고 난리인데, 몇 년 전 뉴스에 지훈과 소희가 함께 있는 사진이 나갔다가 사회면이 아니라 연예면까지 들썩거렸다.
187센티의 키, 적당히 근육 잡힌 몸매와 특유의 삼백안, 얇은 뿔테 안경까지 쓴 날카로운 냉미남형의 지훈. 그리고 160이 조금 넘는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갈색 웨이브 헤어,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 웃을 때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가 청순한 소희. 둘은 그림같이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의 데이트 사진은 온갖 타블로이드지와 온라인 뉴스에 도배됐고, 모든 알파와 오메가는 물론, 베타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 됐다.
소희는 낯을 가리는 성격상 그런 식으로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담스러워했으나 지훈은 홍보와 회사 이미지에 도움이 된다며 오히려 노출을 반겼다.
2주에 한 번, 토요일,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한다. 일이 바쁜 지훈 때문에 보통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정도로만 끝나곤 하는데, 요즘의 그는 일부러 사람이 많은 장소만 고르고 있다. 오늘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빠…. 이 레스토랑 지난번에 보니 룸도 있던데요….”
청담동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는 스테이크 하우스. 지훈은 제 앞 접시에 고기를 스슥 썰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듐 레어로 주문한 고기에서 빨간 핏물이 새어 나왔다.
“답답하잖아. 난 이대로가 좋은데.”
두 사람이 들어올 때부터 쳐다보며 수군대던 주변 사람들 소리가 지금은 더 적나라하다.
- 대박 야 구지훈 실물 봐. 저 얼굴이 배우 얼굴이지 무슨 회사원 얼굴이야.
-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임소희? 저 언니 얼굴 완전 작아. 와….
“자, 많이 먹어 소희야.”
주변의 수군거림을 의식한 건지 지훈이 자기 접시의 고기를 먹기 좋게 썰어 소희 접시와 맞바꿨다.
“앗 오빠 전….”
이렇게 덜 익은 고기는 못 먹는데….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지훈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원래 소희 몫이었던 미듐 웰던으로 익혀진 고기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자꾸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입맛이 없어진 소희는 그나마 가장 끝 쪽에 조금이나마 더 익은 부분을 골라 얇게 썰어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이게 고기인지 돌인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구지훈은 그런 사람이다. 날 때부터 주목받았고, 그걸 즐기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
보통의 우성 알파들은 평상시 페로몬을 최소한으로 숨기고 다니는 방법을 터득한다. 조금만 스쳐도 티가 나는 우성 알파의 강한 페로몬 향이 지나친 이목을 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훈은 제 페로몬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늘 당당히 뽐내는 쪽이었다. 이상하지, 그럴 때마다 소희는 머리가 지끈거리곤 했다. 곧 자신의 알파가 될 남자. 모두가 말하는 환상의 짝. 기적 같은 만남. 임소희, 자신의 운명적인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 엄마도 처음엔 그랬어, 아빠랑 결혼하기 전까진 말이야. 하지만 소희야, 아빠와 처음 함께 밤을 보내고, 각인하고…. 그러면 모든 게 달라진단다. 너도 그럴 거야.
지훈의 페로몬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소희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지훈과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알아왔던 사이고, 집안끼리 모임에서도 자주 만났다. 소희가 졸업한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를 시작했다. 한 달에 겨우 두 번씩 저녁만 먹고 헤어지기는 했어도, 10년을 넘게 알았던 사이인데. 그녀는 여전히 그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내성적이고 친한 친구 몇 명과만 깊은 관계를 맺는 자신의 성격 탓인가 고민도 했다. 무엇보다 지훈은 성실하고 매너 있는 약혼자였다. 아버지 아래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기 때문에 늘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렸으며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컸다. 그럼에도 그녀와의 약속을 어긴 적도 없으며 항상 다정했다.
하지만 뭐랄까, 지훈의 매너는 마치 사업상 클라이언트에게 하는 친절함과 비슷한 결이었다. 의례적이고 의식적인 다정함. 본인의 우월함과 선함을 드러내기 위한 강자의 자비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그녀가 보고 자란, 알파와 오메가의 운명적 사랑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분명 알파와 오메가는 자신의 운명의 짝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서로의 페로몬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다고. 뜨거운 사랑으로 각인해 하나가 된 커플은 평생 서로만 보고 살아간다고 그랬는데.
그래도 소희가 구지훈의 약혼자로서 느끼는 감정이 꼭 집안끼리의 오래된 약속에 의한 의무감만은 아니었다. 평소 지훈의 페로몬은 그녀를 부담스럽게까지 하지만, 휴가 여행에서의 그는 달랐다.
두 사람은 작년 여름과 겨울, 그리고 올해 여름에도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물론 방도 철저하게 따로 잡고, 양가의 비서들이 멀리서 따라다니긴 했지만. 이는 지훈과 소희가 결혼을 준비하며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 양가의 선택이었다. 지훈이 워낙 바쁘므로 둘이 오롯이 여유 있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일에서 해방되어서였을까. 그때의 지훈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선을 지키는 좋은 매너와 다정한 성격은 비슷하지만, 다정함의 온기가 달랐달까. 그녀를 향하던 짙은 눈빛, 그리고 아아 페로몬. 그럴 때의 그에게선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냄새가 났다.
상쾌하고 그윽해서, 계속 그 옆에만 붙어 있고 싶어지는 체향. 소희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 간지럽히는 특별한 기분.
[오빠에게서 평소와 다른 향이 느껴져요.]
말했더니, 지훈은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낮게 웃었었다. 그럴 리가 있냐며. 휴가 기간에는 회사에서 임상 시험을 끝내고 판매허가를 기다리는 새 알파용 억제제를 먹는데, 거기 들어있는 호르몬 조절제가 독특한 효과를 내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짓던 그의 웃음이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소희는 제 착각일 거라 생각하며 넘겼었다.
“뭐해…?”
“아, 미안해요. 오빠. 뭐라고 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이 말하는데….”
지훈이 순간 눈썹을 찌푸리려다가 곧 표정을 풀었다.
“휴우.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주말에 우리 미리 싱가포르 가기로 한 것 있잖아.”
2주 뒤,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리고 그 일주일 전, 결혼식 준비를 위해 소희와 지훈은 미리 싱가포르를 들렀다가 함께 몰디브에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장모님 모시고 미리 가 있을래? 내가 주말에 급한 골프 약속이 잡혀서. 중요한 클라이언트야.”
지훈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마치 중요하지 않은 출장 일정이 변경되었을 뿐이라는 듯한 말투. 소희의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통보나 다름없었다. 이제 곧 결혼식인데, 끝까지. 아니, 결혼 후에도 이렇게 사무적인 관계가 이어지는 건 설마 아니겠지. 소희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 미소를 띠었다.
“아…. 알겠어요. 그럼 언제 올 수 있을까요?”
“월요일 오전 비행기 타면 저녁때 도착할 거야. 거기 가든즈 바이 더 베이에 있는 미슐랭 레스토랑 예약해 둘게. 레이저 쇼 보면서 밥 먹으면 근사할 거야. 같이 가자.”
“네 오빠, 그래요. 난 괜찮으니 일 천천히 잘 마치고 와요.”
“고마워 소희야. 늘 이해해 줘서. 넌 정말 좋은 아내가 될 거야.”
지훈이 미소 지으며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소희의 손을 꽉 잡았다.
‘좋은 아내….’
소희도 최대한 밝게 웃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지훈이 바라는 좋은 아내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은 과연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소희는 묘하게 남은 불편한 감정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제 입가까지는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