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요검 (妖劍) 6.
내일 들통날 일이라면 차라리 오늘 말해버려라. (이 소룡 : 부르스 리. 절권도 창시자,
영화인.)
"어엇! 선배...너무 붙지 마요!..."
"어라라? 방금 약속해 놓고도 또 그런다...내가 싫은 건가?
"하아아...싫은게 아니구요...아까도 말했지만..."
"쉬잇! 그만해 히노기...그럼 된거쟎아? 뭐, 정 원한다면 나 한번 쯤 히노기랑 잘 수도 있어
...어머? 좀 충격적이었나 보네? 호호...이봐요! 안어울린다구...그 나이에 훨씬 연상의 여
선생을 함락시켜 놓구서 더구나 길들이기 까지 한 사람이 너무 그러는거 아니지! 요즘 남녀를
불문하고 첫 경험 연령이 소학교 상급생부터 중학교 재학 중 이라는 통계도 있단 말이야...
물론 나도 경험이 있고..."
대범하다고나 할까...스미레는 의외로 격이 없는 스타일 이었다.
그렇다고 헤프거나 하지도 않았고...아뭍은 보기 드믄 스타일 이라는 점 만은 틀림이 없는 듯
했다.
좀 어색 하긴 했지만 활달한 단발머리 소녀...더구나 한살 연상에 나름대로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있는 스타일의 여성과 팔짱을 끼고 걷는 기분은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액서사리처럼 목에걸려 반짝 빛을 발하고 잇는 소형 디지탈 카메라와 상큼한 무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오타쿠 들과는 달리 음침하기보다 개방적인 느낌이 강한 타입이다.
"히...히노기 군!...대체..."
멈칫, 둘의 발길이 멈추어 섰다.
파르르 안타까운 기운을 흘리며 서 있는 여자...담뿍 장미향을 흘리고 있는 이지적인
스타일의 여 교사 였다.
"어라? 마츠다 센세? 나와 계셨네...호호호...역시..."
까르르 웃음을 터 뜨리며 살짝 비켜서는 스미레...그녀는 망부석이 된 이사미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굳어버린 히노기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쯧쯧...안어울려요! 히노기군! 마츠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뭘 그렇게 세상 다 산 얼굴
이실까? 어이! 히노기짱 정신차리고...에잇! 저쪽으로 가요!"
털썩 스미레가 밀치는 바람에 어어? 하며 이사미쪽으로 밀려진 소년...엉겹결에 히노기의
중심을 잡아준 다는 것이 서로 얼싸안으며 살짝 얼굴을 붉힌 야릇한 상황을 만들고 만다.
"오호! 잘 어울리는데? 이쪽을 봐요...하나, 둘..."
"찰칵!"
디지탈 카메라에서 플레시가 터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정확히 찍히고 만다.
"오예! 확실한 증거를 잡은 셈...인가? 자...그럼 마츠다 센세...히노기짱...다음에 또 봐요!
호호호..."
까르르 웃음을 터 드리며 총총 멀어지는 소녀...히노기와 이사미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신경 쓰이셨나 보죠?"
"......!"
퍼뜩 이사미의 몸이 움츠러 드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 벌개진 얼굴로 히노기의 품을 빠져나오며 작게 도리질 쳤다.
"그...그런게 아니야...난...그저..."
하지만 그런 그녀를 그냥 놔줄 히노기는 아니다.
어느틈에 다시 히노기의 팔 안에 갇힌 그녀...후욱 상큼한 내음을 풍기는 소년의 입김이
목덜미에 와 닿는다.
살짜기 와 닿는 소년의 입술이 주는 감촉이 섬칫하게 느껴 진다.
아아...가볍게 탄성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팔 안에 몸을 맡긴다.
"후후...귀여운데요? 누님은 말이죠...하루 하루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고 할까...정말
귀여워요..."
"히...히노기 군..."
타악...힘이 빠지고 만다.
한적한 복도...맹수에게 잡혀 끌려가는 영양 처럼 이사미 그녀는 히노기에게 기대어 걸으며
온 몸을 맡기고 만다.
품 안에 가득 안겨든 풍만한 여체를 느긋히 즐기며 상큼한 표정을 짓는 소년...여체는 어느새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온화한 얼굴에 '화복 (華服)'을 단정히 차려입은 남자...흐믓한 미소를 지은 채로 짙은 선
글라스를 낀 동안의 남자 윤성훈과 나란히 앉아 갈색 자사다기를 앞에 놓고 담소하고 있던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혀...형님!"
와락 뛰어들 듯 반가운 표정...아니 오랜만에 만난 형제나 아버지를 뵌 듯한 표정을 소년은
짓고 있었다.
"再見! 불과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한 몇 년 못 만난 듯한 기분이 드는군...그래
그동안 무탈하고 잘 있었나? 小弟 (어린 동생)..."
온화하게 울리는 정겨운 목소리...히노기에게 '봉영화동'의 권법을 전수하고 첫번째
가르침을 주었던 사내였다.
진 경룡...바로 그가 돌아온 것이다.
"흐음...그렇군요...이쪽이 바로...정말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어린 동생에게 매여 고초가
크시다구요? 처음 뵙습니다. '진 (陳)' 이라고 합니다..."
와락 무릎에 기대 비비적거리는 히노기를 다독여 떼어놓고 히노기의 뒤에 서서 약간은
감동적으로 의형제의 재회를 바라보던 이사미...그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진경룡이 한 말이다.
"처음 뵙습니다...마츠다 이사미 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사미 역시 환하게 미소지으며 정중히 인사한다.
찻잔 두개가 더 놓여지고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중국차가 따라 졌다.
서호 용정차.
전통의 맛과 향을 자랑하는 중국차의 백미였다.
"흐음...대단하군...'음기선도 (陰氣仙道)'의 비전은 물론 서양 마법의 체계...게다가 밀종의
실전된 전승까지 엿보이는군...허 참!...역시 임자는 따로 있었군..."
히노기가 품 속에 소중히 갈무리 해 가지고 온 봉영화동 권법서 에서 찻아낸 인피로
만들어진 도해...그 것을 찬찬히 살펴본 진 경룡이 다시 히노기에게 돌려주며 한 말이었다.
"이전에 한 원로 권법가를 방문했을 때 봉영화동의 권법 중 화동권을 전수받으며 함께
저 비급을 물려 받았네...인연이 닿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셨지...역시 저 물건의 임자는
자네였던 게야..."
끌끌...약간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진 경룡이 한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이론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실제로 수련을 한 그 과감성이 기가 차면서
부럽군...음기선도...그 것은 고대 제왕들의 덕목중 하나였다고 하지...여성을 다룬다는것...
그 것은 제왕이 알아야 할 지식이기도 했으니...허나 역시 무모하다고 꾸짖어 주고 싶구만..."
약간은 나무라는 투로 말하는 진경룡...그에 따라 그의 안광이 조금은 엄격한 빛을 발했다.
"하하! 놔 두세요...어쨋든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한은 그 것은 흉이 아니지요...그나저나
부럽군요...동생이나 나나 언제나 솔로탈출을 할런지...하긴 진 아우의 경우 달라붙는
아가씨들이 한 둘이 아니던가요? 하하하..."
윤성훈의 말에 멋적게 입맛을 다시는 그였다.
"허 참...형님도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음기선도 라면 형님께서도 어느정도 조예가 있지
않으십니까? 개인적으로 팽조나 삼봉파의 좌도선법을 연구하시기도 했구요...아 참!
그러고보니 '예 노사'와 안면을 텃다구요? 히노기 군이 말입니다."
이사미가 목에 걸고있던 수정병이 건네어 졌다.
찬찬히 안력을 돋우워살펴보던 진경룡이 하아! 감탄하며 다시 돌려준다.
"대단하군요...눈에 공력을 집중하고 살펴보니 알겠습니다. 반야심경을...그 것도 전서체로
썻군요...가느다란 철필로 말입니다. 역시 대단합니다."
윤성훈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요...우리 한국에도 인간 국보라 불리는 분이 계시지만 그 분야에서 현재 세계제일
이라 해야 겠지요. 히긴 그 분은 그분 나름대로 전문분야가 계시니...뭐라 그러긴 어렵지만..."
진경룡이 흐믓한 표정...귀여운 조카나 동생을 바라보는 듯 그윽한 눈길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윤성훈 대형께 히노기 자네의 근황을 듣고 적쟎이 놀랐다네...하하! 여자를 얻었다...
게다가 그 여자를 매우 아껴준다...그 것만 해도 놀랄 판국인데, 권법의 조예도 이제 상당한
수준에 오른듯 하고...더구나, 나름대로 사업을 벌여 상당한 수익까지 올리고 있다니...이
형의 마음이 흡족하네...하하하!"
"형님..."
바짝 매달리듯 앉은 채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는 소년...진경룡은 진정 기꺼운
표정을 짓는다.
"이런 이런...아내까지 거느린 친구가 이 무슨 어리광인가? 하하하! 그건 그렇고...어떤가?
한번 수를 나눔이...이전과는 얼마나 달라 졌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지...응?"
곧 마당에 내려와 마주선 두 사람 이었다.
의형제는 서로 경의와 존모의 빛을 띈 채로 마조서 있었다.
"먼저 선공하도록 하게...허나, 이 형이 익숙지 못한 점이 많으니 살살 해주게나..."
"네! 가겠습니다. 형님!"
손속은 자연스러우면서 부드럽게 이어졌다.
어디까지나 그 수준을 알아 보자는 것...우선 화동권의 개문식 부터 시작되었다.
남파권법에서 흔히 보이는 '동자배불식'...양 손을 포권하듯 장과 권으로 한데 모은다.
일명 해와 달이 하나된 형상...중국 한족의 왕조인 '명 (明)'나라를 복원 시키고자 하는
권법가들의 열망이 깃든 초식...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선 밝음으로 어두움을 없애고
선함을 고양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진경룡 역시 같이 동자배불로서 예를 보낸다.
그리고, 두 의형제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굉장하군...대단 해..."
"......"
약간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사미...이 전에 윤성훈과 겨루가 사고를 낸 경험도
있고 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윤성훈은 간간히 무릎을 치며 감탄한 표정이다.
"역시 히노기 군이 딱이로군...그에 비해 진경룡 동생은 저 권법의 진경을 바로 펼치지
못하고 있어...허허...이것 참..."
감탄은 윤성훈 뿐이 아니라 진경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이런 수준까지...)
가슴 깊이 서슬퍼런 칼날을 대하는 기분이다.
똑같이 화동권법을 펼치고 있었지만 점점 손 발이 어지러워 지며 점차 히노기에게 말려
드는듯한 형국이다.
천지화우 (天地花雨), 만리화향 (萬里花香), 천선헌화 (天仙獻花), 화옥수 (花玉手), 삼환
화동 (三環花動), 옥녀송화 (玉女送花), 호접천화 (蝴蝶穿花), 산화조양 (散花朝陽)...
히노기의 손 발은 면면히 이어지는 반면 진 경룡의 손 발은 점차 어지러워 지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원과 원을 이루며 조여드는 히노기의 공세에 진 경룡이 점차 반발하든 손 발을
쳐내기 시작한다.
파팡! 점차 손끝에서 나오는 기세가 심상챦게 전개된다.
"이런...이거 저친구 다 좋은데 저 손속이 문제야...어쩐다...아직은 히노기 군이 유리하긴
하지만..."
윤성훈이 혀를 끌끌 찬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형세가 급반전하기 시작한다.
"흐라압!"
거침없이 울리는 기합과 아울러 흡사 검붉은 용이 노하여 바다를 뒤엎는듯 무시무시한
기세가 솟구치기 시작한다.
윤성훈의 안색이 돌변한다.
"어허! 저 사람이! '진천팔격뇌 (辰天八擊雷)' 를!"
벌떡 일어선 윤성훈...그러나, 잠시 고개가 갸우뚱 해 진다.
"어라라? 이게 뭔가? 허어...밀리지 않는군...대등해...거기에...저 진 아우도 사정을 어느
정도 봐 주고 있구만...허허허...두 사람 다 많이 늘었는걸?"
휴우...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용의 춤과 꽃잎의 바람이 어우러지듯...그 렇게 두 사람의 동작은 자연스레 녹아들어 간다.
거센 숨결을 토하며 살벌하게 쳐내지는 손과 발 또한 히노기의 부드러운 동작에 어울려 점차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봄날의 아지랑이가 일듯 다시금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이윽고 둘은 서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주 모으고 서 있었다.
"아주 훌륭하군...하하! 이젠 화동권으론 안되겠는걸? 도데체 얼마나 사랑을 나눈 겐가?
대단한 음류의 공력이야...하하하!"
"과찬이십니다...봐주시지 않으셨다면..."
겸연쩍어 하는 히노기의 말에 윤성훈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죠...히노기군...봉영화동은 음류의 공력을 기반으로 하는 '음기무예 (陰氣武藝)'
입니다. 따라서 진경에 들기란 일반적으론 어렵죠...왜냐하면 음류의 진기는 달과 별의
기운을 호흡하는 토납법 아니면, 남녀의 교합을 통한 음류의 선도로 만이 얻을수 있는데...
히노기 군이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토납법을 행했더라도 절대 이런 진경 까지는 어려웠을
겁니다...당연히! 저 멋진 누님과의 관계 밖에는 생각할 수 없군요...자 어때요? 솔직히
털어 놓는 것이...하하하!"
팡팡! 어깨를 두드리며 호쾌하게 웃는 윤성훈 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이사미가 히노기와 진 경룡에게 깨끗한 수건을 건넸다.
"하하! 이거야 원 서러워 살겠나...나도 어서 아릿다운 꾸냥 하나를 사귀어야 하려나..."
"쯧쯧...괘씸해요! 히노기군..."
화르륵 얼굴이 붉어진 두사람이었다.
유쾌한 웃음 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화기애애한 재회의 열기는 식을줄 몰랐다.
권법의 손속을 겨룬 형제들이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들었다.
딸깍...다 먹은 찻잔을 이사미가 치우는 가운데 탁자위에 놓여진 정성들여 쓴 초청장을
바라보는 눈길들이 왠지 심각했다.
윤성훈이 가지고 온 것으로 히노기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있었다.
"사미다레당 (五月雨堂)...이라면 그쪽 업계의 숨은 손으로 유명하고, 그 영향력 또한
큽니다. 흐음...하지만, 안좋은 소문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하지만 일단 신용은 제일이죠...진 동생도 알다시피 '에도 시대'부터 내려온 곳이라면
역사면 해도 이백여년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히노기에게 초청장을 보냈어요...
그리고, 나에게도...일행을 지정해서 같이 올 수 있는 초정이니 어때요? 같이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윤성훈의 말에 진경룡은 글쎄요...하며 말을 끌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잡기던 진경룡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여유도 있고...같이 가 보지요..."
다음날...
히노기는 늘상 일어나던 시간보다 약간 늦게 일어났다.
간밤의 정사가 과격했던 탓일까...화려한 침대 위에는 아름답고 농염하기 그지 없는
여체 하나가 축 늘어져 포만감 넘치는 표정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살짝 미소를 띄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 소년은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깨끗한 정장 차림...너무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디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차림새 였다.
마지막으로 상의에 손을 넣으려는데 누군가 익숙한 체취를 풍기며 다가와 거들어 준다.
상큼한 장미향...히노기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누님..."
살짝 얼굴을 붉힌 그녀...바로 히노기의 포로가 된 이사미 그녀였다.
듬뿍 사랑을 받아서 그런지...살짝 상기된 표정이다.
더구나 보송보송 목욕을 하고 난 뒤 처럼 촉촉해 보이는 묘한 색기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다.
익숙하게 시중을 받으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히노기는 살포시 기대어 선 이사미를 바라보다 살짝 그녀의 고개를 쳐 들었다.
"자아...어때요? 오랜만에...동반인을 지정해서 같이 갈 수 있는데...누님도 가시지 않을
래요? "
다시금 히노기의 품 속에 머리를 묻는 그녀...이윽고 히노기의 품 안에서 그녀의 머리가 크게
끄덕인다.
"어이구! 오늘따라 훤~해 보이십니다...그리고 더욱 아름다워 보이구요...도련님...그리고,
아가씨...자자...타십시오...연락을 받자마자 제일 어울리는 녀석으로 준비 해 두었습니다."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둘을 맞이하는 운전사 아즈마 스우죠였다.
그의 말대로 번쩍이는 차는 리무진 세단...약간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히노기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고맙습니다...정말..."
"이런...무슨 말씀을 그렇게...이미 도련님께서는 우리 골드캐슬의 우량 고객이 되셨습니다.
자그만치 '실버' 등급이십니다. 그 나이에 혼자의 힘으로 실버등급을 받으신 예가 있을까요?
자...어서 타시지요...도중에 일행 분 들도 모셔야지요? "
차는 기분좋게 도로를 질주했다.
비교적 막히는 길이었지만 늘씬한 리무진이 가니 약간 속도를 높여도 알아서 길을 비켜준다.
도중에 윤성훈과 진경룡을 태우고 다시 움직인 차는 외곽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 한적한
도로로 들어선다.
"흐음...동생 덕에 호강하는군...영화에서나 봤지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인걸?"
살짝 브랜디를 첨가한 홍차를 마시며 진 경룡이 한 말이었다.
윤성훈은 느긋하게 가벼운 음료를 즐기며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오페라를 듣고
있었다.
처음엔 한적하던 도로가 상당히 붐비는 모습을 보여준다.
몰려든 차 들 역시 번쩍이는 고급 승용차들이 대부분이다.
주차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차를 주차 시키자 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사람들이 차 문을 열고
정중히 인사를 보낸다.
"어서오십시오..."
"이쪽입니다..."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위쪽으로 올라가니 '신사 (神社)'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군이 나타
난다.
왠지 상당히 오래된 듯한...거대한 맹수가 웅크리고 있는 듯 보이는 건물군이다.
"기묘한데요? 이런 곳에 신사라니...그 것도 한두해 된 것 같지가 않은데...아니, 상당히
유서깊어 보이는 건물인데...말이죠..."
"흐음...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벌써 예전에 알려지고도 남았어야
하는데...물론 이 일본이란 나라가 '신 (神)'과 '귀(鬼)'가 많은 곳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고 멀리 본 신당 건물이 보였다.
곳곳에서 보이는 신관들...특이한 점은 이상하리만치 여 신관들이 많았는데 심지어 남자
신관의 복장을 입고는 있지만 여자로 보이는 이들도 상당히 섞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진 돌 조각상...그 것은 꼬리가 아홉개 달린 여우의 형상이다.
"구미호...헛! '전설의 고향'도 아니고...여우신이라..."
"그리고 보니 어쩐지 음기가 강하게 흐르고 있는듯 합니다...여우라...중국에도 많은 전설이
있지요...'호리녀'가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또는 살리기도 하고...'호박사'라고 해서 여우가
사람들에게 지식과 학문을 전수한 이야기며...재미있군요...옛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니..."
윤성훈과 진경룡은 이상하게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에 비해 히노기는 구름에 탄 듯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마치 구름 이불을 덮고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인데요? 기분 좋아요...누님은 어때요?"
"...으응..."
이사미를 언뜻 바라보자 살짝 양 볼을 붉힌 채 가볍게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흐음...역시...'진음 (眞陰)'의 체질인 히노기나 이사미 상의 경우는 우리완 다른 모양
이로군요...우리는 따끔따끔 불편한 느낌인데...역시 이 곳은 음기가 성한 지역인듯 합니다."
"......"
그때, 멀리 익숙한 얼굴 하나가 다가온다.
바로 사미다레당에서 만난 '기무라' 노인...노인은 얼굴 가득 기쁜 표정으로 다가와 정중히
히노기와 일행들에게 예를 갖춘다.
"찻아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자...이쪽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 이들은 기무라 노인의 안내로 갚은 내당쪽으로 향한다.
"이런 곳에 이렇게 유서깊은 신사가 있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상당히 오래된 곳
같은데..."
윤성훈이 가볍게 운을 떼가 스윽 기무라 노인이 바라보고는 그럴 것이라는듯 고개를 끄덕
인다.
"이 곳이 설립된 시기는 오래 전, 군웅들이 일본 천하를 놓고 전쟁을 벌이던 때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로 '오다 노부나가' 라는 걸출한 영재가 나와 활약하던 그 시기입니다.
아니, 약간은 틀렸다고 해야 겠군요...정확히는 노부나가 공 께서 비운에 가신 '혼노사의 변'
그 직후 라 해야 겠지요...그 이후 이곳은 재물과 복운, 학문과 기예를 다루는 '가미 (神)'를
모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곳 '여월신사 (如月神社)'는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지요..."
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것이 있었는지 윤 성훈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 문을 연다.
"오다 노부나가...라면 혹시 이 곳이 노부나가 공을 제사지내는 곳 이란 말입니까?"
움찔 기무라 노인의 몸이 멈칫 거린다.
"혜안이시로군요...맞습니다. 이 곳은 노부나가 공과 그 가신 분들을 제사지내는 곳 입니다."
"......!"
"......"
잠시 후, 어느덧 사람들은 흡사 옛날로 돌아온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한 채의 고풍스런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이쪽입니다..."
기무라 노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일본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복장의 소녀들이 맞이하며
차례로 사립문을 열어준다.
"잠시 이 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널찍한 다다미방...두명의 소녀들이 사박사박 다가와 차와 화과자를 사람들 앞에 내 놓는다.
"기묘한 일이군요...초대장에는 무슨 행사가 있다는 글을 본 듯 한데..."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그런 행사조차 젖혀두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이곳으로? 허 참..."
다다미방엔 저쪽 바깓을 향하는 문 뒤에 정좌해 있는 '여관'들 외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옛 일본의 에도시대라도 온 듯한 느낌...특히 진 경룡과 윤성훈은 내색은 안했지만 왠지
꺼림칙해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
"응?"
갑자기 진경룡과 윤성훈이 흠칫 놀라는 빛을 보이며 정면 휘장이 쳐진 부위로 시선을
돌린다.
"...!"
"아..."
이 것은 히노기와 이사미 역시 마찬가지...특히 본의 아니게 가장 정면에 자리를 잡은
히노기의 경우 무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낀다.
뭐랄까...마치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수라도 나타난 듯 한 기분...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주위가 조용해 진다.
"......"
정적에 빠진 방안...잠시 시간이 흘렀다.
한참 후, 사르락 옷끼리 부딛치는 소리와 저 쪽의 장짓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흡사 환상속에 빠졌던 듯한 분위기가 가시고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방금...뭐였죠?"
"허어...대체..."
"......"
히노기는 물론 다른 사람들 역시 무언가 크게 놀란 눈치다.
"엄청난...'음기 (陰氣)'였어...마치...아니, 그럴리가...없지...허허헛..."
"으음...괴이한 일이로군..."
또르르 진경룡의 이마엔 땀 방울 마저 맺혀 있었다.
"하아아..."
이사미...그녀는 왠지모르게 살짝 고무된 표정으로 야릇한 신음을 토하며 치마단을 꾸욱
움켜쥐고 있었다.
뭐랄까...전신으로 짜르르 전율이 흐르며 가볍게 질척거리는 느낌이 사타구니에 배어
나온다.
그리고, 얼마 뒤...기무라 노인이 오래된듯 보이는 금빛 비단천에 싸인 상자 하나를 들고 와
사람들 앞에 내려 놓는다.
재질을 알 수 없는 천으로 꼰 새끼로 정갈하게 묶여진 나무 상자엔 몇장인가 부적이 붙어 있었다.
"기다리게 하느라 송구합니다...무례를 용서하시길...제가 굳이 초청장 까지 보내어 이 곳에
모신 뜻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기무라 노인이 정중히 인사를 하며 내민 상자...사람들의 의아해 하는 눈길이 집중 되었다.
"이 것을 잠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죄송하지만, 아아! 지금 열어보시면 안됩니다...가지고
가셔서 열어 보십시오...이 전에 제가 말씀드린 바가 있지요? 한 가지 도움을 구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요...조금은 난데 없는 줄은 압니다만...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사오나 그때까지
이 것을 맡아 주시는 것...그 것이 제 요청입니다...어떠신지요?"
"......"
사람들은 황당해 했다.
히노기...소년 역시 고개를 갸웃 거리며 상자를 내려다 본다.
분명 언젠가 기무라 노인과 차를 마시다 노인이 한가지 나중에 자신이 부탁하는 바를 들어
줄 수 있겠냐고 했었다.
자신이 들어줄 수 있고 용인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러마고 했었고...그렇지만 난데없는 일은
난데없는 일이다.
"대체...이 상자안에 뭐가 있길래..."
기무라 노인이 엄숙한 음색으로 말해주었다.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의 원한이 서린 물건이 하나 잠자고 있습니다. 그 요물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어 왔는지 모릅니다.
허나, 도련님 이시라면 그 물건을 잘 다룰 수 있겠기에 맡기려는 것입니다.
부디 제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기를..."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은 얼굴 가득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감사합니다...정말...허어...진정 시름 하나를 덜었습니다..."
노인은 슬쩍 눈물을 내 비치기 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