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요검 妖劍. (1).
적을 베기 전에 먼저 자신을 벨 수 있어야 한다. (미먀모토 무사시)
"상행위란...먼저 자신을 파는 것이라 했다..."
뻐끔뻐금 짧은 곰방대에서는 연신 가는 연기가 피어 올랐다.
"더구나 우리 '사미다레당 (五月雨堂)'은 지난 에도 시대부터 있어 왔던 유서깊은 전통과
역사를 가진 곳이다..."
"......"
"접객의 생명은 고객을 파악하는 것...더구나, 그리도 주의를 주었건만...그 정도 눈썰미를
지닌 손님을 그냥 보내다니..."
태앵! 곰방대가 작은 화로와 부딛치며 소리를 냈다.
움찔 납작 엎드린 남자...그는 머리를 들지도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린다.
하오리 차림의 노인...쭈글한 주름이 온통 얼굴을 덮은 그의 실눈이 가볍게 떠진다.
째앵! 섬뜩한 빛이 뿜어진다.
날이 잘 선 도검에서나 뿜어질 듯한 서슬퍼런 눈빛...
"꼴보기 싫다! 썩 물러가거라!"
쩌렁 울리는 목소리...여태까지의 물처럼 잔잔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다.
꿈틀꿈틀 부복했던 남자가 물러난 후 노인은 느릿하게 다시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넣고
불을 댕긴다.
"그래...알아 보았는가?..."
"......"
어디서 나타났을까...
신중한 태도로 남자 하나가 나타나 노인에게 서류 파일 하나를 건넸다.
"흐음..."
서류 파일을 죽 훝어보던 노인의 눈썹이 곶추선다.
"구룡방의 '예 노사'와 접촉이 있었다...라...그리고, 때 맞춰 열린 길거리 경매에서
물건 석 점을 건지고...그 후에 온 곳이 우리 사미다레당...이로군..."
"...그렇습니다...그리고, 그 후에 '윤 성훈'...이라는 골동품상과..."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묘한 눈빛을 발한다.
"윤 성훈...그 한국인 말이로군...각종의 한국 문화재를 경매하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그자 말인가..."
"네! 당주..."
노인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며 뻐끔뻐끔 곰방대를 빨아댄다.
후우우 길게 내뿜는 허연 연기가 묘한 흐름을 보이며 흩어진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군...'구룡방 (九龍幇)'이나 '조민회 (朝民會)' 둘 중 하나와 연이
닿아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저어...그런데, 한가지..."
"......?"
노인이 힐끗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돌아간 곳이...'골드 캐슬' 이었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털렁 손에 들린 곰방대가 다다미로 굴렀다.
"골드 캐슬...? 그 요사스러운 계집의...근거지 말인가!"
"...그렇습니다...당주..."
순간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온 노인의 눈이 스르르 감겨진다.
잠시 그러고 있던 그가 다시 평정을 회복하고 천천히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뒹구는 곰방대를
갈무리 한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설마 조민회나 구룡방이 그 음탕한 계집과 손을 잡았을 리는 만무
하고..."
"어떻게 할까요...일단 감시는 붙여 놓았습니다만..."
"......"
노인은 재차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담뱃대를 물고 생각에 잠겼다.
"...현 상태를 그냥 유지하도록 하라...감시는 붙이되 굳이 '골드캐슬'까지 따라 붙지는
말도록! 그 암거미의 둥지에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아...대신, 그 외의 정보수집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하잇!"
사내는 부복한 채로 흐릿해지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방 안에는 오직 노인 한명의 자취뿐이다.
"때 맞춰 열린 길거리 경매에 참가...그 결과 석점의 물건을 낙찰받아 1000% 가 넘는 이윤을
남기고...우리 사미다레당 에서는 파악도 안된 물건을 족집게 처럼 골라 내어 무려 수십 억의
감정가를 확인했다...이 것이 우연일 수 있을까..."
뻐끔 뿜어내는 연기와 노인의 나직한 탄식이 이어졌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재미있는 일임에는 분명 하군...흐흐흐흐..."
노인은 음산하게 웃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뚝뚝...소년의 얼굴에서 땀 방울이 흘렀다.
일견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잔잔한 호수 표면과 같았다.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소년의 몸...화아아 향긋한 내음이 퍼져 나온다.
상쾌한 숲의 향기와 아울러 유혹적인 장미꽃 향기까지...너무 진하지도 그렇다고 거슬리지도
않는 향기였다.
"흐음..."
책 한권을 펼쳐 손을 짚어가며 읽던 윤성훈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 진다.
'대단하군...저 정도라니...벌써 무아지경에 든지 상당한 시간이다...온 몸으로 뿜어지는
진기의 유동은...허어...그야말로 엄청난 자질이로군...더구나...'
윤성훈은 다른쪽에서 잔잔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고 있는 또 한 사람...이사미
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이사미 상도 만만치 않군...신체 조건이 좋은데다가...소질도 있어...가르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지금 이사미는 온몸가득 충만해져 오는 짜릿한 느낌을 만끽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맑고 화창한 날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해변을 걷는 기문이랄까...
부드럽게 몸을 움직일때 마다 몸 동작과 같이 느껴지는 기분좋은 느낌...그 것은 이른바
정(精), 기(氣), 신(神)...세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진한 기감 이었던 것이다.
"자아...좋습니다...이제 천천히 깨어나도록 하세요!...하나!...두울~!"
윤성훈이 손 안의 죽비를 탁! 탁! 일정한 각격으로 두드렸다.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히노기와 이사미는 무아지경에서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며 점차
약간은 몽롱했던 주위 사물이 분명하게 인식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
"......"
윤성훈은 재차 손 안의 죽비를 탁탁 두드렸다.
"자자! 이제 마무리 입니다...'수공 (收功)'을 한 후에 잠시 휴식 하도록 하지요..."
수공 (收功)...명상이나 권법 등을 한 후에 심신의 조화를 이루도록 정리해 주는 마무리 운동
같은 것을 말한다.
기공이든 권법이든 명상이든 갑자기 시작하고 갑자기 끝내면 자칫 기혈의 흐름이 불규칙해
지고 밸런스가 깨질수 있다.
때문에 가벼운 호흡과 마사지...동작 등을 역어 마무리를 해 주는것이 좋다.
히노기와 이사미는 한결 상쾌하다는 표정이었다.
쭈욱 기지개를 펴는 이사미에게선 기분좋은 활기가 넘쳐 흘렀다.
"오늘은 두사람 다 수련이 잘된듯 하군요...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앞으로 갈 길은 멉니다...
히노기 군은 어서 축기 과정을 마무리 해야 하고...이사미 상 역시 히노기 군의 '봉영화동'
권법을 익힐수 있는 몸 상태를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특히 히노기 군은 일종의 속성법을
사용한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기본적인 축기과정을 착실히 해 둘 필요가 있지요..."
"네에...형님..."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잠시 쉰 후에 아침을 먹을까요? 같이 갈 데도 있고 말이죠..."
"아! 준비하겠습니다..."
"누님! 제가 할께요..."
"아니요! 히노기상! 오늘은 저예요..."
가벼운 옥신각신 끝에 차려진 아침...야채 샐러드와 과일, 비리지 않게 조리된 등푸른 생선과
해물 스프...약간의 쌀밥에 보리빵 등 이었다.
막 식사를 하려는데 딩동! 벨이 울렸다.
네에! 이사미가 나서서 주방 벽 한쪽에 달린 작은 모니터를 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하지만 전에 말씀하셨던 건 때문에...실례를..."
"실례라니요? 들어오세요..."
이사미가 방긋 웃는 표정으로 맞이한다.
아즈마 스우죠...골드 캐슬에 소속된 운전사였다.
예의바르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 그가 소중히 들고있던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넨다.
이사미가 받아들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식사...안 하셨죠? 같이 들도록 하세요..."
"아닙니다...그렇게 까지 마음 써 주시지 않아도..."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잠시 후에 같이 나서야 하쟎아요? 그렇게 되면 점심때 까지는
바쁘실 테니까..."
아즈마 스우죠...그는 갈등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하는수 없지요...그럼 폐 끼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여럿이어서인지 식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식사 중간에 윤성훈이 히노기가 살펴보고 건넨 서류 파일을 펼쳐 놓고 손으로 짚어가며
읽어낸다.
"흐음...예상보다 가격이 높게 나왔군요...큐브릭은 세개 합쳐 1억엔 정도...오늘이 경매
마감일인데 잘 하면 더욱 높은 가격을 받을수도 있겠네요...거기다가...코등이의 경우엔
확실한 진품으로 판명나긴 했는데...어느틈에 소문이 났는지 벌써 구입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는군요..."
윤성훈은 싱긋 웃으며 히노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즈마 스우죠가 새삼 놀랍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대단하십니다...어떻게 손의 감각 만으로 글을 읽을수 있으신 건지..."
윤성훈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단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손의 감각만 가지고 글을 읽거나 사물을 판별
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물론 개중에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죠..."
"...네에...그렇군요..."
"어쨋든 오늘은 바쁜날이 될 것 같군요...그리고, 아즈마 스우죠님 이라고 하셨던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별 말씀을...당연한 의무 입니다."
아침식사와 정리가 끝난 후 셋은 외출 준비를 하고는 아즈마 스우죠의 안내를 받아 내려
갔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BMW세단...셋을 태운 차는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진품입니다...정말 감탄했습니다..."
김정사 노인이 고개를 연신 조아린다.
"그런데...윤 선생님! 뵙고 싶다는 분들이 와 계십니다...만...접촉 연락도 몇 있었고요"
은근히 말을거는 그의 말에 윤성훈은 어쩔수 없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그게...그 것들은 제 물건이 아니라서요...저 역시 부탁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부탁...받은것 이라면..."
"하하! 뭐 걱정마십시오...한국으로 가지고 간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그 물건들의
주인 역시 현제 재정적 문제 때문에 그 가치를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얼마 후에
정식 절차를 밟아 시장에 내 놓을 생각이니까요..."
"그렇습니까..."
끈질기게 달라붙는 감정사를 뿌리치고 온 윤성훈이 후우 숨을 내 쉬었다.
"어쨋든 결과는 나온 셈이군요...그런데, 예상 밖입니다...대체적으로 상당히 높은 가격
이예요...보물급 이라고는 하지만 전부 19억 8천만엔...정도라...가히 천문학적인 가격
이군요..."
"19억...8천만엔..."
"......"
"그 것도 이 전의 경매가 등을 참작한 가격일뿐...아마 실제 경매에 들어가게 되면 20억엔은
가뿐이 넘어갈 것이라고 하더군요...하하! 히노기군의 눈썰미가 대단 합니다..."
"......"
그러나, 히노기는 왠지 편하지 못한 얼굴이다.
"눈썰미가 아닙니다...형님..."
"...?"
"절대...눈썰미가 아닙니다..."
나카야마 히노기...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 처럼 걸고있는 수정 병을 옷 위로 움켜
쥐었다.
"흐음...미세조각 이로군요...쌀알에 반야심경 전문을 새긴다라..."
"어떤 분인지 아시겠습니까 형님?"
윤성훈은 히노기가 건네준 수정 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미세조각 이라면 실제로 어느 정도로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쌀알 크기에
글씨를...그 것도 짧다고는 하지만 260 자에 달하는 경전을 쓸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한 분 떠오르는 분이 있군요...예천상 노사...풍수와 기문
둔갑, 마의도인을 이었다고 할 정도의 관상학의 대가이며 유 불 선 삼교에 밝고 고대
금석학과...무엇보다 전각과 미세조각의 달인이신 분 입니다."
히노기는 가만히 그 이름을 음미했다.
"예 천상 노사...라구요?"
"네...아마 그분일 듯 싶군요...기연입니다...예 노사의 어깨를 주물러 드린 후 그분의
지시대로움직였다.
그랬더니 이렇더라...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을수도 없군요...하하
...더구나 그분 에게서 뿜어지던 기운과 유사한 기운을 간직한 세점의 코등이를 골랐더니
예사 물건이 아니더라...놀랍습니다...놀라워요..."
윤성훈은 하하 밝게 웃었다.
"지금...계실까요?"
히노기의 물음에 윤성훈은 아쉽지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안계실 겁니다...늘상 있는 분이 아니거든요...저도 별로 많이 뵙지는 못했습니다.
진경룡 의제라면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있겠지만...말이죠..."
아마 없을테지만 한 번 가보겠냐는 윤성훈의 물음에 히노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곧 차에 올라 전날 찻았던 그 곳 부근에 차를 주차시키고 나섰다.
여전히 붐비는 골목...그러나, 쌀알에 글씨를 새기는 노인이 있던 그 자리엔 빈 공터만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짐작한 대로군요...어떻게 하시겠습니까...더 찻아보실까요?"
"......"
"예 천상 이란 분은 일년에 한 두번 정도 일본에 건너와 이전에 인연을 맺은 지인들을
찾아보고 몇몇 묘소를 돌아본 후에 다시 홍콩이나 대만으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혹은 일본의 차이나 타운에 머물기도 하신다고는 하지만..."
부근 가게에서 사정을 알아보던 윤성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히노기군! 마음은 알겠지만...이 형이 보기엔 그분을 찻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진경룡 의제를 통해서 라면 연락할 방법도 있을테니 말이죠..."
"네에...하지만 왠지 아쉽군요..."
그때 히노기를 뒤에서 감싸안는 부드러운 손길이 있었다.
"히노기상...너무 실망하지 말아요...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수도 있쟎아요?"
"누님..."
"후후...보기 좋군요...맞습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앞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그리고,
예노사 그분께서는 스치는 인연 이라고 하셨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다시 뵐 날이 있을 겁니다..."
윤성훈은 알듯 모를듯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들리며 가게문이 열렸다.
"어서오십시오...!"
무심코 인사를 하며 맞이하던 점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해 보였다.
"아...안녕하십니까? 저...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곳의 점주님을 좀 뵐 수 있을까요?"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 동안 저쪽에서..."
"아...네에..."
히노기 일행은 점원이 권해주는 접객용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곧 점원이 엽차를 날라와 대접했다.
엽차를 반 쯤 마실정도가 되자 화다닥 달려온 점원이 허리를 숙이며 주인이 왔다고 알려
왔다.
따깍 따깍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 소리를 내며 나타난 사람은 체구가 작은 노인이었다.
전통적인 하오리 차림의 노인...하얀 머리칼과 눈썹을 하고 짧은 턱수염을 길렀는데 왠지
빈틈이 없다는 인상을 주는 자였다.
재간많은 원숭이를 보는 듯한 체구를 했으면서도 발 걸음이 무겁고 신중하다.
"어서오십시오...이곳 '사미다레당 (五月雨堂)'을 맡고 있는 '기무라(木村)'라고 합니다."
의외로 상당히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적당한 울림과 매끄러움을 가진...사미센을 연주하며 노래라도 부른다면 지그시 눈을 감고
들어줄 만한 느낌이다.
"아...네에...저는 히노기 라고 합니다...얼마전 이곳에서..."
"알고 있습니다 손님..."
노인이 가벼운 웃음을 입 가에 머금었다.
"그 일로 이곳 역시 유명해 져서 손님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말입니다..."
"......"
노인의 말 마따나 가게안은 꽤 붐비고 있는 상태다.
물론 그렇게 많은 숫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전에 왔을때 보다는 훨씬 사람이 많았다.
직원도 이전과는 달리 세 네명 정도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으며 한쪽에선 침착한 인상의
나이 지긋한 남녀 셋이서 물건들을 세심히 돋보기 등으로 살피며 다시 분류하고 있었다.
"자아...이쪽으로..."
노인은 예의바르게 가게 한쪽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가게 안쪽에 딸린 다다미방...흡사 사무라이들이 다회를 여는 곳 같은 분위기다.
아닌게 아니라 작은 화로와 다구등이 갖추어져 있고 옆쪽으로 작은 정원이 달린 풍경이 내다
보이는 미닫이가 열려 화사한 햇볓이 새어들고 있었다.
"이곳 '사미다레당'은 지난 에도시대 초부터 전해내려오는 곳입니다...그야말로 상당히
연륜이 쌓인 곳이지요...헌데 이번에는 그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찻아온 손님을 정중히 맞이하고 보내는 것이 우리 사미다레당의 전통인데...요 근래 해이해진
기강 때문으로 손님께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사죄드립니다..."
"아...그게 아니라..."
히노기가 언뜻 당황하는 빛을 보인다.
"제가 찻아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기무라 님이라고 하셨나요? 실은 이것 때문에..."
히노기는 열쇠가 달린 가방에 들어있는 세 점의 코등이를 꺼내 노인의 앞에 놓았다.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진 코등이와 그에 따른 감정서들...노인은 약간 어리둥절한 모습
이었다.
"이건...흐음...그렇군요...이 세 점이 우리 사미다레당에서 가져가신 물건인가 봅니다...
헌데, 이 것을 왜...?"
"그건..."
잠시 후, 기무라노인은 익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 내밀었다.
윤성훈, 히노기, 이사미 세 사람은 차례로 노인이 우려낸 차를 받아 정중한 태도로 마셨다.
"맛있어요..."
"흐음...여태껏 차를 꽤 마셨지만, 참 훌륭합니다..."
"......"
뽀얗게 거품이 우러난 연녹색의 차는 지나치게 쓰거나 떫지 않고 부드럽게 목을 넘겼다.
더구나 노인의 차를 우리는 손 놀림은 그야말로 '정중동 (靜中動)'...가히 명인의 솜씨
였다.
"한 노인이 어느 '야무사 (野武士)'와 시비가 붙어 결투를 하게 됐소이다...노인은 칼을
다루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어서 당시 마을에 온 유명한 사무라이에게 문의를 했었
지요...'어떻게 하면 부끄럽지 않게 죽을수 있겠습니까...'라고요...그때 그 사무라이는 노인을
보더니 혹여 기예를 익히고 있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노인은 단 한가지 차를
다루는 기예를 깊이 알고 있는 상태였지요...해서 사무라이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그 노인에게
그럼 차를 한잔 우려 달라 하고 했다지요...노인이 차를 우리는 모습을 본 사무라이는 감탄
하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명인의 반열에 오른
기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는 노인에게 말해줍니다. 차를 우리는 것과 검을 다루는
것은 그 다루는 바가 찻잔이냐 검이냐 하는 것만 다를 뿐이지 그 근본은 같다구요..."
기무라 노인은 다구를 거두어 손질하며 불쑥 말을 던졌다.
정좌한 상태로 노인의 말을 세 사람은 세이경청하고 있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그 '야무사'는 노인의 앞에서 재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노인의 기백에 질려 무릎을 꿇고 맙니다.
검을 받쳐들고 흡사 차잔을 받쳐들었다 내리듯 휘두르겠다고 마음 먹자 노인에게서
그 야무사 로서는 감당키 힘든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고 합니다..."
슬쩍 말과 함께 노인의 눈이 히노기를 향한다.
"어린 나이에 그 명인의 기운을 읽는다는 것은 보통의 눈썰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래된 물건이라고 다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나카야마 히노기님 이라고 하셨습니까?
도련님께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인의 손길이 닿은 물건을 찻는 안목으로 좋은
물건을 값싸게 구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히노기는 재차 노인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노인은 듣지 않았다.
"두말 하실것 없습니다...도련님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허나, 모든것은 도련님의
복이며 눈썰미 이기도 하십니다...그 석점의 물건이 비록 산 가격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받았다지만 이미 도련님께서 합법적으로 구입한 물건이십니다...그 것은 도련님의 운이며
또 우리 사미다레당의 명예이기도 하구요..."
노인은 히노기를 향해 참으로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스윽 노인의 시선이 나머지 두 사람...윤성훈과 이사미를 둘러 보았다.
"참으로 근래 보기 드믄 분이십니다...보통사람은 보이기 힘든 배포이기도 하시구요...
앞으로도 우리 사미다레당을 많이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일행이신 두분도 마찬가지
십니다. 허허허..."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생각보다 감정가가 많이 나온 만큼 가격을 다시 조정해서 돌려주시겠다...아니면 물건을
도로 돌려줄 용의도 있다...허허허...일반인에게선 나올수 없는 말씀입니다...허나, 우리
사미다레당 역사상 그런 식으로 손님께 폐를 끼친 적은 없습니다...훌륭하신 말씀이오나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대신 우리 사미다레당을 많이 찻아주시기를...그 것이 저희의
보람입니다."
"...네에..."
노인의 말에 결국 히노기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곧 사람을 불러 히노기 앞에 여러점의 도검과 코등이, 무장의 갑주들을 가져다 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상당히 간략적인 것 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도검이나 갑주를 다루는 마음가짐에서 각
도검의 시대적 특징, 감볍벌에 대한 사항 등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히노기가 골랐던 세점의 코등이를 사미다레당에 소속된 감정사들에게 보여주고 다시
공인의 감정서를 발급해 주었으며 사미다레당의 특별 고객으로 등록까지 해 주었다.
"앞으로 언제든 찻아주십시오...물론 우리 사미다레당의 지정 휴일은 예외입니다만...
허허헛..."
"감사합니다...폐 많이 끼쳤습니다."
"이런! 폐라니요! 이제 우리 사미다레당의 특별 고객이십니다...그런 말씀은 가당치 않은
것입니다."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 노인은 아주 공손한 태도였다.
노인은 히노기 일행의 모습이 안보일때 까지 문 밖에 서 있었다.
"......"
노인은 잠자코 히노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누군가 노인을 불렀다.
"당주...쫒을까요?"
천천히 노인의 고개가 좌 우로 흔들린다.
"그럴 필요 없다...그리고, 기존의 감시도 철수시켜라..."
"하오시면...?"
느릿느릿 노인의 몸이 움직였다.
"저 나이에...저런 마음가짐과 눈썰미라...더구나 그 몸에서 가공할 정도의 진음의 기운이
풍겼다. 그 옆의 여자에게서도...흐음..."
기무라 노인의 눈이 살풋이 가늘어지며 서늘한 안광을 흩뿌렸다.
"아무래도 저 도령이 적임자인 듯 싶구나...단, 그 윤성훈 인가 하는 자의 몸에 서린 기세가
걸리고, 도령의 얼굴에 만발한 '도화지기 (桃花之氣)'가 꺼려지지만..."
"......"
"차를 준비시켜라...아무래도 '히메사마 (姬樣)'를 뵈어야 겠다..."
"하...하잇!"
순간 노인의 등 뒤에 머물던 인기척이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다.
노인의 가늘어졌던 눈이 천천히 바로 떠지며 맑은 빛이 흘러 나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익을 보면 의를 잃기 십상이라고 했다...그렇지 않은 경우는 매우
드믄 법이지..."
잠시후, 노인의 앞에 한대의 검은 승용차가 와서 섰고 차 문이 열렸다.
차는 노인을 태운채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