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0)

4. 늙은여우.

모든 여자는 자신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법 입니다. (채녀)

하늘거리는 단풍나무 끝에는 어느덧 가을의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교정의 구석...사르르 넘어가는 책장의 느낌이 좋았다.

풀썩 어디선가 흘러내린 단풍잎이 책갈피 위에 살포시 주저 앉았다.

훗...입가에 웃음을 담고 살짝 쳐들어 보인다.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찰칵 거리는 카메라 소리...힐끗 고개를 돌려보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눌러대는 소녀들 몇이 보인다.

하아...또인가...하며 고개를 흔들고 만다.

"여어...좋겠어 히노기! 요즘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하핫!"

좀 면적이 넓은 그림자...팡팡 등을 두드리는 손...히노기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

들었다.

"곤도냐? 젠장...말도 마라...이건 쉬는시간도 없이 연신 따라다니니...재들은 쉬지도 않나..."

곤도가 조금 놀란듯 눈을 멀뚱히 떳다가 되묻는다.

"너...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야? 재들 사진부 애들...찍은 사진을 적게는 100엔대 부터 

많게는 천엔대까지 팔아먹쟎아! 그게 상당한 금액이라구...게다가 대상은 인기있는 선생님

부터 학생들까지 가리지 않는데...너도 재네들한테 사진을 사는걸로 알았는데...아니었나?

왜...그 유이 라는 여자애 사진 말이야..."

살짝 바라보니 아까의 여자애들 몇이 무언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곤도를 째려보는 것이 

보인다.

아마 좋은 앵글을 가린다는 거겠지?

히노기가 책을 탁 덮었다.

"유이라...그 천사표 말이군...그것도 다 한때라구...난 요즘 취향이 바뀌었어...요녀틱한 

악녀 스타일의 누님으로...우리 학교엔 그런 타입 없나?"

곤도가 큭큭 웃음을 지었다.

"악녀...스타일? 너참 취향도 별나다...하긴 원래부터가 알 수 없었지만....아참! 너 방학

숙제는 다 했냐? 하긴 이렇게 물어봤자 뻔하지만..."

히노기는 눈초리를 가늘게 했다.

"왜? 너...안했구나...쯧쯧...방학이 끝난지 벌써 삼일째야! 어쩌려고 그래? 거기에 점심시간

끝나고 수학아냐? 그 악명높은 여선생..."

순간 곤도가 얼굴이 창백해지며 우물쭈물댄다.

"야! 히노기...뭐 방법이 없겠냐? 아까 1학년 5반애들 기합받느라 죽어 나더라고...절반 

이상이 숙제를 안하니까 그 마녀가 꼭지가 돌았나봐..."

"흐음...우리반은 어때?"

히노기는 턱에 손을 짚으며 신중히 물었다.

곤도는 역시 안절부절 못했다.

"우리반도 마찬가지야...거의 삼분지 일이 안했을껄? 더구나 재대로 한 애들 많지도 않아..."

히노기는 머리를 득득 긁었다.

"나...참...30문제...학년 과정중 풀기 어려웠던 문제를 정리해 오는 거였던가? 그거 별로 

안 어렵던데...그렇다고 한 애들 껄 베낄수도 없쟎아...어쩐다..." 

"......"

히노기가 잠시 염두를 굴리다가 무언가 생각난듯 물었다.

"아참! 이따 4교시가 그 무책임 교사 시간이지? 걸어다니는 환자...잘 하면 방법이 있을수도

있겠는걸?"

히노기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잘 하면 방법이 있겠어... 

히노기는 턱을 만지작 거리며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곤도는 왠지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안돼겠는걸? 모두 자습하도록 하세요...선생님은 좀...흐으으..."

한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한 남자교사였다.

비칠비칠 걸어 밖으로 나가려는데 얼른 히노기가 다가선다.

"선생님! 좀 기대세요...아무래도 안돼겠어요..."

"하아고...고마워요...난 왜 이러는지...정말 올해같으면 죽는게 낫지...흐으응..."

걸어다니는 환자 혹은 '미이라'로 불리는 남자교사 사토선생...일년에 꼭 한달은 심하게 

앓는데다가 그때만 되면 수업을 재대로 진행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사람좋고 꼼꼼하긴 하지만 그 기간엔 자습을 시키는 것이 일이라 무책임교사 란 별명 또한

붙어 있는 사람이다.

히노기는 사토 선생을 부축해서 양호실에 데려왔다.

양호 교사인 데자와...다른 학교완 달리 유독 오토리 학원에는 남자 양호교사가 한 사람 있을

뿐이다.

"허어...이런! 또 시작이신가...어서 이쪽으로..."

"하이고...결국은 오늘도 또 이렇게 되었네요...폐를 끼칩니다 선생님..."

데자와 선생은 연신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 폐라니요...어서 쾌차 하셔야지...이러다가 선생도 하세가와선생 짝 나겠소...쯔쯔..."

히노기는 그런 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 그럼 가보겠습니다..." 

사토선생이 잊지않고 덧붙인다.

"흐응...히노기군...고마워요~ 그리고 반 애들 조용히 자습하게 하세요..."

"네! 몸조리 잘 하세요..."

히노기가 조용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정말 보기드믄 학생이로군..." 

"그렇네요...성적도 좋고...그 전엔 눈에 잘 안띄었었는데...요즘 아닌게 아니라 학교안에서

인기인가 봐요..."

히노기는 억지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다.

"후훗...죄송해서 어쩌나...저렇게 생체리듬이 불규칙하고 오라가 불안정한 인간인 경우 

병을 악화 시키는것 쯤은 일도 아니지...미안합니다 사토선생님! 대신에 이번 위기만 벗어

나면 병을 호전시켜 드릴 방법도 생각해 볼께요..."

살작 혀를 내밀며 걸어가는 히노기는 내심 미안함을 떨칠수 없었다.

그때 히노기는 앞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를 볼수 있었다.

"...!"

바짝 마른 건어물 같은 피부...게다가 꼬챙이를 보는듯 몸에 탄력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였다.

무언가 화가났는지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여자.

히노기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수 있었다.

'마츠다 이사미...일명 늙은 여우...던가?'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힐끗 그 여자가 히노기를 노려본다.

"학생은...지금 1학년은 수업중인걸로 아는데? 어떻게 나돌아다니는 거지요?"

"......"

매몰찬 목소리였다.

차갑다못해 저주스런 느낌마저 드는...더구나 탁하고 갈라져서 듣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러나, 히노기는 여유로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게...지금 사토 선생님을 양호실에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또 몸이 안 좋으시다는

군요...그래서..."

이사미선생은 그러나 쌩쌩 찬바람이 일 정도로 콧바람을 내었다.

"흥! 그 꾀병교사...또 시작이로군...알았어요...반에가서 애들 조용히 시키세요...아까부터 왜

떠드는 소리가 들리나 했지..." 

그녀는 그렇게 말을하고 삐걱삐걱 활기 없는 움직임으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황당해 하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히노기는 그러나, 언뜻 뜻모를 이채를 눈에 띄었다.

"어라? 저 이사미선생...뭔가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히노기...잠시 후, 고개를 갸웃 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아...인터넷을 검색해서 골라온 거야...A4 5장 분량씩 총 200문항이야...복사 해오느라

좀 시간이 걸렸지만, 이른바 전국 고등학교 1년생들이 가장 풀기 까다로워하는 문제200선!

...다행히 사토 선생님이 양호실에 있으니까...이틈에 얼른 하라고...물론 숙제를 한 아이들도

있겠지만 조용히 자습을 하든 책을보든 알아서 하고...옆반의 늙은여우가 직원실에 갔으니까...

산통깨지 말도록 해! 그 선생, 분명 죽도 가지러 간 것일 테니까..."

"카악! 죽도? 또 시작이군...그 폭력교사..."

"교칙에는 분명 체벌금지일텐데...유독 우리 학원에는 그걸 쓰는 선생들이 많단말야...

뻑하면 점수 깐다는 협박이나 하고..."

"아아! 조용! 떠들다 산통깨면 시한부로 '따' 시킬테니 조용히 하라고! 너네들은 숙제

다했냐?"

"야! 곤도! 그 웃기지도 않는 협박 또 시작이냐? 관둬라 관둬..."

"그만! 싸우지들 말고! 레포트용지 필요한 애들은 말만 해...충분히 사왔으니까..." 

"우힛! 역시! 고마워, 히노기!"

"자자 고맙다는 소린 나중에 하고...빨랑빨랑 해! 중복되거나 비슷한 형식으로 가게하지

말고...변형도 시키고 섞어 쓰기도 하란말야! 그 여선생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야..."

아이들은 속닥속닥 이야기하면서 저마다 받아든 프린트를 참조하며 밀린 방학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옆반에서 타작이 시작되었는지 경쾌한 소리와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살벌하네...누가 저 선생 버릇 안가르쳐 주려나?"

"노처녀 히스테린건 알겠는데...저 선생 데려갈 남자가 어디 있겠냐고...흥!"

"쉿 조용! 히노기가 이쪽을 보쟎아! 숙제나 해라! 숙제나..."

히노기는 맨 앞의 교단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놓고 예의 암기노트에 적어놓은 '파워 워드'와 

'봉영화동'의 구결 등을 외우고 있었다.

힐끗 쳐다보니 반 아이들은 저마다 숙제를 하거나 몇몇은 조용히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던지 몇몇은 작은 미니 게임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패션 잡지나 만화를 보는 애들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럭저럭 다 끝난건가? 우리반?"

"그래...아까 점심먹고 마지막으로 류노스케랑 야마다 둘이 숙제를 끝냈어...간신히..."

히노기는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후우우...다행이다...어쨋거나 누가 얻어 맞는거 보는건 싫거든...중복되거나 하지는 않지?

그럼 각자 숙제의 자료로 활용한 프린트는 알아서 잘 처분 하도록 해...그것조차 걸리면 재미 

없을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아이들이 대답을 하자 히노기는 한결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쯧...이 것도 어려운 일이로군...그런데 별일이네? 이렇게 늦는 선생이 아닐텐데..."

그 순간...왈칵 문이 열렸다.

반 아이들이 쥐 죽은듯 조용해 졌다.

또각또각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들렸다.

"차려! 경례!"

인사가 끝나고 교단위의 선생...늙은여우의 시선이 스윽 아이들을 훝어본다.

참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늙은 여우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멋스럽지 못했다.

딱딱한 고목이나 건어물의 표면 혹은 대충 다듬어 놓은 나무등걸 같은 거칠거칠한 느낌에 

군데군데 기미와 마른버즘같은 것 까지 끼어있는듯 하다.

한마디로 여자로서는 실격...이라는 느낌이다.

"......"

"자! 모두 방학 잘 보냈겠지요? 알고 있듯이 요즘 난 몹시 심기가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학생들 때문이예요! 교사와 학생 과의 간에는 신뢰가 중요

합니다. 그런데 요즘 선생님은 몹시 실망이에요! 이 반에는 그런 학생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방학무렵 내준 과제...모두 해 왔겠지요? 안해온 사람은 일어서도록 하세요!

그리고, 한답시고 성의 없이 해 온 경우도 용서치 않습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다 알게 

되어 있어요!"

"......"

아이들이 아무소리 않고있자 늙은여우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뭐, 좋아요...그렇다면 각자 해온 숙제를 내놓도록 하고 뒤에서부터 걷어오도록 하세요...

단, 검사 후 성적에 반영할 테니 이제라도 성의없이 해 왔다고 생각되는 학생은 스스로 

일어서는게 좋을 거예요...자 그럼 걷어오세요!"

사그락사그락 뒤에서부터 걷어 온 프린트가 앞쪽에 모였다.

일단 늙은여우는 아이들이 한 숙제를 한쪽에서 대충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히노기가 아이들에게 나눠준 200선...그 것은 히노기 자신이 수집하고 정리한 것이나

다름 없는 자료였고 아이들 각자마다 나눠준 프린트의 내용 역시 상당히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절대 문제가 중복 되거나 할 리가 없었고 몇몇 급하게 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반의 것에 비해 퍽 양호한 수준이었다.

10여분정도 40명에 달하는 반 아이들의 과제물을 살펴 본 늙은 여우는 그런대로 얼굴이 

풀어져 있었다.

"좋아요...다른반들과는 다르게 1학년 1반은 열심히 숙제를 해 온것 같군요...그렇다면 상을 

주도록 하죠...오늘은 진도를 나가지 않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새로운 단원의 두 페이지 

정도 진도를 나간 후에 추가로 방학 숙제를 해온 학생의 과제물을 풀이할 예정이지만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만족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어요. 대신 남는 시간은 자유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단, 떠들 거나 해서 옆 수업을 진행하는 반에 폐를 끼치거나 할 경우

원래대로 진도를 나갑니다 아셨겠죠?" 

"...!"

"네!"

아이들은 그야말로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기쁨을 억지로 감추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장은 과제물을 좀 들고 따라오도록 하세요...그리고 다시한번 말하겠지만 절대 떠들거나

해서 옆 반에 폐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안됐다는듯 히노기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히노기는 아이들의 과제물을 들고 나가며 어쩔수 없다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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