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부 잊혀지지 않을 하루
용준은 쓰러져있는 동우를 보면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듯이 답답했다.
용준은 동우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고뇌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용준은 깊게 숨을 들여 마신 후 무엇인가 결심을 한 듯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우정이라는 이름 하에...
오직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있었지만
용준은 동우를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이 안고 가려고 마음먹었다.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나에게는 사치였나 봐..
미안해 효연아...동우에게는 큰 빚이 있거든...
어쩌면 널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어’
동우를 위해서라면 남은 두 팔 아니 자신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다는 그 맹세...
용준은 10년 전 동우와 함께 바닥에 누워 별을 보면서 한 자신이 맹세가 떠 올랐다.
이제 결심이 확고히 선 용준에게 있어 거칠 것이 없었다.
먼저 용준은 주위를 둘려보며 경민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용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구석에 폐자재들을 쌓아놓은 뒷공간이었다.
잠시나마 사람들을 이목을 피해 경민을 숨길 수 있는 적당한 장소였다.
용준은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황급히 경민을 옮기기 시작했다.
몸이 성한 사람일지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몸도 성치 않은 용준이기에 더욱 힘이 들어 보였다.
또한 서서히 조여오는 긴장감은 용준을 더욱 힘들게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용준의 얼굴은 식은 땀으로 젖어 들었다.
경민을 끌고 가다시피 하며 옮기고 있을 때
밤공기를 가르며 세차게 울려 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자 용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용준의 심장도 점점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경민을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엠블런스에
적지 않게 당황하는 있는 용준이었다.
그리고 곧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들..
그 어느 때보다 더 또렷하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용준의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처럼 용준을 압박하고 몰아세우고 있었다.
용준은 결국 미봉책으로 근처 빈 박스들을 이용하여
경민을 덮고서는 사람들을 마중하기 위해 계단으로 내려갔다.
곧 용준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2층으로 올라왔고 동우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피와 날이 잘 선 칼은 그 당시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듯 했고
그 모습을 본 한 응급대원이 용준에게 다가와 말을 꺼내었다.
“최선생님. 단순 사건은 아닌 것 같은데 신고는 하셨나요?”
“..어.. 그래.. 내가 이미 신고했어..”
용준은 말까지 더듬었고 떨리는 입술로 다시 한번 거짓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동우를 옮기는 동안 용준은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늘도 그것을 아는지 용준을 도와주기 위해 구름을 이용하여 달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곧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용준에게
또 다시 한사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최선생님, 같이 안 가시는 거예요?”
“아.. 그게.. 경찰들이 곧 여기 온다고 연락이 왔거든
내가 상황 설명을 해야 하잖아 곧 갈 테니 수술준비 부탁해”
용준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여기에 남아 있어야 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엠블런스가 출발하자 용준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용준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숙소 안에서는 여전히 태연과 써니가 거실에 나와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두 소녀 모두 자신의 휴대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태연은 동우를 애타게 부르며 현관 앞으로 뛰어갔다.
“오빠!!”
태연은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동우라고 생각하였다.
태연은 지금까지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애태우게 만든 동우가 죽도록 미웠지만
동우가 무사히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자 동우를 향했던 미움과 원망은
눈 녹듯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 기대는 무참히 짓밟혀졌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제시카였다.
태연은 뜻밖에 제시카의 얼굴을 보자 당황하였다
“시카야, 이 시간에 어디 나갔다 온 거야? 그리고 왜 그렇게 울고 있어?”
제시카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숙소에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오직 동우에 대한 걱정만이 머리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태연을 보자마자
감정이 복받쳐 올라 오면서 제시카는 태연에게 달려가 안기며 더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태연아..어떡해..흑흑흑”
태연은 그제서야 제시카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았고
순간 가슴 속을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느낌에 몸서리 쳤다
태연은 제시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시카야,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
제시카는 태연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태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껴 울먹이면서 태연에게 동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빠가..오빠가.. 죽어가고 있어..흑흑흑”
두 손을 모아 휴대폰을 꼭 쥔 채 동우의 전화가 오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던 태연에게 있어
제시카의 그 한 마디는 마치 거대한 해일이 자신을 덮치듯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시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태연의 손에 꽉 쥐어진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연도 역시 바닥으로 쓰려졌다.
“태연아!!!”
그 모습을 본 써니의 절규하는 외침이 거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시카에게 있어 오늘 하루는 정말 지독한 악몽을 꾸는 날인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두 사람인 동우와 태연이
자신 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본 제시카는 제발 이 악몽에서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거실에서 들여오는 소리에 잠을 자고 있던 다른 소녀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했고
윤아 역시 써니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듣고서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써니의 몸에 의지한 채 쓰러져 있는 태연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모습을 보자 모두 토끼 눈이 되어 태연에게로 몰려들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은 의식을 차릴 수 있었고
다른 소녀들 역시 동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시카가 동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윤아의 모습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윤아는 동우가 칼에 찔렸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 다음 이야기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주 높은 산에 올라간 것처럼 귓속은 멍해졌다.
그리고 윤아의 손발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
윤아는 지금 당장 동우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너무나 무서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아는 평상시 장난이 심한 언니들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태연의 행동이나 제시카의 모습을 보자 그 말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자신의 의지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도 또 한 사람이 거실로 나오는 있었고 그 소녀는 바로 막내 서현이었다.
서현은 눈을 비비며 실눈을 뜨고서는 다른 소녀들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언니들”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미소를 띠면 다른 소녀들에게 질문을 하는 서현이었다.
하지만 곧 동우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해맑게 웃던 그 미소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서현은 이야기를 모두 듣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현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서현이의 맑디 맑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곧장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리는 서현이가 걱정이 되어 효연이에게 따라가 보라고 이야기 하였고
효연은 서현을 붙잡으러 밖으로 뛰쳐 나갔다. 다른 소녀들은 거실에 남아 태연과 윤아를 돌보고 있었다.
효연은 때마침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들어가는 서현이를 붙잡았다.
“너 지금 동우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가는 거야?”
“흑흑흑..아니... 몰라...”
서현은 동우가 걱정이 되어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효연은 그런 서현이의 모습을 보자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내가 데려다 줄게. 같이 가”
효연은 서현이의 손을 잡고서는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내려가는 내내 서현이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들이 쏟아지고 있었고
안절부절 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언니, 만약에 오빠가 잘못되면 난 어떻게 살아야 돼.. 흑흑흑”
자신도 지금 사랑에 빠진 한 여자로써 효연은 서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효연은 그런 서현을 꼭 안아주었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되어 보이는 굳게 닫혀진 문 앞에서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서 모두가 초조하게 결과만을 기다리는 수술실 앞...
소녀들도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 무사히 수술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태연과 윤아는 이미 너무 울어 진이 다 빠져 힘이 없어 보였고
서현은 수술실 문 앞을 서성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제시카 역시 묵묵히 자리에 앉아 두 눈을 감고서는 동우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기를
하느님께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소녀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수술이 끝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민호와 미연 역시 동우의 소식을 듣고서는 허겁지겁 수술실로 달려왔다.
그렇게 모두가 수술실 앞에 앉아 지리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었다
동우가 들어간 지 3시간이 흘려갔지만 수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지금 소녀들의 심정을 반영하듯 뿌연 안개가 짙게 깔린 아침이 밝아왔다.
그러자 삭막하던 병원 안은 곧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멈추어 서서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 몇몇 사람들은 지금 소녀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민호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소녀들을 생각하여 꾹 참고 있었다.
“얘들아, 여기 다 모여 있다고 해서 동우가 당장 깨어나는 것도 아니잖아
오늘 스케줄도 있고 눈 좀 부쳐야지
내가 여기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이제 숙소로 돌아가”
소녀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렸고 그것을 깨는 것은 태연이었다.
“저는 남을게요. 오빠”
병원에 도착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태연의 유일한 말이었다.
“저도요”
서현이와 윤아 역시 동우 곁에 있겠다는 의사를 민호에게 전달하였다.
민호도 동우와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세 명을 억지로 숙소로 보낼 수가 없었다.
“태연이하고 윤아, 잠 안자고 오늘 스케줄 괜찮겠어?”
태연과 윤아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미연아, 나머지 얘들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
미연도 역시 마음이 착잡했지만 이렇게 소녀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민호에 말에 따라 다른 소녀들을 일일이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쪽 구석에서 제시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남고 싶어요”
항상 동우와 티격태격 싸움만 하던 제시카이였기에
민호는 소녀들 중에서 제일 동우와 사이가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제시카에 행동은 좀 의외로 다가왔다.
하지만 제시카의 눈은 너무나 간절해 보였고 동우의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연과 함께 5명의 소녀들은 병원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또 다시 기다림이라는 글자가 남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수술실 안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수술이 막바지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고
드디어 5시간 동안의 수술을 마치고서는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용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소녀들과 민호는 용준에게 달려갔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용준이었지만 얼굴은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야 이제 위험한 고비도 넘겼고 동우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돼.”
용준의 그 말에 소녀들은 그제서야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서로를 쳐다보며 다독거려 주고 있었다.
민호 역시도 한시름 놓게 되었다.
“제시카하고 태연이, 나 좀 잠깐 봐”
용준은 제시카와 태연을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동우도 괜찮으니까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된 일이지 나한테 자세히 설명 좀 해줘”
태연은 용준이기에 모든 사실을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태연은 먼저 써니의 일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연의 이야기를 이어서 제시카가 말을 이어갔다.
용준은 그제서야 동우가 아닌 제시카가 경민을 살해한 것을 알게 되었지만
동우가 되었건 제시카가 되었건 용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근데 경민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어요?”
태연은 동우가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제 써니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용준은 다시 한번 머뭇거리며
“그게 말이지...동우가 수술 들어가기 전에 경민이라는 사람을 내가 간단하게 치료를 해주었는데
떠나면서 너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그 때는 그 뜻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너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마 써니의 대한 일인가 봐
이제 그 일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 사람도 많이 뉘우친 것 같더라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용준은 그럴싸한 말을 지어내어 태연과 제시카를 안심시켰다.
“근데 써니의 일을 다른 멤버들이나 민호형도 알고 있는 거야?”
“아뇨.. 아직”
“잘 됐네.. 괜히 마무리 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걱정 끼칠 필요는 없잖아
그 일은 우리들만 알고 있자 알았지?”
태연과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준은 다시 한번 태연과 제시카를 안심 시킨 후에 다시 동우에게로 돌아갔다.
동우가 무사히 수술을 끝마친 지
10여일이라는 시간이 흘렸고 어느덧 7월의 문턱에 발을 들어놓고 있었다.
여느 해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사람들은 모두 와이셔츠의 단추를 한두 개씩 풀고서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자신들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일반적인 사무실과는 달리
투덜거리는 소리와 말다툼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씨~
야! 너희들 똑바로 말 안 해”
건장한 체격의 한 남자가 사무실 한쪽 모서리에 놓여진 책상에 앉아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짜증 섞인 말투로 앞에 앉아있는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에게 괜히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잠시 뒤 보기에도 건실하게 생긴 또 한 명의 사내가 다가와
앞에 앉아있는 사내들을 향해 머리를 쥐어 박으며
“너희들 또 사고 쳤어? 요즘 너무 자주 본다”
그 남자는 책상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남자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서는 서류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선배님, 감식결과가 나왔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은 뇌 손상에 따른 심장마비로 사망한 걸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복부에 난 상처들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입은 것으로 이번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는 서류를 검토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과 함께 약간씩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서울 경찰청 소속의 강력반 형사로 고향 선후배 사이인 채형사와 김형사였다.
며칠 전 한 등산객에 의해서 경민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이 두 사람이 이번 사건을 맡게 된 것이었다.
말을 이어가던 김형사는 도중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근데 선배님,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피해자의 지문을 채취해 신분조회를 해봤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회가 되지 않는다니”
“불법체류자라고 해도 입국한 기록이 남을 텐데 그것마저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체형이나 외모로 봐서는 중국이나 일본 쪽 동포가 밀입국 한 거 같습니다.
그랬다. 이미 이수만이 김의원 측 도움을 받아 경민에 대한 기록을 모두 바꿔 치기 했기 때문에
경민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밀입국자라...이거 골치 아픈 사건을 맡았는 걸”
채형사는 오랜 형사경력을 미루어 볼 때 밀입국자나 불법체류자가 관련된 사건의 대부분은
금전관계에 얽힌 사건이라든지 인종차별에 대한 사소한 말다툼이 우발적이 사건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번 사건 역시도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단 피해자 몽타주 작성해서 밀입국 자들이 일할 만한 인근공장들 돌아다니면서
신원파악부터 하고 혹시나 모르니까 실종 신고 들어온 것도 있는지 한번 체크해봐”
“네, 선배님”
김형사가 조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뒤
채형사는 경민의 사진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흠.. 몸에 완전 난도질을 해났구만...'
김형사에게 그렇게 지시를 했지만 내심 경민에 복부에 새겨진 상처들이 마음에 걸렸다.
단순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상처들이었다.
채형사는 어쩌며 자신이 잘못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찜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한편 경민에 대한 수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저 딱딱한 병실침대에 누워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동우였다.
지금 동우 곁은 서현이가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시간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서현은 깨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잠든 사이에 동우가 깨어 난다거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서현은 동우의 손을 꼭 잡고서는 밤을 지새운 것이었다.
그렇게 4명의 소녀들은 돌아가며 동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교대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찾아온 제시카였다.
“언니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예요?”
제시카는 조금이라도 일찍 동우가 보고 싶어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나갈 채비를 했던 것이었다.
“그냥.. 할 일도 없고 해서..
이제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넌 이제 들어가봐”
“네, 언니”
서현은 마지막으로 동우의 모습을 머리 속에 집어 놓고서는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대충 챙기고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서현은 넌지시 제시카의 마음을 떠 보았다.
“근데 제시카언니, 언니도 오빠 사랑하고 있죠? 맞죠?”
제시카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듯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미안해 서현아”
서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저한테 뭐 미안해 할 일이 있나요
저도 예전에 태연언니랑 오빠랑 사귀는 것을 알았지만 제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 했는걸요.
언니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그리고 태연언니랑 윤아언니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그러니 이제 마음 편하게 생각해요”
“고마워 서현아”
제시카는 서현을 문 앞까지 배웅을 해주고 나서 다시 동우에게로 돌아왔다.
제시카는 멀뚱히 서서 동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저 얼굴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아파왔다.
제시카는 자리에 앉아 동우의 손을 잡으며 살며시 동우 손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조금씩 흐르는 눈물이 동우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단 둘만의 공간 안에는 제시카의 흐느끼는 소리와
동우를 향한 작은 속삭임만이 들리고 있었다.
“제발 빨리 일어나 줘...난 아직 사랑한다는 말도 못했단 말이야...”
평상시 도도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제시카였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죄인이 된 듯 한 없이 연약하고 작아 보이는 제시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