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부 뒤바뀐 운명과 10년 전 그 약속
동우가 이 문을 나선지 15분이라는 시간이 흘려갔고
제시카는 결국 불안감과 초조함을 못 이겨 동우와의 약속을 깨고서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동우가 사라진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부서진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들어난 시뻘겋게 녹슨 철근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은
불길한 예감에 불을 지피듯 제시카를 더욱 옥죄어갔다.
제시카는 벽을 더듬어 가며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발을 옮겨갔다.
점점 그 어둠과 공포라는 기분 나쁜 것들에 익숙해 질 무렵
2층에서 들려오는 동우의 비명소리에 제시카는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동우의 목소리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공사장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최종목적지는 제시카 곁인 듯 보였다.
제시카의 주위를 에워싸듯 맴도는 동우의 비명소리는 제시카의 등을 떠밀 듯
제시카를 재촉했고 제시카는 동우의 목소리가 인도하는 그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이번에는 경민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제시카는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제시카는 그 소리가 자신의 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2층에 올라서자 확 트인 공간으로 인해
1층보다는 달빛이 더욱 많이 스며들어 한결 사방을 확인하기는 편했다.
주위를 둘려보자 한쪽 구석 기둥에 2명의 남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두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은 상반되어 있었다.
체격으로 보아 동우라고 생각되는 남자는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동우의 몸은 기둥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동우의 얼굴은 경민의 어깨에 맞닿아 있었다.
이와 반대로 경민은 동우의 몸 쪽으로 바짝 붙어 있었고
한쪽 손은 동우를 잡고 있는 듯했고 다른 한 손은 동우의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손을 타고 알 수 없는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경민이 손을 떼자 들고 있는 물체가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곧 칼이라는 것을 안 제시카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후덜후덜 떨렸다.
신체 건장한 남자라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아마 주저 했을 것이었다.
하물며 여리고 여린 제시카이기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수많은 생각들이
제시카의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듯 제시카를 괴롭혔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 칼이 동우의 살을 찢고 파고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이윽고 고통에 가득 찬 동우의 얼굴을 보자
제시카의 복잡했었던 머리 속은 정리가 되는 듯 했다.
제시카는 동우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에 자신의 근처를 더듬으며 손에 잡히는 데로
묵직한 벽돌을 들고서는 무작정 경민에게로 달려들었다.
주위의 도움을 전혀 얻지 못하는 이 순간
제시카의 행동은 정말 무모하고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었지만
경민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데는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경민의 그 사이코패스적인 성향 때문인지 경민은 동우를 찌르는 쾌감에 젖어
미처 제시카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고
제시카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여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경민은 황급하게 동우의 아래쪽에 박혀있었던 칼을 빼내어
제시카에게 향하였고 동우 역시 경민과 비슷한 순간에
제시카가 경민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우는 제시카의 향하고 있는 그 칼이 유독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동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제시카에게 향해있는
날이 잘 선 그 칼날을 맨손으로 잡아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 앞에 서 있는 경민이
제시카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안아버렸다.
동우는 손 마디 마디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칼날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아랫배에 생겨진 상처들이 벌어져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들이 밀려 왔지만
제시카가 저 칼에 찔려 자신과 똑 같은 이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우는 칼날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오직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지켜 주고픈 한 소녀 때문에...
그 제시카를 구하기 위해 동우는 이를 악물고서는 더욱더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움켜 쥐었다.
그러자 은색빛깔이 강하게 띄는 칼은 동우의 손에서 흘려 나오는 피로
이제는 완전히 시뻘겋게 물들어 버렸다.
동우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해 적지 않게 당황한 경민에게
동우의 갑작스러운 이 돌발행동은 경민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모든 것은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루어 졌고
결국 경민은 제시카에 의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차디찬 바닥으로 쓰려졌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한 무모한 행동들이었지만
경민에게 통했던 것이었다. 결국 서로를 위한 마음이 모여 동우와 경민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경민이 쓰러지자 동우도 역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동우는 제시카를 쳐다보며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시카야, 너 괜찮은 거지?”
제시카는 동우를 끌어 안으며 소리쳤다.
“이 상황에서 그 말이 나오냐고!!
이런 바보! 멍충이! 칼을 맨손으로 잡는 사람이 어디 있어.. 흑흑흑”
“너도 바보 같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동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제 누구에게나 허락되어있는 숨 쉬는 것조차 동우에게는 힘들어 보였다.
제시카가 무사한 것을 알고서는 마음이 놓이는지
동우는 제시카의 품 안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제시카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동우의 체온이 느껴졌다.
마치 차디찬 공기와 동화되어가듯이 동우의 체온은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제시카는 동우가 추위하지 않게 동우의 얼굴을 부둥켜 안으며
더욱더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제시카는 차 안에서 해맑게 웃으며 자신에게 친구가 되자며
악수를 청해오던 동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시카는 동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먹이면서 말하였다.
“바보...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착해빠져서 받아주기만 하고...
만약 너 이대로 떠나가 버리면 내가 영원히 너 저주할거야...흑흑흑..”
멈추지 않는 눈물들이 제시카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방울 하나 하나마다 동우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고
그 눈물방울들이 제시카의 뺨을 타고 내려와 떨어져 동우의 얼굴에 부딪혀 터질 때마다
마치 동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듯 보였다.
제시카의 간절한 바람 때문일까 동우는 미약하게나마 계속 심장이 뛰고 있었다.
제시카는 그 순간 용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시카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고
떨리는 손으로 용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마침 병원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용준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고 휴대폰에 찍힌 번호를 보는 순간 멈칫거렸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 그것도 자신에게 한번도 전화가 오지 않았던
제시카의 번호가 뜨자 용준은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제시카의 울먹이는 소리와
곧바로 이어지는 제시카의 믿지 못할 한마디에 용준은 아직까지 꿈을 꾸는 듯 했다
“흑흑흑 동우가 죽어가요 어떡해요...제발 빨리 와주세요.”
“그게 뭔 소리야? 동우가 죽어간다니”
제시카는 용준에게 지금의 상황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용준은 울먹이는 제시카의 목소리 때문에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동우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용준은 일단 제시카를 진정 시켰다.
“시카야, 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동우가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 알았지?
내 말 잘 듣고 따라 해”
그리고는 지혈을 비롯해 응급처치요령까지 제시카에게 차분히 알려주었다.
지하에 있는 응급실로 내려가는 동안 제시카와의 통화는 계속되었고
지하에 도착한 용준은 당직을 쓰고 있는 간호사에게 다급하게 엠블런스를 찾았다.
“어떡하죠 선생님, 지금 엠블런스는 밖에 나가 있는데
한...십여 분 뒤에 올 거예요”
용준에게 있어 십 여분은 시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용준은 간호사에게 동우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며
엠블런스가 도착하면 바로 그 쪽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한 뒤
병원에서 다리가 불편한 자신에게 마련해준 차를 타고서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 시간 소녀들의 숙소 안에서는
태연과 써니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태연은 거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써니가 도착한 후에 동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동우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라도 따라 갔어야 했는데
오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며 어떡해 써니야”
“괜찮을 거야
그냥 어디 사는지 확인만 한다고 그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그렇게 태연을 안심시키는 써니였지만 자신 역시 동우가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돌아오면 이제는 절대 혼자 있게 하지 않을 거야...”
태연은 동우를 생각하며 무사히 돌아오길 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한산한 새벽시간에 도로를 질주하는 한 대의 차가 있었고
용준의 다급한 마음을 반영하듯 요란하게 경적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용준은 동우의 자세한 상태를 모르기에 더욱 불안했다.
용준은 다급한 마음에 평상시 잘 하지 않는 욕들이 나왔다.
“시발 왜 이렇게 안 나가는 거야”
차는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용준이에게는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용준은 괜히 핸들을 치면 차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가는 내내 가드레일을 박을 뻔도 했었고 몇 번의 사고위기도 있었지만
용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일로 속도를 늦추는 일이 없었다.
오직 하나, 동우에게 빨리 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제시카가 말한 장소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제시카는 동우를 꼭 껴안고 있었고
이미 차가운 공기와 칠흑 같은 어둠도 두 사람에게는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오직 두 사람만이 이 공간 속에 따로 떨어져 나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제시카는 용준을 보자 이제서야 환한 웃음을 보였다.
이미 제시카의 얼굴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위가 퉁퉁 부어 있었다.
용준이 가까이 다가가자 다른 한 사람이 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용준은 일단 동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위급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의외로 침착하게 대응한 제시카의 응급처치 때문인지
아직 희망이 있었다.
오히려 동우보다 더 위급해 보이는 것은 바닥에 쓰려져 있는 경민의 모습이었다.
용준은 경민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 용준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이미 경민은 숨져있었다.
제시카는 그제서야 쓰러져있는 경민이 생각났다.
그 동안 동우 걱정에 경민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오빠,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거예요?”
“어..그게... 머리에 충격이 가서 잠시 기절한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용준은 진실을 말 할 수가 없었다.
용준은 제시카의 시선을 경민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길 수 있도록 제시카를 불렸다.
“시카야, 나 믿지?
동우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꼭 살린다.
그러니까 넌 이제 숙소로 돌아가”
용준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제시카였다.
동우가 자신의 앞에 쓰려져 있는데 어떻게 해서 발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제시카는 용준이의 말에도 꼼작하지 않았다.
용준은 다급했다. 이제 곧 엠블런스가 도착할 것이고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었다.
용준은 제시카에게 소리쳤다.
“너 내일 아침 신문 1면에 대문 짝하게 나오길 바라는 거야?
그게 정말 동우와 다른 멤버들을 위한 일이냐고!!
내 말 잘 들어!! 너 운전할 줄 알지 동우 차로 해서 곧장 숙소로 돌아가
그리고 넌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고
이 자리에 없던 사람이야 알아들었지”
용준이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자신이 여기 계속 있는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제시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동우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 부탁해요..제발...”
“걱정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면 그 피 묻은 옷부터 태워버려”
제시카는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아래위로 연신 끄덕였다.
제시카가 떠난 후 용준은 죽어있는 경민의 모습을 보자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용준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용준은 깊게 숨을 들여 마신 후 무엇인가 결심을 한 듯 비장한 모습을 보였다.
용준은 결국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시체를 숨기기로 마음 먹었다.
만약 일이 잘못 되어 모든 것이 밝혀진다면 자신이 모든 범행을 뒤집어 쓰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범행에는 살인까지도 포함되어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용준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울분이 솟구쳐 오르면서
효연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발...나도 이제 사랑이라는 행복한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용준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용준이에게 있어 동우는 평생을 함께 할 유일한 친구요
무슨 일이 생기든 자신을 보듬어주던 부모요
자신이 나쁜 길에 빠지려 할 때마다 올바른 길을 갈수 있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선생과도 같은 존재였다.
용준은 그런 동우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용준은 동우가 경민과의 싸움 끝에 경민을 죽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우정이라는 이름 하에...
오직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걸 알고 있는 용준이지만 결국 동우를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이 안고 가려고 마음먹었다.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나에게는 사치였나 봐..
미안해 효연아...동우에게는 큰 빚이 있거든...
어쩌면 널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어’
용준은 10년 전 동우와 함께 바닥에 누워 별을 보면서 한 자신이 맹세가 떠 올랐다.
동우를 위해서라면 남은 두 팔 아니 자신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다는 그 맹세...
‘이제서야..겨우 그 맹세를 지킬 수가 있게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