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부 운명의 갈림길
제시카가 문 밖에서 듣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써니는 경민이 자신에게 기자라고 속이고 접근하였던 이야기부터 풀어 놓기 시작했다.
한달 전..
써니는 경민에 끈질긴 부탁에 결국 인터뷰를 허락해 주었고
한쪽 구석에 놓여진 커피자판기 앞으로 경민을 따라갔다.
경민은 우선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한 다음
미리 준비해 온 몇 장의 사진들을 써니 앞으로 건네주었다
써니는 그 사진들을 보는 순간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걸 저한테 보여주는 목적이 뭐죠
돈을 원하는 건가요?”
“이봐 조용히 이야기하라고 다른 사람이 듣게 된다면 서로가 곤란해 지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그깟 돈 때문에 널 찾아왔겠나”
써니는 자신에게 악의적으로 접근한 경민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내가 말했잖아 기자라고 크크크
어때? 신입기자치고는 엄청난 특종을 물었지 않나
그리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우리는 이미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경민은 써니의 입술을 만지며 써니에게 점점 다가섰다.
“이 보드라운 입술로 내 껄 맛나게 빨아주었는데 기억 못하겠어 크크크”
그 순간 써니는 왠지 익숙한 음성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제서야 지하실 안에서 자신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써니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손에 쥐고 있던 사진들이 바닥으로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경민의 올가미에 걸려 매주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일들 역시
동우와 태연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지
써니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이후는 오빠가 보신대로 그대로예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던 태연은 써니를 꼭 안아주면
써니의 등뒤를 토닥거려주었다.
써니의 이야기를 듣던 동우 역시 너무나 화가 났다.
어금니를 꽉 깨문 입술은 굳게 닫혀져 있었고
주먹을 꽉 쥔 두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기 친동생이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러 올랐다.
그리고 그런 모진 일을 겪고 울고 있는 써니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왔고
한편으로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었던 납치를 자신이 저질렸기에
동우는 죄책감에 써니를 제대로 쳐다 볼 수도 없었다.
"미안해 써니야..
니가 그런 일을 겪는 되도 눈치 채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나 때문에 그런 끔직한 일을 겪게 된 것도 미안하고
모든 것이 다 미안해.."
동우는 자기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런 동우에게 써니는 조용히 다가가 동우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아니에요 오빠
제가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오빠가 알았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오빠랑 태연이에게 이야기하니까
저도 한결 나아지는 걸요 너무 미안해 하지 마세요"
동우는 어떻게 해서라도 써니를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경민은 어떻게 처리 한다고 치더라도
그 사진을 없애지 않은 한 소녀들을 위협 할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어
언제 또 다시 소녀들을 위협할지 몰랐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사진을 없앰으로써
소녀들을 영원히 그 올가미에서 구해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동우는 생각했다.
그 불씨를 끈 후에 경민에게 복수를 해도 늦지 않은 것이었다.
"써니야 혹시 그 놈이 어디 사는지 아니?"
"아뇨. 그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 말고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만나기 2-3일전에 공중전화로 만날 장소만 알려주고
전 그 장소로 나갈 뿐이에요"
그렇게 세 사람의 대화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하지만 딱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소득 없이 시간만 흘려 갔고
다른 소녀들이 깨기 전에 숙소를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에
동우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그 놈을 만날 때까지 아직 일주일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보자
세 명이서 머리를 맞대면 분명 좋은 방법이 떠 오를 거야"
그런 말을 하고 방을 나서는 동우였지만 마음이 무거운지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동우는 마지막으로 써니에게 다시 한번 힘을 내라는 말과 함께 숙소를 빠져나갔다.
문 밖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제시카는 동우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다 뒤집어 쓰고서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자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그 일 이후로 슬픔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 벽을 쳐 강한 척 도도한 척했던 제시카였지만
오늘 다시 경민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자 자신을 감싸주었던 그 벽이 허물어지면서
그 일 이후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시카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영아...흑흑흑’
얼굴을 타고 내려온 제시카의 눈물이 베개 위를 흠뻑 적시고 있었고
오늘따라 어릴 적 단짝 친구였던 지영이가 더욱 보고 싶은 날이었다.
집에 도착한 동우는 꼬박 밤을 지새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착잡한지 이리저리 방 안을 돌아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내일을 위해 마음을 다 잡은 후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기로 하였지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자연스럽게 공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지만 계속해서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경민이 자신에게 이야기한 말도 무수히 되풀이 되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4월 3일이라.. 3일이면 시카 생일 전날이잖아
그때 하루 종일 얘들이랑 나랑 같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지’
동우는 그 날 일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윤아! 윤아가 드라마 촬영 때문에 오후에 혼자 빠져나갔지’
동우는 그날 밤늦게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난 뒤
새벽에 윤아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윤아의 행동들은 이상한 점 투성이였다.
‘설마 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안되겠어..확인해 봐야겠어’
동우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5시라서 그런지 민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2-3번 더 전화를 하여서야 겨우 민호와 통화가 이루어졌다
“형, 제시카 생일 전날에 윤아를 데리고 숙소로 온 매니저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렵지는 않아
회사에 들어가서 서류 좀 찾아보면 누가 데리러 갔는지 알 수 있어
근데 왜 급한 일이야?”
“형, 저한테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 매니저가 누군지 알게 되면 윤아가 정확히 언제 마쳤고
언제 숙소에 도착했는지도 물어봐 주세요
오늘 스케줄은 제가 책임지고 다 할 테니까
형은 오늘 회사에 들어가서 윤아에 대한 일 좀 알아봐 주세요"
동우는 확실히 않은 윤아의 일은 민호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단 써니의 일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민호를 대신해 이리저리 바쁘게 이동 하던 동우에게
저녁 늦게 가 되어서야 민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 동훈이 알지 키 조그만 한 애
서류상에는 그 애가 윤아를 데려다 주기로 되어있더라고
근데 그게 이상한 게 동훈이한테 연락을 해 봤더니 자기는 그런 연락을 못 받았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상하긴 한데 원래 너도 알다시피 서류란 게 형식적이잖아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하기는 해”
동우는 민호를 이야기를 듣자 더욱더 불길한 느낌이 엄습하였다.
“그래도 도저히 불안해서 안되겠어요 형이 수고 좀 더 해주세요
내일 방송국 드라마 국에 가서 그날 윤아 드라마촬영스케줄을
다시 한번 꼼꼼히 체크해 주세요.
부탁 드려요 형”
민호와의 통화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써니가 다급하게 동우를 찾아왔다.
"어떡해요 오빠
내일 밤에 만나자고 그 사람한테 전화가 왔어요"
"원래 다음주에 만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내일이라니"
만약 내일 써니가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진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고
그렇다고 섣불리 경민을 건드렸다가는 경민을 자극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노릇이었다.
동우는 윤아의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당장 써니의 일까지 내일로 닥쳐오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써니야, 딱히 방법이 없는 거 같아
어쩔 수 없어 이렇게라도 하자"
동우는 급하게 떠오른 자신의 계획을 써니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다음날..
써니는 아무도 못 알아채게 중무장을 한 채 숙소 근처에서 동우와 같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택시를 타는 써니에게 동우는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상세히 일러주었다.
동우의 계획은 바로 이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 급하게 지방 스케줄이 잡혀 지금 곧 출발을 해야 하고
만약 안 나가게 되면 일부러 안 온 걸로 오해를 할까 봐 걱정이 되고
그렇다고 다시 연락할 방법이 없어 억지로 시간을 미루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라고
경민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경민이 써니를 보내지 않고 잡고 있는다면
다른 소녀들이 써니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고 그럼 일이 커지면 때문에 그런 상황이 오면
경민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어 그냥 써니를 보내줄 것이라고 판단을 한 것이었다.
동우는 경민이 써니의 말을 믿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고
써니가 떠난 후 경민의 뒤를 미행해 사는 곳을 알아 낸 후
경민이 집을 비운 사이를 이용하여 그 사진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도 만약 경민이 써니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다시 경민에게 달려들기로 하였다.
동우는 자신이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써니를 먼저 택시를 태우고 출발을 시켰고
동우 역시 자신의 차를 타고서 써니 뒤를 따라가기로 하였다.
한편 제시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근처에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제시카는 확인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사람과
지금 한 가족과 같은 써니를 괴롭히는 경민이라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정말 같은 사람이라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그래도 알고 싶어..’
제시카는 동우가 출발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뛰어들어갔다.
동우의 차 앞을 막은 후 차가 서자 막무가내로 안으로 타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시카에 등장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우에게 제시카는
“나도 알 건 다 안다고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
그러다가 써니 놓치면 어떻게 하려고 해”
동우는 제시카가 어떻게 써니의 일을 알게 되었는지 의아했지만
제시카의 고집을 알기에 동우는 더 이상 제시카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더 끌다가는 정말 써니가 탄 택시를 놓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동우는 결국
제시카의 동승을 허락하였다.
“너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이 차 안에서 나오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 빨리 가기나 해"
동우는 제시카의 확답을 듣고서는 차를 출발시켰다.
다행이 이번 경민과의 약속장소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써니가 탄 택시는 곧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원 앞에 멈추어 섰다.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경민의 능력에 동우는 혀를 내둘렀다.
동우도 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멈추어 세웠다.
이윽고 써니는 동우가 온 것을 확인하고서는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경민은 공원 안에 와 있었고 둘은 금방 마주서게 되었다.
동우는 써니가 공원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지켜보고있었다.
제시카는 경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자 동우에게 다그쳤다.
“동우야, 앞으로 조금만 더 가 봐”
동우는 경민에게 들킬 것을 생각해 제시카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 동우의 마음도 모른 채 제시카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은근히 동우를 협박하였다.
“그럼 나 내려서 보고 올까?”
동우는 어쩔 수 없이 점점 가까이 경민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최대한 경민이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 차를 세웠고
“더 이상은 안돼 시카야”
그러자 제시카는 목을 한껏 빼고서는 앞을 내려다 보았다.
서서히 경민의 얼굴을 보이기 시작하자 제시카의 얼굴은 굳어갔다.
많은 시간이 흘렸지만 아직도 뚜렷이 각인되어있던 몇 년 전 경민의 모습이
지금 바로 써니 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제시카는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우는 뚫어져라 경민의 모습을 쳐다보는 제시카의 행동이 이상했다.
“왜 그래 시카야 아는 사람이야?”
“몰라..저 놈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제시카는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 시간 공원 안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써니는 동우가 가르쳐 준 대로 경민에게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써니는 긴장감에 목소리는 떨렸고 평소와 다른 써니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던 경민은 써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자동차가
한쪽 모퉁이에 주차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제시카의 무리한 부탁으로 인해 너무 가까이 붙었기 때문에
경민의 눈에도 띄었던 것이었다.
‘이제 보니 꼬리를 달고 왔군 크크크’
경민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써니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물이며
써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역시 가슴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크크크
그리고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우리 써니양이 바쁘다는데 내가 잡아놓을 수 있나
이번에는 봐 줄 테니까 그냥 숙소로 돌아가라고 크크크
아니지 내가 숙소까지 데려다 줄까?”
“아니요 전 아까 타고 온 택시를 타면 되요”
써니는 의외로 일이 잘 풀리자 기분이 이상했지만
경민이 보내 준다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써니는 곧장 공원을 빠져나가 동우에게 싸인을 보낸 후
조금 전 자신을 태운 택시에 전화를 걸어 다시 타고서는
공원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초조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동우와 제시카도
써니가 공원 안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자 안심이 놓이는지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우는 써니가 무사히 택시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확인 한 다음
“시카야, 지금 써니한테 전화해서 너도 써니랑 같이 숙소로 돌아가”
“싫어, 너 따라 갈 거야”
역시나 꼼작하지 않은 제시카였다.
동우는 제시카의 고집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우는 내심 옆에 앉아있는 제시카가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동우는 경민이 떠나는 모습을 확인하고서는 경민의 뒤를 밞기 시작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모든 것은 동우의 손에 달려있었다.
동우는 혼잡한 도로를 달리며 차들 사이에 끼여 경민의 차를 뒤쫓았다.
하지만 경민의 차가 시내를 빠져나가 한적한 외곽도로로 나가면서
동우의 차를 숨겨주었던 주위를 차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동우와 경민의 차만이 좁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
두 대의 차는 목적지도 모른 채 방황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동우의 이마에는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고
그 땀방울들이 모여 얼굴 옆 선을 따라 흘려 내렸다.
제시카도 긴장감에 숨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와는 반대로 경민의 차 안은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경민은 음악을 들으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고 백미러를 보며서
동우가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일정한 속도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더니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았는지
경민은 핸들을 꺾으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동우도 역시 시간 간격을 두고 서 경민이 들어선 곳으로 따라 들어섰다.
그곳은 공사가 중지된 지 오래되어 보이는 한 아파트 공사장이었다.
폐허로 변한 공사장은 경민의 속마음을 반영하듯
그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동우는 경민이 눈치 채지 못하게 구석진 곳에 주차 시킨 후 안전벨트를 풀고서는
마지막으로 내리기 전에 제시카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였다.
“시카야 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오지마 알았지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마 안을 확인만 하고 올 테니까
별 일 없을 거야”
제시카는 차문을 나서는 동우를 불려 세웠다.
“동우야!”
제시카는 동우의 뒷모습을 보자 왠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자 제시카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왔던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몸조심해 동우야..
난 니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어쩌면 나...너 좋아하고 있나 봐..]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제시카는 하지 못했다.
“조심해..”
결국 제시카는 짧은 한마디만을 남겼다.
“싱겁기는 나 갔다 올게
넌 절대 나오지마 알았지”
마지막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를 지어 보이던 동우는 그렇게 제시카에게 멀어졌다.
차 안에 홀로 남겨진 제시카는 휴대폰 시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우가 들어간 지 15분이라는 시간이 흘렸고
제시카에게 있어 동우를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처럼
초조하며 불안했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미치겠네.."
제시카는 도저히 초조함에 못 이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제시카 역시 동우가 사라진 그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부셔진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들어난 시뻘겋게 녹슨 철근마저도
음산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제시카는 한발 한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점점 어둠에 적응할 때쯤 위층에서 고통에 가득 찬 동우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제시카는 미친 듯이 뛰어 2층으로 올라갔다.
15분전..
차에서 내린 동우는 제시카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공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발자국소리를 죽인 채 벽으로 몸을 밀착시켜 후 안에 들어서자
휑하니 기둥들만이 동우를 맞아주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노숙을 하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러 온 걸까’
동우는 경민이 이곳에 온 이유가 꺼림직했지만 동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민이 가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따라가야 하는 것이 동우의 길이었다.
그 순간 2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2층에서 난 소리였지만 동우는 순간 당황하여 기둥에 숨어버릴 정도로
긴장감에 가득 차 있었고 심장은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동우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려본 뒤 멀리 보이는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따라 그 짧은 거리가 길게 느껴졌다.
동우는 침을 한번 삼키고 진정을 시키고 난 뒤에야 다시 계단 위를 천천히 올라갔다.
최대한 몸을 낮추어 2층에 올라선 동우는 고개만 내민 채 쭉 한번 둘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기둥들만 보일 뿐 경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소리가 났는데’
동우는 넓은 공사장 안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서 꼼꼼히 둘려보기 시작했다.
폐자재들과 쓰레기들만 공사장 안에 널려있을 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2층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동우는 긴장감이 풀려졌고
이제 3층으로 올라가봐야겠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동우를
낚아채는 것이었다.
동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목 부분에 느껴지는 차가운 물체가
칼이라는 것을 동우는 느낄 수 있었다. 동우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내 눈에 띄면 죽을 거라고”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경민의 목소리는 동우에게 있어 더욱 공포스럽게 들려왔다.
“이 칼을 너 같은 애송이에게 쓸 줄을 꿈에도 몰랐는걸 크크크”
예전 이수만을 향해 복수를 다짐했던 날이 잘 선 그 칼이었다.
경민은 그 칼을 한번 보더니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5번 찔리고서도 살아남은 자신의 영웅담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동우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어때 너도 궁금하지 않아?
이 칼에 5번 찔리고도 살아 날 수 있을지 말이야 크크크”
경민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동우의 귓가에 맴돌았고 온 몸에는 소름이 돋는 듯 했다.
푸~욱
그 소리와 동시에 동우의 옆구리에는 은색 빛깔이 선명한 칼이 반쯤 들어가 있었고
칼 손잡이와 경민의 손을 타고 동우의 피가 흘려 내려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으~악~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아픔이 자신의 옆구리에서 느껴졌고
동우의 비명소리가 공사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미 얼굴은 잔뜩 찡그려졌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마치 상처부위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피들이 쏟아져 나갈 꺼 같았다.
경민은 동우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지 연신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그 날카롭고 차가운 칼이
동우의 살을 찢고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공사장 안에 울려 퍼졌고
동우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래? 아직 3번이나 남았다고 크크크"
동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그 극심한 고통을 잊을 버릴 만큼 동우는 이미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였다.
상처부위로 흘려나가는 피와 함께
동우를 지탱해주고 있던 한 줄기 희망도 같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동우는 점점 눈이 감겨왔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서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해 사랑스럽게 윙크를 해주는 태연이의 모습과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해 줄 거 같은 윤아의 아름다운 미소,
그리고 항상 자신 걱정뿐인 여리고 여린 울보 서현이까지
지금 이순간 가장 보고 싶은 얼굴들이 동우의 눈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9주간 1등을 했을 때 무대 중앙에서 빛나 보였던 소녀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눈물들,
태연이와 서현이랑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함께 본 저녁노을에 빠져버린 아름다운 시내의 풍경들,
그리고 차 안에서의 윤아와 나누었던 수줍은 첫 키스의 짜릿한 느낌들까지
아련하게 떠오르던 추억들까지도 역시 동우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 얘들아...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해서...
더 이상 사랑해 주지 못해서...
더 이상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그 순간 동우는 제시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우는 그 순간에도 차 안에 홀로 앉아 있을 제시카가 걱정이 되었다.
‘이 놈이 눈치채지 못 해야 하는데’
제시카의 걱정에 천천히 눈을 뜨는 동우에게 흐릿하게나마
어떤 소녀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금발의 그 소녀는 바로 제시카였다.
동우는 순간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아래쪽에 박혀있었던 그 차가운 칼이
이제는 제시카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동우는 절규하기 시작했다.
“안돼 시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