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08-성장 =========================================================================
거래는 무산되었고 당연히 황제가 이를 아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래서 결국 설득이 실패했다는 말이냐?”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말은 죽여달라지만 설마 딸을 죽일까? 그러나 죄를 청하며 고개를 숙인 페르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로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은 완전히 날아갔다. 원래 없던 것이기도 했지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흐음.. 자카르 공작. 혹시나 했던 일이 벌어졌구려.”
응? 페르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좀 이상했다. 마치 이번 일을 예견이라고 했던 것 같지 않은가?
“당연한 일입니다. 제멋대로인 드라이어드가 신의라든가 상도의 따위를 알리 없지 않습니까?”
뭔가 지독한 편견에 의한 견해였지만 페르샤에게 나쁜 일은 없었다.
자카르 공작이 말을 이었다.
“이 기회에 검은 가시 덩굴의 마녀를 제국에서 확보해야 합니다.”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그녀를 잡는다는 말입니까!?”
페르샤는 자카르 공작의 주장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검은 가시 덩굴의 마녀와 붉은 마녀의 위력을 직접 접한 그녀에게 자카르 공작의 주장은 무리수였다.
“황녀는 조용히 하라. 이미 오늘같은 날을 대비해 중급 이상 되는 1000명의 소드 익스퍼트를 준비해 놓았느니라.”
천 명의 소드 익스퍼트라는 말에 페르샤가 기겁했다. 설마 제국 전역에서 긁어모은 것인가? 국가 방위는 어떻게 하고?
페르샤의 표정에 서린 의문과 걱정 탓인지 황제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라. 빠진 자리는 마나 각성의 열매를 먹인 기대주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검술에 대한 재능, 마법 이론에 뛰어난 인재는 많았다. 고급 교육으로 귀족가에는 그런 인재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마나의 재능만은 교육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 인재들에게 마나 각성의 열매가 들어갔고 기대주들은 만족 이상의 성과를 내며 빠르게 성장했다. 이대로라면 수 십의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를 보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피해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상처없는 승리는 없다. 물론 상처뿐인 승리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판테온에 지원을 요청했다. 10명의 대주교와 5명의 성녀를 보내준다고 하더군. 마탑에서도 5명의 4서클 마도사와 3명의 5서클 마도사를 보내준다고 했다.”
엄청난 전력이다. 페르샤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나 각성의 열매는 더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페르샤.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이자 검은 가시 덩굴의 마녀와 한 번 겨뤄봤던 너라면 1000명의 소드 익스퍼트와 대주교들, 그리고 고위 마도사들이라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근엄하게 외쳤다.
“황녀여! 승리하여 저 무도하고 오만한 검은 가시 덩굴의 마녀를 잡아 내 정원에 심어라!”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페르샤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되어 있었다.
황녀의 별궁으로 돌아가는 페르샤를 비르나가 수행했다.
“미안하군. 넌 남아도 됐을텐데..”
페르샤는 비르나에게 미안했다. 거래 중지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고 문제 역시 자신에게만 있었다. 비르나는 남아서 쌓인 욕구를 풀수 있었지만 그녀는 의리와 남자 사이에서 의리를 선택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응? 뭐가?”
“이번 기회에 그 인간 옆에 붙은 다른 암컷들을 제거하고 우리가 독점해요.”
“뭐?”
페르샤의 귀가 솔깃했다.
“후후. 그동안 깔렸던 만큼 깔아 뭉개 주겠어요.”
비르나의 장담에 페르샤의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의리를 택한 비르나는 그 반대 급부로 부풀어 오른 성욕으로 가학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페르샤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둘은 승리를 확신하며 전리품(준)을 어떻게 괴롭혀 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둘은 비록 최준의 밑에 깔려 헉헉 댄 여자였지만 인간 세계의 기득권이자 권력층이기도 했다. 그런 둘에게 최준의 신변이 들어간다면.. 흠.. 일단 후장부터 시작할까?
상상의 나래를 피며 최준을 어떻게 괴롭혀 줄까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잠에 빠져든 페르샤의 머리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연가시 같이 징그럽게 기어 나온 그것은 벽을 타고 창가에 올라가더니 창틈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뭉쳤다.
다시 동그란 검은 색 덩어리에서 벌레의 날개가 돋아났다. 이젠 동그란 덩어리가 웨엥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라 총알처럼 빠르게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 방향은 드라이어드의 숲쪽이었다.
= = = = =
2차 마나 각성 열매 원정대가 드라이어드 숲의 경계에 집결했다. 당연히 지휘관은 페르샤였다. 황실이 승리를 주도했다는 정치적인 이유와 검은 가시 덩굴이 마녀 그리고 붉은 마녀와 싸워본 경험이 버무려진 이유 때문이었다.
“부탁합니다.”
페르샤의 부탁에 마탑에서 나온 마도사들이 지팡이를 들었다. 그 중에는 비르나도 있었다.
“파이어 웨이브!”
긴 영창 끝에 시전된 주문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마법진이 대기의 마나와 공명하며 성질을 바꾸었고 붉은 열기가 부채꼴이 되어 전방으로 퍼져나갔다. 숲이 순식간에 불타고 나무는 숯검댕이 되었다. 그나마 남은 건 숯덩이가 된 아름드리 나무. 그마저도 진군하는 군의 시야에 방해되어 발길질에 부서져 나갔다. 참 깔끔하게 잘 탔다.
페르샤의 작전은 과감했다. 나무가 빽빽해 움직이기 힘든 지형에는 쪽수의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리나를 유인할 겸 또한 전술적으로 유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전방의 숲을 다 태워버리면서 진행할 생각이었다.
10만의 군사를 갈아버린 마녀? 미안하지만 그 중에 오러 소드를 발휘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1000명의 소드 익스퍼트라면 20만을 썰어버릴 수 있었다. 오러 소드를 발현하는 기사에게 병졸 100을 썰어버리는 건 짚단베기만큼이나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위당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동료가 등을 지켜준다. 조직력을 갖추고 시간만 있다면 50만의 병력을 흩어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페르샤는 이 병력으로 가능한 전술을 떠올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황제와 제국이 왜 이런 투자를 하면서까지 마나 각성의 열매를 확보하려는 지도 알게 되었다. 만일 중소 국가가 이런 보물을 가지게 되어 1000명의 소드 익스퍼트 결사대를 만들면 황도를 포기해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엘프들이 귀중한 하이 엘프를 넘기면서까지 거래를 막으려고 든 이유이기도 했다.)
소드 오러가 나무를 베고 화염이 수풀을 태우며 충분한 공간을 만들며 천천히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숲이 탄 것에 광분한 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은 인간들! 10만 목숨의 교훈이 모자랐던가!?”
“검은 가시 덩굴의 마녀여! 얌전히 포박당한다면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페르샤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좆까!”
리나는 최준의 기억에서 배운 욕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페르샤가 이해할수는 없었다. 처음 듣는 욕설이고 그녀에게는 거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남자들만 어렴풋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세계의, 그것도 욕설의 다양함에서 세계 1위인 한국의 욕설이 이 세계에 알려진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공격! 마도사들은 즉시 제1격을 발동하라!”
페르샤는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어차피 리나가 얌전히 잡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시에 마도사들은 즉시 마법진을 전개했다. 대주교들이 마법진에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마기를 사용하는 리나를 완벽히 속박할 수 있는 신성 봉인 결계 마법진이었다.
“읏!”
리나는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가시 덩굴의 반응도 무척이나 느려졌다. 생각보다 매우 위협적이었다. 하긴 대주교 10명의 성력과 4서클 이상 마도사 8명의 마력은 아무리 몇백년 묵은 악명 높은 리나라고 할지라도 쉽게 벗어날리 만무했다.
“파이린!”
리나는 도움을 요청했다. 즉시 타지 않은 숲에서 붉은 인영이 마법진을 구성하는 마도사들과 주교에게 쏘아졌다. 파이린이었다.
[읏!]
하지만 그녀는 리나를 돕지 못했다. 페르샤를 비롯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열이 그녀 하나에게 달려들어 견제를 시작한 것이다.
느려진 리나의 덩굴은 남은 기사들이 처리했고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마법을 이용해 리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죽여!”
페르샤의 입에서 살벌한 명령이 튀어나왔다. 리나가 있으면 파이린은 필요없다. 파이린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포위된 상황에서 기동력은 의미없다.
작전이 제대로 먹히자 페르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그렇게 쉽게 패배한 이유는 저 붉은 마녀 때문이었다. 최상급인 자신이 그녀를 견제했다면 원정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신성력이 검은 가시 덩굴의 마녀에게 매우 주효했기 때문에 리나는 마법사와 성직자로 상대하고 그런 마법사와 성직자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파이린을 기사로 대응한다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다.
“이, 이것들이!”
소드 익스퍼트 중 타격대 임무를 맡은 부대가 뻗어오는 덩굴을 베면서 점차 리나에게 가까워졌다. 팔이라도 한 짝 날아가면 그대로 잡혀갈 위기다.
그러나.. 리나가 겨우 이정도에 GG칠 드라이어드던가?
“앗!”
“땅속에서!”
마도사들 발목에서 덩굴이 솟아올랐다. 기사들이 급히 달려들어 마도사들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화산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덩굴을 다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녀들이여!”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 페르샤는 회심의 한 수를 내놨다. 검은 가시 덩굴은 마기를 머금은 마계의 식물. 성녀들이 함께 내뿜는 강력한 성력에 뻗뻗하게 굳어버릴 것이다. 이런 경우를 위해 성녀를 후방에 위치 시킨 것이다.
“““여신이시여!”””
성녀들이 두 손을 모았다. 성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앗!”
페르샤는 눈을 부릅뜰 정도로 놀랐다. 눈이 부실 정도로 뿜어지는 성력에도 검은 가시 덩굴의 움직임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급기야는 마도사와 대주교들이 있던 자리가 무너졌고 불의의 사태에 모두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마도사들과 대주교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시커먼 구멍만이 뽕뽕 남았다.
그렇게 신성 봉인 결계 마법진은 무력화되었고 전장에 리나의 높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오호호호홋! 너희들이 땅굴을 알어?”
그렇다. 불리했던 전황을 일발 역전시킨 것은 바로 북괴가 남침을 위해 준비했다는 땅굴과 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질서의 정기가 주입된 덩굴이었다.
제국의 황궁에서부터 리나에게 돌아온 작은 생체 덩어리는 스파이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했고 그때부터 리나는 부지런히 땅굴을 파면서 대응 준비를 했다. 저들이 마법을 땅굴 바로 위가 아니라 좀 떨어진 곳에서 시전해서 그만큼 땅굴을 더 파느라 처음에는 좀 밀렸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후후. 준에게 서비스 좀 진하게 해줘야 겠는걸?”
최준의 기억속에는 잡다하지만 관점이 다양하며 쓸만한 지식들이 많았다. 본인은 역량이 모자라 그걸 어떻게 쓸지 알 수도 없었지만 리나는 달랐다. 페르샤의 머리칼에 집어넣은 스파이용 생체 단말로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했고 땅굴로 숲을 태우는 저들의 전술에 대항할 수 있었다. 설마 드라이어드가 땅굴을 파 놓았을 지 누가 알았겠는가?
============================ 작품 후기 ============================
그러고 보니 첫화를 제외하고 씬이 없는 화가 이번이 처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