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01-이계로 떨어지다. =========================================================================
최준은 인생이 지옥이냐 천국이냐는 결국에는 인연에 달려있다는 이치를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인간 사회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좋은 인연은 만들기는 어렵고 깨지기는 쉽다. 이미 엘레나라는 인연을 버리고 숲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최준을 찾는 것을 포기한 놀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무에서 나왔다. 나무는 그 속살의 공간을 두 사람에게 제공하고서도 상처하나 없었다. 드라이어드의 신비한 능력이었다.
“엘레나, 그런 괴물들이 많아요?”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이 숲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준이 혼자서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 많아요.]
“혹시 지금까지 내 옆에 줄곧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의 물음에 엘레나는 살짝 미소 지어 대답했다.
최준의 감동이 더 깊어졌다.
“하아.. 어디나 사는 게 쉽지는 않구나.”
이때까지 엘레나의 시중을 들으며 이계 진입 초기부터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겨왔던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준의 속 마음에는 최소한의 자기 보호 수단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무기가 필요한가요?]
“무기?”
최준은 생각했다. 무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안심이 된다. 그리고 무기란 남성성의 상징이자 과시의 수단이지 않은가?
[어떤 무기가 좋은가요? 창? 칼? 활?]
“총은 없겠지요?”
총이야 말로 별다른 훈련 없이도 사람에게 살상능력을 손쉽게 부여하는 무기지 않은가? 격투나 싸움에 별다른 소질이 없는 최준이라도 충분히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는 무기였다.
[직접 만들 수 있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최준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설계야 약간의 머리를 굴려보면 볼트 액션 정도는 조잡한 형태라도 만들어 볼 수 있겠지만 그에 필요한 금속 가공 기술이라든지 탄피와 탄약을 만드는 기술은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다행이 화약 제조에 관해서는 공대생이기에 유기물에 질산화 반응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폭탄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애로 사항이 꽃피는데 질산은 어떻게 만들 것이며 질산을 제조해 폭발물을 만든다고 해도 폭탄이기에 안전하게 사용할 방법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폭발물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유리 같은 각종 도구들을 구할 생각을 하면 머리가 빠듯해진다.
“혹시 인간 세상에서 그런 것들을 구할 수 있지는 않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특이한 약품들을 다루는 마법사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기는 할 거에요. 그러나 준이 그것을 구할 수 있을지는...]
그렇게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화약무기는 폐기. 결국 최준은 엘레나가 말한 세 가지 무기 중에 두 개를 정하기로 했다. 바로 창과 활이었다.
[거리가 중요하다라.. 합리적이네요.]
“그래야 좀 더 안전해지죠.”
검이란 물건은 원래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창은 그 기원이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사냥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들에게서 몸을 보호할 목적을 가진 최준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거리에 따른 안전을 생각하면 합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활 연습도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렇죠.”
활은 다루기 어렵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잘 다루면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가 된다. 그리고 괴물과 더 거리가 멀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안전해 진다.
[그럼 무기를 구하러 가요.]
“어디로요?”
[제 자매들에게요.]
= = = = =
드라이어드의 기원은 과거 신마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과거 신들과 마신들이 중간계를 두고 다툴 때 넘쳐흐르던 신력과 마력으로 인해서 중간계에 나왔던 정령들이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차원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했기에 정령계로 돌아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정령들은 줄어드는 정령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간계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령계의 정령이 적응한 종족은 크게 하이엘프와 페어리, 드라이어드로 나뉘어 졌는데 하이엘프는 완전히 물질계의 신체를 얻어 번성하기 시작했고 또 거주 지역에 따라서 그 지역의 속성력을 받아 우드 엘프, 데저트 엘프, 스노우 엘프 등으로 분화했다.
드라이어드는 가장 생명력이 길고 개체수가 많은 초목을 은신처로 삼은 정령들이 초목의 생명력에 영향을 받아 속성이 변해 버려서 탄생했고 최준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번성하기 위해서 휴먼 수컷의 정이 필요했다.
한편 페어리는 중간계에서 탄생하는 정령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에너지원은 동물들이 뿜어내는 사념이었다. 정령력을 사념으로 대체한 이 종족은 정령에 가장 가까운 근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사념을 에너지원으로 삼기에 능력은 일반적인 정령에 비해서 많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양한 감정만큼 다양한 페어리가 존재하는데 종족의 분화는 아니고 개체의 개성에 따라 분노의 페어리, 즐거움의 페어리, 색욕의 페어리 등 인간들이 이름 붙인 분류는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페어리들은 잡식성으로 어떤 감정의 사념을 좋아하는지는 순전히 개인 취향이었다.
아무튼 사념을 먹고 사는 이들이니만큼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에게 장난을 많이 치기로 유명한데 뜻밖의 상황이야 말로 강한 감정을 발산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언니라는 분도 무화과의 드라이어드에요?”
[그건 아니에요. 드라이어드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 초목의 속성을 따른답니다.]
“그럼 풀이나 잔디의 드라이어드도 있겠네요?”
[대부분 드라이어드 씨앗의 발아는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백 년이 넘게 걸리니까 대부분은 나무의 드라이어드가 됩니다.]
“그 언니 되시는 분은 어느 나무의 드라이어드신가요?”
[검은 가시 덩굴의 드라이어드랍니다.]
검은 가시 덩굴?
[과거 신마대전 때 마계에서 넘어온 식물이랍니다.]
검은 가시 덩굴. 아는 사람은 아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식물이다. 마계 출신의 식물답게 동물을 사냥해 양분을 보충하는 이 흉악한 식물은 처음에는 마계 쪽 군대에서 중간계의 군대에 사용하기 위한 대량 살상용 병기였다.
마족의 마법에 의해서 적진 한복판에서 순식간에 발아 성장해 주위의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날카로운 가시로 찔러 죽이고 피와 체액을 모두 빨아 마시는 검은 가시 덩굴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신마대전이 끝나고 마계와 신계의 문이 닫기자 부족한 마기로 인해서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흑마법사들이 이 식물에 주목했다. 흑마법사들은 신마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수많이 남아있는 몬스터, 마수, 괴물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검은 가시 덩굴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검은 가시 덩굴의 키메라 버전을 만들어 냈는데 일반적인 중간계의 식물과 특성이 섞이자 스스로 광합성을 하면서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장하고 발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마기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 검은 가시 덩굴은 마기를 가진 몬스터와 괴물들을 사냥했... 어야 했다.
키메라가 된 검은 가시 덩굴은 마수는 물론 인간들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휴먼 일족을 제외하고 오직 인간만.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나서 흑마법사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고 해도 약간의 마기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그 마기를 감지한 굶주린 검은 가시 덩굴이 인간을 공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애물단지가 된 검은 가시 덩굴은 곧 폐기가 되었으나 이 식물의 유용함을 알아챈 한 엘프가 몰래 씨앗을 챙겨 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씨앗을 엘프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 심기 시작했고 검은 가시 덩굴은 엘프 사냥을 위해 몰래 경계를 넘어오는 노예 사냥꾼들을 먹이 삼아 현재까지 살아남고 있었다.
“저, 저기. 가면 나도 잡아 먹히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드라이어드의 숙주가 된 검은 가시 덩굴은 완전히 통제를 받으니까요.]
드라이어드의 숲에 떨어진 검은 가시 덩굴은 어느 엘프가 실수로 떨어뜨린 씨앗에서 발아했다.
중간계의 미약한 마기에서도 꾸준히 생존하기 시작한 검은 가시 덩굴에 어느 날 드라이어드의 씨앗이 발아했고 검은 가시 덩굴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초목의 성장에 강력하게 간섭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와 검은 가시 덩굴의 궁합은 찰떡이었다. 검은 가시 덩굴은 성장에 필요한 마기를 씨앗을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드라이어드는 드라이어드를 노리는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드라이어드를 노리는 위협이라니요?”
최준을 깜짝 놀랐다. 드라이어드를 노리는 위협이란 엘레나를 노리는 위협이고 그것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아닌가?
[반정령체인 드라이어드의 정기는 마법사들이 탐을 내는 마법재료랍니다. 그래서 가끔 마법사들이 드라이어드의 숲에 침입해 드라이어드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는 어린 나무들을 캐어가거나 드라이어드를 봉인해 납치해 가기도 한답니다.]
최준의 얼굴이 심각해 졌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요?”
[사라진답니다. 정기가 사라진 드라이어드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
그 말은 죽는다는 소리였다. 엘레나가 죽는다? 최준의 머릿속이 분노와 혼란으로 가득찼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는 강하니까요. 왕국의 군대가 침입하지 않는 이상 이 드라이어드의 숲에서 드라이어드를 납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군대가 자주 침범하나요?”
[백년 전에 10만 정도를 숲에 밀어넣어 불을 지르다가 화난 언니의 양분이 되고 나서는 오지 않는 답니다. 그러니 그다지 걱정할 일은 없어요.]
“....”
그건 그거대로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10만명의 인간을 학살한 드라이어드라니.
[언니는 그 전투능력으로 인해서 이 숲의 파수꾼 역할을 맡고 있답니다. 덕분에 오크나 오우거처럼 숲을 훼손하는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지 못한 답니다.]
“그, 그렇군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희 언니는 정말로 마음이 착한 분이시랍니다. 다른 드라이어드를 도와 주는 걸 취미로 하세요. 결코 제 적합자에게 해코지를 하실 분은 아니랍니다.]
“그, 그렇군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최준이 딱 그랬다.
아무튼 두 사람은 숲 속을 걸어 나무들이 듬성 듬성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와중에 최준이 가늘고 검은 덩굴 줄기가 듬성듬성 바닥에 깔려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검은 가시 덩굴이랍니다.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의외로 엘레나가 거주하는 무화과 나무와 검은 가시 덩굴이 있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도보로 30분 정도?
그런데 최준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가시가 달린 검은 촉수가 한마리 놀을 갈가리 해체하는 장면이었다.
바닥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놀의 것인지 뾰족한 뼈가 박힌 곤봉이 뒹굴고 있었다. 곤봉의 모양이 최준의 기억속에 있던 그 곤봉과 동일한 것으로 봐서 이 놀이 저번에 봤던 그 놀인 것 같았다.
[저번의 그 놀이네요. 가엽게도 길을 잘못 들었나 보네요.]
엘레나는 풍요를 약속하는 드라이어드다. 생태계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몇몇 사회를 구성하는 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조화를 이루며 산다. 놀로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생태계를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놀은 악이 아니며 놀의 불행에 동정을 표할 수는 있었다.
숲을 망가뜨리러 온 10만 대군이야 말로 그녀에게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죽어 숲의 양분이 된 이들을 미워할 정도로 엘레나가 속이 좁은 드라이어드는 아니었다.
[언니! 저 왔어요!]
“엘레나 왔니?”
“어라?”
드라이어드끼리는 원거리에서도 정신감응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검은 가시 덩굴의 드라이어드는 엘레나의 정신파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최준은 처음 만난 드라이어드가 한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추후에 안 사실이지만 정신감응을 한 순간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한국어를 정신감응으로 전달했다.
평범한 드라이어드라면 그 즉시 생소한 언어에 적응하기 어려웠겠지만 이 언니라는 존재는 벌써 몇 백 년간 드라이어드의 숲을 외부의 침입에서 방어해낸 능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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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빠졌던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덕분에 비축분 오링.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