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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누가 조선시대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다들 예쁘고 몸매가 죽이는 여자들만 있던데. 너는 걱정도 되지 않니?”
시연이 그렇게 물어보자 효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자신이 예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여고를 다닐 때 인근 남고 학생들이 가끔 쫓아오거나 쪽지를 전해준 적은 있었지만 의대를 다니고부터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녀가 워낙 말수가 적어 도도하다는 이미지가 굳어져 관심 있던 동기나 선배들도 멀리서 그냥 지켜보기 일쑤였었다. 간혹 용기를 내어 사귀자고 남자 쪽에서 접근하면 어쩐 일인지 그녀가 사라지곤 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애태우던 남학생들은 그저 속으로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녀는 학과 공부를 따라잡기에 필사적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가 대학교에서 전국의 수재들과 같이 의대를 다니니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더욱이 시험 때마다 공부를 고등학교 때만큼 했지만 10등 안에 들지도 못했다. 집안의 언니 오빠가 모두 의사와 검사여서 그녀에게 거는 기대 역시 컸던 집안은 충격을 받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녀의 언니 오빠들은 모두 그녀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동문이었다. 또한 학년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그녀가 놀 수 있겠는가. 같은 나이의 다른 과 친구들은 미팅을 한다, 여행을 간다고 떠벌리고 자랑할 적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살자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쉽사리 고교 시절처럼 1등을 하지는 못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왜 공부를 하지, 왜 의대를 갔지 라는 의구심이 그에 비례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신 부모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의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혼란을 말했다가는 집안에 난리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성기와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없던 용기가 솟구치는 그녀였다. 그래서 과감하게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성기와 자고 난 후 가장 큰 변화가 그녀에게 생겼다. 그것은 용모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공부에 방해될 것 같아 그런 마음이 들 적마다 애써 자제했던 그녀였다.
속옷을 입는 형태도 변했다. 면 팬티를 주로 입던 그녀가 실크 팬티를 사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님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별로. 그녀들이 예쁜 것은 솔직히 나도 인정해. 하지만 나 자신은 나만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나 혼자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여기 지금 나와 같이 있는 너도 그를 사랑하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효성의 어투에 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솔직히 그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얼마나 내 생각을 했냐고. 나 말고 네 생각을 했다면 용서를 할까? 말까?
“에이, 설마?”
“흥, 이제 보니 너 은근히 그이가 널 생각하기를 기대했구나.”
“야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래도 친구라서 양보하려고 했더니 너는 어쩜 그러니?”
“왜 그래? 시연아! 우리 둘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해. 간호사들 봤지. 병원에 있을 때 보니깐 환자복도 어쩜 그리 멋있어 보이니.”
효성의 화제 돌리는 말에 시연은 눈꼬리를 살짝 쳐들었다.
“흥, 그건 그래. 어쩜 그렇게 예쁜 간호사들이 우리 병원에 있을 수 있지. 맨날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봐.”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목적지인 신림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둘은 핸드백과 소지품을 챙기고 내렸다. 처음 방문하는 것이니 만큼 둘은 성기의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선물을 준비했다.
효성은 굴비, 시연은 성기의 집 근처 과일 가게에서 과일 한 박스를 사기로 했다. 둘은 개찰구를 빠져나가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미모의 여자 둘이 걸어가자 지하철을 오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서울대병원 비뇨기과 간호사인 김희선이 차를 몰고 있었다. 그녀가 모는 차에는 김혜수와 나아람과 차혜련이 탑승해 있었고 뒤에서 따라오는 김지수의 차에는 나머지 간호사들이 탑승해 있었다.
김혜수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풍만한 가슴이 도드라지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에 비해 운전대를 잡은 김희선은 풍만하지는 않았지만 단아한 용모에 하얀 피부가 보는 이로 하여금 도도하게 여기게 만들었다.
뒤에 앉은 나아람과 차혜련도 결코 뒤지지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어 지나가는 차들 가운데 젊은 운전자가 모는 차들은 대부분 휘파람을 불었다. 어떤 이들은 창문을 내리며 데이트하자고 조르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큰일이야. 그이가 우리랑 있었던 일을 모를 수도 있으니 말이야.”
김희선의 낮은 중얼거림을 조수석에 앉은 김혜수가 들었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설마, 이 많은 여자들과 잤는데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어! 게다가 우리가 좀 잘난 미모야!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데.”
김희선은 김혜수의 자신만만한 어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장 생활을 해보니 점점 깨달았던 김희선이었다.
그녀들은 신림 역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뒤를 이어 김지수의 차가 주차했다. 그녀들이 내리자 한 낮의 태양도 눈이 부신지 태양빛을 더 발산하는 것 같았다.
주차 요원들은 연예인이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이곳에 일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미인들이 떼거리로 주차장에 있었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아저씨든 젊은 학생이든 침을 질질 흘렸다.
그녀들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갔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모인 그녀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의 짐을 들고 카페를 나섰다. 택시를 분산해서 타고는 성기네로 향했다.
성기 네 주소라고 적힌 메모를 보고 장 마담이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택시기사가 미인의 질문에 마음이 약해진 듯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다. 머리가 벗겨진 50대 초반의 아저씨는 장 마담에게 공손하게 대답해주었다.
“이 동네는 내가 잘 알지요. 여기서만 10년 넘게 택시를 몰았는데. 내가 사는 곳도 여기고 말이여. 잠깐 다음 횡단보도 건너서 내리면 됩니다.”
“고마워요. 기사님.”
“별 말씀을. 택시 기사가 친절한 것은 당연한 거죠.”
선두에 탔던 택시가 횡단보도를 지나서 멈추자 뒤를 따르던 다섯 대의 택시도 연달아 멈추었다. 대낮의 도로는 화창한 여름 날씨와는 달리 무척이나 한가했다. 방학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흥신소 직원이 알려준 약도대로 걸어가 보니 세탁소가 나오고 슈퍼가 나왔다. 그리고는 길이 네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곳에서 슈퍼를 끼고 두 번째 단독 주택이 성기 네라고 그려져 있었다.
그곳으로 여자들은 우르르 몰려갔고 시연이만 슈퍼에 들러 과일 한 박스를 사고 있었다. 장 마담이 그녀에게 뭐 하냐고 묻자 선물을 사가겠다고 대답했다.
“괜찮아. 이따 우리가 다 같이 저녁 식사를 차리기로 했으니깐 그때 사면되지.”
이미 그녀들은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성기와 잤던 김지수가 볼멘 표정을 지으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너 말고 다른 여자들이 있다면 너는 그것을 인정할 것이냐는 질문에 김지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먼저 잤던 사람이 기득권을 주장하기에는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들이 문을 두들기니 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수수한 인상의 여자는 대문 앞에 열 명의 미인들이 서 있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남편이 술값 외상을 해서 술집 마담이 찾아왔는지 도통 감을 잠지 못했다.
“누구세요?”
“죄송한데요, 여기가 혹시 천성기씨댁 아닌가요?”
“그런 사람은 처음 듣는데요. 저희가 이집 주인인데 우리 집 남편은 오세훈이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혹시 이 근처 집에서 천성기란 사람이 어디 사는지 아세요?”
장 마담이 맏언니답게 차분하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새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도 잘 몰라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여기 슈퍼 할머니한테 여쭈어 보세요. 그분이 이 동네 제일 오래 사신 분이라.”
“네, 알겠습니다.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