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 223 회: 5 -- > (223/230)

< -- 223 회: 5 -- >

다음날 이른 아침 아저씨가 깨어나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다행이 성기가 깨어나 미희와 수진이를 흔들었다. 그녀들은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아저씨를 보고 인사를 한 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도 거르고 출근하려는 그를 붙잡고 성기가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자신이 마련한 집으로 함께 가보자고 했다.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집이요? 난데없이 집이라뇨?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게 살았는데......신세지기도 싫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겁니다. 반지하보다는 깨끗한 집에서 아이를 키우세요. 단지 그뿐입니다. 여기는 햇볕도 잘 들지 않고 반지하라 벌레들도 많잖아요."

어제 청소하다가 미희와 수진이가 비명을 수차례나 질렀다. 그 이유는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와 죽어서 껍질만 남은 바퀴벌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도 아닌 어른 손가락 크기의 바퀴벌레여서 성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불결한 곳에서 아이를 키웠다가는 조만간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물론 자신도 신림동에 살 적에 가끔 바퀴벌레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방 구석에 죽어 있는 바퀴벌레를 본 적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뜻은 고마운데요. 받기가 그렇네요. 한두푼 짜리도 아닌데."

"어쩌다가 보니 돈이 굴러와서 그래요. 아저씨 이름으로 해놨으니 오늘 가서 아저씨 도장만 꾹 찍으면 됩니다. 오늘은 출근하지 마시고 이삿짐과 집 정리를 하면 될 거에요.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세요. 점심 먹고 살림에 필요한 것 사러 같이 다녀요."

이때 미희와 수진이가 끼어들었다.

"아저씨. 우리 오빠가 돈이 많아요. 그래서 해준다는 거에요. 부담갖지 마세요."

"그래요. 아저씨! 부담가지시면 어떡해요? 그냥 오빠와 저희들이 좋아서 하니깐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마세요."

성기와 두 여자의 설득에 아저씨는 마음이 움직였다. 아이를 생각해서 돈을 악착같이 벌었고 좀 더 나은 환경으로 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내가 암으로 투병하는 동안 돈이 없어 전세금을 빼서 병원비로 충당했다.

아내는 부담주기 싫다며 병원 치료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그럴 적마다 하늘을 원망한 적도 많았다. 가끔씩 티비에서 수억씩 기부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돈을 나한테나 주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아내를 살리고 싶어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죽고나서 모든 것들이 부질없어 보였다. 다만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천근만근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말이다. 그러나 어제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청년이 너무나도 고마운 제의를 했기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망설이지 말고 오늘은 출근 못한다고 전화나 하세요. 그리고 여기 동생들이 차려주는 아침 먹고 오랜만에 아들하고 같이 유치원도 가시구요."

"너무 고맙네. 고마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도와주다니, 자네나 자네 동생들은 분명히 신이 내린 천사일 걸세."

"천사라뇨?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 뿐입니다. 너무 고맙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다만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미안해요."

"아닐세. 집을 구해준 것까지도 고마운 일이야. 내가 일을 두탕이나 하지만 여기도 월세라서 힘에 부쳤거든. 내년이면 여기도 계약이 끝나서 올려주거나 다른 곳을 찾아봐야 했는데 이렇게 고마운 것을 해주다니. 정말 고맙네."

그렇게 말한 아저씨를 떠밀듯이 전화기로 성기를 끌고갔다. 아저씨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더니 전화했다. 회사에 전화해서 사정이 생겨 오늘은 출근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회사에서는 선뜻 그러라고 하더니 잘 처리하고 내일 보자고 했다. 

미희와 수진이는 서둘러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도마에서 칼이 울렸고 성기는 그 시간에 얼굴을 씻었다. 어제 오후 늦게 햇볕에 너른 이불이 말랐는지 성기는 보러갔다. 다행이도 여름이라 그런지 이불은 말라서 걷어도 될 상태였다. 이불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이도 일어났는지 아빠가 출근하지 않고 자신을 깨워서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베시시 웃고 있는 것이 아빠가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그들 부자는 오랜만에 함께 아침을 해서인지 그토록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처럼 말이다. 성기도 미희도 수진이도 정희도 그런 부자의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식사하는 내내 그 잔잔함이 모두를 감싸 안았다.

"식사를 마쳤으니 아저씨는 같이 유치원에 갔다 오세요. 가시기 전에 대충 꾸려야 할 것만 말해주세요."

"고마워요. 저기 방에 있는 것들은 내가 와서 직접 챙길테니까. 나머지는 대충 알아서 가지고 갈 만한 것들이다 싶으면 가져가죠. 아무래도 아이하고 나하고만 사는 집이니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거든요."

아저씨와 아이는 신발을 신고 문밖을 나섰다. 계단을 정겹게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에 괜시리 성기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빨리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끓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미희와 수진이 때문이었다.

가서 또다른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온다면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보지 않아도 불을 보듯 훤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말이다. 두통이 떠나질 않고 성기의 머리에 영원히 머무를 지경이었다.

심각한 표정의 성기를 보자 미희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오빠, 어디 아파요?"

수진이도 끼어들었다.

"혹시 배탈난 거에요? 내가 손 따줄까요?"

순진한 그녀들의 얼굴을 보니 차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이 애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사는 지 몰랐다. 성기는 애써 머릿속 생각을 지웠다.

"아니야. 아픈 거 아니니깐 빨리 짐 정리하자. 정희씨도 서두르자고."

"네, 성기님."

간단한 가전제품들은 가져가기로 했고 녹슬고 낡은 냉장고는 버리고 가기로 했다. 이윽고 용달차가 왔다. 미희와 수진이는 간단한 그릇들과 손에 들기 쉬운 것들을 들었다. 성기와 정희는 무게가 나가는 이불 꾸러미와 가전 제품들 그리고 옷가지들을 함께 들었다. 

그렇게 해서 짐을 다 실어놓고 용달차에게 르망을 따라오라고 말해놓고 정희가 출발했다. 정희만 갔기에 성기는 두 동생과 함께 어지럽혀진 방을 청소했다. 대충 치워놓고 아저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저씨는 돌아오자 마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짐을 꾸렸다. 박스에 담는 아저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결혼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 본 그는 성기의 인기척에 급히 눈물을 닦고는 부산을 떨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싸셔도 됩니다."

"아니죠. 빨리 싸야죠. 저때문에 많이 늦어졌을 텐데요."

그러더니 짐을 부랴부랴 싸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두 개의 박스에 자신의 방에 있는 짐을 넣더니 말했다.

"다 했어요. 나머지는 버리고 가죠."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정희씨가 오니깐요. 아참, 집주인한테는 말해야죠?"

"아이고, 까먹고 있었어요. 잠깐만요. 올라갔다 올게요."

아저씨는 집주인에게 부득이 이사를 가게되었다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는 보증금은 천천히 돌려주어도 된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느닷없이 나타나 이사 간다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정희가 돌아오고 용달차가 돌아왔다. 이사 갈 집에서 용달차에 실어 놓은 짐을 봐주기로 해서 정희와 기사가 급히 짐만 내려놓고 돌아온 것 뿐이었다. 

용달차 기사는 정희가 빙빙 돌았다며 요금을 더 달라는 볼멘 소리를 했다. 하기는 한국 지리도 잘 모르는 정희가 했기에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은 성기가 도리어 미안해졌다. 기사에게 더 주겠다고 말을 한 후 짐을 실었다.

성기 일행은 르망에 탔고 아저씨는 용달차에 탑승했다. 도착한 후 짐을 내리고 정희와 성기가 싣고 온 짐과 내려 놓았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저씨도 부지런히 날랐다. 미희와 수진이는 시장에 가 필요한 가재도구를 샀다.

아이가 돌아올 때쯤 되서야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어제 저녁에 도배를 해서 깨끗한 상태였다. 장판은 전 주인이 성기와 두 여동생이 사는 줄 알고 선물이라며 예쁘게 살라는 말까지 했었다.

그 말에 성기는 가만히 있었지만 미희와 수진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아이의 유치원에 미리 주소를 애기해놔서 변경된 주소로 아이를 내려 놓았다.

아이를 마중하러 나간 아저씨는 아들을 데리고 새집으로 들어갔다. 바뀐 새집에 아이는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중국 음식을 배달해서 실컷 먹었다. 아이도 처음 먹는 탕수육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맛있게 먹었다. 성기는 그런 모습에서 따뜻한 무언가를 느꼈다.

부자와 헤어지며 조만간 다시 찾겠다고 말을 하고는 떠났다. 떠나기 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쓰라고 생활비로 오천만원을 놓고 갔다. 더 줄 수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돈으로 불행을 겪을 수 있어 성기는 그 정도 선에서 주고 간 것이었다. 혹시라도 아저씨 주변에 돈에 혹한 불한당이 있으면 불행한 사태가 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부자는 르망에 타고 사라지는 성기 일행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보이지 않아도 한참을 부자는 흔들었다. 아이는 평생 그 기억을 가슴에 담고 살아갔다고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