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2 회: 5 -- >
울먹이는 아이를 안고서 집까지 걸어왔다. 죽은 엄마와 일 나간 아빠로 인해 재롱잔치에 빠지고 싶었을꺼라 여겼다. 괜시리 마음이 짠했지만 아이를 다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도 아버지가 없어서 가끔은 아버지가 있는 애들이 부럽기 때문이었다.
미희의 체온이 닿아서 그런지 아이는 울먹거리다 잠에 빠졌다. 자는 아이를 방에 재우고는 미희와 수진이에게 잘 돌보라고 말한 후에 성기는 정희를 깨러 나갔다. 정희는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성기를 보고는 미안해했다.
"괜찮아. 정희씨한테 오히려 미안하지. 이런 데서 자게 했으니 말이야."
"이런 데서도 많이 자 봤습니다."
"정희씨, 나랑 같이 복덕방을 가자구."
"복덕방이요?"
"응, 저 아이랑 아저씨가 살만한 깨끗한 집을 알아보려고."
그렇게 해서 성기는 정희와 함께 인근 복덕방 5군데를 돌아다녔다. 그 중 가장 깨끗하고 아담한 집을 얻었다. 22평인데도 방이 세개인데다 화장실도 있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그것을 계약금만 걸고 성기는 나왔다. 오후에 경마장에서 딴 돈을 인출해 잔금을 치룰 생각이었다.
아저씨의 허락을 받지 않아서 미안했지만 열심히 사시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선뜻 아저씨가 받지 않으면 난감했지만 성기는 진행하기로 작정했다. 늦은 밤까지 일하는 분인데 언제 만나서 상의하고 계약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들 부자를 통해서 성기도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정희와 함께 성기는 청량리로 가 통장으로 돈을 인출했다. 은행 직원이 잔고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깜찍한 얼굴이 꽤나 이뻤지만 성기는 그런 곳에 신경을 줄 여유가 없었다. 오늘 6시까지 잔금을 치루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하겠다고 집주인이 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있던 이대리가 그 예쁜 여직원을 불렀다. 성기를 보며 눈을 깜빡이며 양해를 구했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호출처리 하고 와서 바로 처리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10분이 지나도 여직원은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옆의 창구 여직원에게 부탁했다.
"급해서 그런데, 이거 먼저 해주면 안되요? 제가 먼저 왔거든요."
통통하게 생겼지만 그런대로 아름다운 여직원이었다. 이 은행은 여직원을 뽑을 때 얼굴을 보고 뽑나보다라고 잠시 생각했다. 통통한 여직원은 성기를 보며 쏘아부쳤다.
"고객님, 지금 다른 고객님 처리하잖아요. 순서를 지켜야죠."
"이봐요. 원래 내가 먼저 왔는데 담당 여직원이 없어서 제가 부탁한 거지. 거기서 왜 순서를 지키라는 말이 나오죠?"
"흥! 별꼴이야. 진짜!"
앞에 있던 배불뚝이 아저씨가 여직원 편을 들었다.
"이봐, 학생! 순서를 지켜야지. 학교에서 뭘 배웠어?"
"호호호, 고객님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고마워요."
동네 유지 이상득은 벗겨진 머리와 배가 산만한 체구여서 많은 여자들이 외모를 보고 실망했다. 하지만 건물이 십여 개에 이르고 청량리 일대에서 이름난 유지였기에 그를 홀대하는 여자나 은행들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들에게는 절대로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점을 눈 앞의 통통한 여직원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성기를 홀대하고 이상득에게 잘해준 것이다.
이상득은 앞의 대기 의자에 앉았다. 자신에게 잘 해주는 것이 돈을 바라고 하는 것이지만 이 멍청한 노인네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매력때문에 젊은 여자들이 달려든다고 여겼다. 그는 여태 혼자 살아서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만났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낼 수가 없어서 참았지만 속에서 열불은 끓임없이 치솟았다. 남자였다면 주먹으로 후려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자였기에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눈 앞의 여직원은 진짜 주먹을 부르는 얼굴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통통한 여직원이 나직하게 말했지만 성기는 들을 수 있었다.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흥! 내가 이쁘기는 하지."
우웩! 야! 세상에 여자가 너만 있다고 해도 절대로 너는 아니거든. 이런 여자에게서 저런 대답을 들으니 성기는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성기 역시 나직히 지껄였다.
"미친 년!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저기 나이든 아저씨의 씨받이나 해라!"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교묘하게 말한 덕분에 그 통통한 여직원의 얼굴은 금새 붉으락 푸르락해졌다. 화가 치민 그녀는 돈을 입출금증을 올려놓는 조그만 프라스틱 용기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흥! 미친 새끼! 생긴 걸 보니 여자 친구가 없게 생겼구만. 평생 딸딸이나 해!"
성기도 지지않고 이죽거렸다.
"알았어. 너같은 년은 트럭으로 와도 싫거든."
그들의 신경전은 더는 진행되지 못했다. 예쁜 여직원인 서영희가 자리로 걸어오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객님, 기다리게해서 죄송합니다. 빨리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열받은 것이 아름다운 서영희로 인해 봄 눈 녹듯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것이 미스코리아 나가도 3등 정도는 할 것 같았다.
성기가 제대로 보았다. 그녀는 은행에서 수많은 남자 직원들의 가슴에 사랑의 하트를 새겨놓았다. 아름답고 날씬한 그녀는 목소리도 천상 여자였다.
"고객님, 여기 현금입니다."
그것을 준비해 둔 등산 가방에 넣은 후 등을 돌리려는데 서영희가 인사했다.
"고객님,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시길 바랄게요."
여자들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저 말에 '네'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성기는 초연했다. 은행 밖을 나서는 성기의 뒷모습을 통통한 여직원이 노려보았다.
면목동에 도착하자 마자 성기는 바로 복덕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집주인을 만나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잔금을 치루자 그 집의 소유권은 아이의 아버지가 가졌다.
아이를 깨워 저녁을 먹이고 미희와 수진이는 철희랑 게임을 했다. 한참을 놀던 아이는 돌연 일어나서 동화책을 가져왔다. 책을 가져온 곳을 보니 동화책도 별로 보이지가 않았다.
성기는 정희를 이끌고 서점으로 향했다. 아이는 책을 많이 읽어야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신조를 갖고 있는 성기여서 책은 아이들이 읽을 만한 것으로 골랐다.
그날 자정 정각에 아저씨가 들어왔다. 파김치처럼 축 늘러진 아저씨는 바로 골아떨어졌다. 깨어나서 내일 이야기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성기는 거실에서 미희와 수진이를 끌어안고 잤다.
오늘 밤도 정희는 차에서 자야했다. 인근에 여관이 없어서 청량리까지 나가야 한다는 말에 정희는 차로 향했다.
"정희씨, 미안해"
"괜찮습니다. 오늘만 참으면 되니까, 특별히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고마워. 그리 말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