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1 회: 5 -- >
성기는 조용히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달빛을 조명삼아 두리번거리며 큰 고무통을 찾았다. 찾기 시작한 지 오분도 되지 않아서 큰 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이불을 넣고 구석에 있는 수도 꼭지를 틀어서 물을 받았다. 라면 국물이 빠지려면 모르긴 몰라도 하루 종일 담가둬야 할 것 같았다.
이불을 치워두고 마당에서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주택가는 고요했다. 길 고양이들이 성기를 쳐다보고는 바람처럼 내뺄 뿐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성기는 아이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원래 이런 역활은 엄마가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가 너무나도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만 있으니 아이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일찍 성숙한 듯 보였다. 그것조차도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맞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말이다. 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뿐이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하고 군인은 군인다워야,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새근새근 자는 아이는 그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4년 전에 죽었다면 엄마에 대한 기억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더더욱 안쓰럽게 느끼는 성기였다. 그 순간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성기는 조용하게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방을 소리없이 닫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반지하라 그런지 눈 위로 땅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니 미희와 수진이가 정희와 함께 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성기를 발견하고는 그리 반가운지 뛰어 성기의 품에 안겼다. 두 여자를 안으려니 성기는 힘이 들었지만 새벽인데도 군소리없이 온 그녀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오빠! 웬일이에요?"
"여기는 어디에요? 우리가 살 집이에요?"
그녀들은 자신들과 성기가 동거할 집인 줄 알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어진 성기의 말에 실망한 듯 보였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미희와 수진이가 배구 선수여서 그런지 자신보다 크게 느껴졌다. 맞닿은 뭉클한 젖가슴의 감촉도 너무 좋았다. 집을 나와 서울대 병원에서 소연이란 간호사와 몸을 섞은 후에는 잠잠했기에 성기의 욕정은 들끓었다.
"그럼 여기는 왜요?"
미희의 입술이 성기의 입술에 닿을락 말락할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정희가 보건 말건 키스를 퍼붓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둘과 함께 진탕 욕구를 발산하고픈 욕망에 시달렸다. 성기의 마음을 알았는지 수진이가 성기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오빠! 여기로 왜 불렀어요?"
평소와는 달리 수진이의 목소리에서 유혹하는 듯한 색기가 흘러나왔다. 성기는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여기 엄마 없이 사는 아이가 있어서 말이야. 내일 아침 밥도 해주고 나랑 같이 청소도 해주자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하고 아빠하고 살 집을 마련해주려고. 여기 반지하라 케케묵은 냄새가 가시지 않아서 말이야."
"네, 알겠어요. 오빠가 이렇게 착해서 내가 반한 거 알죠? 오빠! 사랑해요!"
미희가 성기의 입술과 뺨에 입술을 댔다. 미희가 입술을 떼기 무섭게 수진이가 성기를 꼭 껴안고는 말했다.
"좋은 일이네요. 오빠! 그런 일에 우리가 빠지면 서운하죠."
"야, 알았어. 그만 놔! 숨 막힌다."
키 큰 두 여자가 꽉 끌어 앉으니 성기는 답답해졌다. 성기의 말에 그녀들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풀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달려들 기세를 내포하고 있었다.
성기는 급히 두 여자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반지하 계단이었다. 안으로 들어오니 밖과는 다른 지하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휴, 오빠! 정말이지 여기 냄새 너무 심한 것 같아요."
"킁! 킁! 여기서 어떻게 애하고 살아요? 내일 빨리 구해요."
"알았어. 그니깐 아침을 너희가 해줘. 알았지?"
"네! 오빠!"
정희는 불편하지만 차 안에서 쉬겠다고 했다. 여름이니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정희였다. 하긴 거실 바닥에서 성기와 두 여자가 누워 자니 알아서 빠져준 것이었다. 성기는 내심 정희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이런 고생도 멀지 않았다고 여겼다. 아이를 보니 엄마 생각이 간절했기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불편한대로 성기는 미희와 수진을 양 옆에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않고 이렇게 무턱대고 들어와 자는 것은 미안했지만 허락을 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폭행을 당한 상태였고 아이는 채 열 살도 되지 않는 어린애였기 때문이었다.
미희와 수진은 낯선 곳임에도 성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꼭 끌어안고 성기의 팔을 베개삼아 잠을 청하는 그녀들이었다. 다행이도 청바지를 입고 와서 그런지 이불은 필요치 않았다.
피곤해서 그런지 셋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성기는 눈을 떠 보니 누군가 화장실에서 씻는 소리가 들렸다. 미희와 수진이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보니 아저씨였다.
성기는 염려스런 어조로 물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더 주무시지 그래요? 제가 허락을 받지 않고 제 동생들을 불렀습니다. 요리 솜씨가 뛰어나니 아저씨하고 아이의 아침을 맛있게 준비해 줄겁니다."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어제 신세진 것도 있는데."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건데요. 뭘."
"저는 일이 있어서 빨리 나가봐야 되서요. 아이는 깨워서 아침 먹이고 나가려고 했는데 여자 분들이 있으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괜찮아요. 아이는 아침 먹이고 어디 가나요?"
"학교 가기 전이라 유치원에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죽기 전에 꼭 애는 유치원에 보내라고 해서요."
죽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든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다는 말에 성기는 울컥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애틋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늘은 빨리 데려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너무나도 착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나가면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오전에는 건물 청소를 하고 저녁과 새벽에는 웨이터로 일하고 있죠. 어제 보았던 그 힐탑에서 말이죠."
"아,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 빨리 아침 차리라고 할테니 아침 드시고 나가세요."
"아닙니다. 지금도 늦었어요. 먼저 나갈테니 염치없지만 아이 부탁드릴게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저씨는 다리를 절룩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성기는 그 모습을 보며 안쓰러웠다. 가난하지만 내일을 위해,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이 성기에게 큰 가르침을 줬다.
미희와 수진을 황급히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난 그녀들은 후다닥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급히 씻고 나온 둘에게 성기는 어서 밥을 차리라고 말했다. 냉장고를 휙 돌아 본 그녀가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고 파를 다듬기 시작했다.
요리를 한 지 20분쯤 지나자 아침 밥이 완성되었다. 맛있는 계란 말이와 어묵탕과 두부 튀김, 아이들이 좋아할 소시지 볶음등이 반찬으로 놓여 있었다. 성기는 아이의 방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는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는지 누워 있었다. 빨리 깨워서 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성기는 미안했지만 아이를 깨웠다.
"일어나! 애야! 일어나!"
아이의 엉덩이를 잡고 흔들었다. 아이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늘 보던 아빠 얼굴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이는 당황한 듯 보였다.
"아빠는?"
"아빠, 일이 있다고 나가셨어. 빨리 밥먹고 형이랑 유치원가자."
"응!"
아이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평소 아저씨가 바쁠 때는 밥만 차려놓고 나간 적도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밥만 먹고 자기 스스로 유치원에 갔을 것이다. 그런 생활을 눈치 챈 성기는 또 다시 울컥했지만 참았다.
아이는 아름다운 누나들이 상에서 기다리고 있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아이는 자신을 귀여워하며 밥을 먹여주는 누나들에게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하기는 늘 혼자 먹고 혼자 집에 있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말리아의 아이들도 생각났다. 여기 아이들이나 아프리카의 아이들이나 가난한 아이들은 다르지 않구나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배고픔과 굶어죽는 것이 없을 뿐이었다.
아이를 밥을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혀주었다. 그 모든 것을 미희와 수진이가 도맡아했다. 그녀들에게 아이는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마치 그녀들을 엄마라고 느끼는지 볼 수 없었던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아이는 미희와 수진이가 데려다 준다고 하자 갑자기 정색했다. 자기 혼자 가겠다고 떼를 썼다. 아이의 고집을 꺽지 못해 정희에게 부탁하려고 차에 갔는데 정희가 피곤한 듯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정희를 깨우지 못했다. 다시 아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아이는 쏜살같이 혼자 뛰어갔다.
"조심해! 형이 맛있는 거 사놓고 기다릴테니 끝나면 빨리 와!"
뛰어가는 아이의 등에 성기는 소리쳤다. 미희와 수진은 아이의 방을 청소하고 설겆이까지 하는 중이었다. 성기는 아저씨의 방을 청소하다가 그들 부부가 고아란 사실을 알게되었다.
천애고아인 남녀가 만나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아이 엄마가 암으로 죽었다. 애틋한 사연이 마치 영화같은 스토리라고 여기며 아저씨의 방에 쌓인 먼지를 치웠다. 개인적인 물건은 하나도 건들이지 않았다. 괜시리 사생활을 건들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청소하다 보니 세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점심 때가 되서 정희를 깨우러 나가려는데 갑자기 전화기 벨이 울렸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중요한 전화일지도 몰라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이철수씨댁 맞나요?"
성기는 아저씨의 이름을 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까 유치원 가방에 새겨진 아이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모르겠는데요. 저도 집을 봐주는 사람이라.....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이철희라고 하는데요."
"네, 이철희가 이철수씨 아들 맞아요. 다름이 아니라 여기 햇빛유치원인데요. 오늘 철희가 나오지 않아서요. 재롱잔치 날인데 부모님 모시고 하는 중요한 행사라 철희가 나오지 않아서 전화드린 거에요."
"네?"
"혹시 전화받는 분이 아버지시면 오늘 같은 날 아이랑 놀아주셔야죠. 아이가 늘 기가 죽어 있던데요."
"네? 아닌데요."
하기는 어머님이 없다고 놀리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가 죽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걱정되서 전화했으니 집에 들어오면 잘 타일러 주세요. 이만 끊을게요."
"전화주셔서 고맙습니다."
성기는 전화기를 내려 놓고 미희와 수진이에게 좀 전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들도 하던 일을 멈추었다.
"빨리 나가서 찾자구."
"네!"
"큰일이네!"
염려했던 만큼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근 아이들에게 놀이터가 어디인지를 물었고 그 곳에 가보니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성기는 발견했지만 미희와 수진이를 떠밀었다.
그녀들은 뛰어가서 아이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아이는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엄마를 떠올리며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들도 덩달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오타와 띄어쓰기가 가끔 잘못된 것이 보일 겁니다. 한글로 쓰지 않고 워드패드로 작성하는 것이라서 말이죠.
한글로 쓰지 못하는 것이 노트북이 늙어서 깔았다간 버벅거린답니다. 그래서 부득이 워드패드로 쓰고 있습니다. 그 점 많은 독자님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 글에 가끔 감동적 이야기를 넣는데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맨날 까는 내용만 넣으면 삭막해질 수 있어서 말이죠.
그리고 살다가 가끔 감동받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넣었습니다. 제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감동과 가치를 얻으신다면 그걸로 대만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