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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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집에서 기다리던 한상득이 문을 열며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배일도는 뻔뻔하게 말했다.

"내 기분이 좀 그렇거든."

"이 자식이, 그러게 왜 주먹을 휘두르고 다녀?"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 있던 박흥식이 한상득의 뒤에서 깐족거렸다. 배일도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다 박흥식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는지 톡 쏘아붙였다.

"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냐? 알지도 못하면서 왜 말을하고 그래?"

"걱정되서 말한 거잖아."

"그게 걱정하는 말투냐! 비꼬는 말투지."

배일도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박흥식도 지지않고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한상득이 둘의 사이를 말렸다.

"뭐하는 거야! 둘 다 그만해!"

그러면서 한상득이 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배일도와 박흥식은 서로의 날선 감정을 내려 놓았다.

"알았어. 이 손 놔!"

"오케이! 내가 검사한테 불려가서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런 것 같아."

한상득은 둘이 풀어지자 냉큼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여기 맥주 마시면서 사진 보자. 죽이게 나왔거든."

"정말이야? 그날 비도 오고 어두웠는데."

"그러니깐 비싼 카메라를 써야지."

둘은 한상득이 건넨 맥주를 받아쥐고 캔 껑을 잡아 당겼다. 목젖을 넘어가는 시원한 맛에 우울하고 걱정스런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아 배일도는 상쾌해졌다.

한상득의 오피스텔은 널찍하고 그가 혼자 사용하고 있어서 편했다. 역시 돈 많은 집안의 아들이라 그런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가 캔맥주를 들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배일도와 박흥식도 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영화를 보는 곳인지 한쪽 벽면에 흰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맞은 편에는 널찍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 뒤에는 탁자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슬라이드와 영사기가 턱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야, 최근에 장만한 슬라이드기로 보자."

"벌써 필름을 뜬거야?"

"내가 한두번 하냐! 빨리 앉아."

"알았어."

배일도와 박흥식이 앉자 한상득이 슬라이드기를 켜고 방안의 불을 껐다. 대형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착각이 들정도로 넓은 화면에 곧바로 그들이 덮쳤던 미희란 학생의 벌거벗은 몸이 스크린을 채웠다.

탐스런 가슴과 잔털이 가지런하게 나 있는 은밀한 곳까지 대형 화면으로 봐서 그런지 세 명은 감탄과 함께 아쉬움을 드러냈다.

"죽인다. 이렇게 보니깐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때 확실히 도장을 찍었어야 하는데......"

"저 다리 봐라. 허리에 감고 꽉꽉 눌렀어야 하는데...."

"그때 그 차만 지나가지 않았으면 할 수가 있었는데 말이지. 너무 아쉽다."

한상득이 화면 가득하게 들어찬 미희의 갈라진 곳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마라. 그래서 오늘 나이트 가서 그때처럼 한 명 해치우기로 했으니깐."

"정말이야?"

"오늘 물 좋다고 단골 웨이터가 연락이 왔어. 그때처럼 술먹고 헤롱거리는 년들 먹기나 하자."

"기분이 찝찝했는데 잘 됐다."

"그때 힐탑이었지?"

"맞아! 한두번 가냐!"

"힐탑아, 기다려라!"

성기는 서울대병원에 들러서 환자로 누워있는 미희를 병문안했다. 부모님이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을 모르고 있는 미희는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미희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가 성기를 찾았다. 주치의와 성기는 병실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환자가 아직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서 정신과 치료도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요?"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서 말입니다. 돈이 없는 환자들은 이런 말에 대부분 퇴원을 하든가 다른 병원으로 가는데, 어떻게 하실지 보호자가 없어서 말입니다."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보호자 대신에 환자를 구한 분에게 이런 것을 부탁해서 미안합니다."

"미안하긴요. 사람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성기는 자신이 만약 돈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그 돈이 지금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한 장소에 있다고 자신을 격려했다. 노름과 다름없는 경마에서 딴 돈을 이렇게 좋은 곳에 쓸 수가 있다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무과 직원이 방송으로 미희의 보호자를 찾고 있었다. 미희와 수진이, 정희와 함께 원무과로 향했다. 그곳에서 병원 직원을 만나 미희의 보호자라고 말을 하자 병원 직원이 대뜸 병원비를 내야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에 성기는 순순히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돈이 없으면 나가죽으라는 말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성기는 참았다. 좋은 일들이 많았고 비뇨기과 연구에 동참하며 받은 돈도 있는 성기였다.

그 돈은 어머니 통장으로 들어와서 자신은 쓸 수 없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던 곳이라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병원도 무료로 운영하는 단체가 아니잖은가. 병원 직원의 인건비에서 수술도구에 들어가는 약값, 수술장비등등의 비용을 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대뜸 돈부터 내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병원에서 강제로 퇴원조치 하거든요."

"겨우 이런 일로 환자를 내보낸다는 겁니까?"

성기는 직원 말에 격앙되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여기는 국내 최고의 병원입니다. 서로 입원하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들이 많아서요."

"그래도 그렇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라 병원의 입장을 대변할 뿐입니다. 저희 병원이 싫으시면 다른 곳에 가시든가요."

"알겠습니다."

성기는 직원이 내미는 수납증을 받아들고 수납창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희의 병원비를 내주고는 병원 직원이 알려 준 미희 부모님의 전화 번호를 들고 공중 전화로 향했다.

"따르릉! 따르릉!"

신호만 갈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걱정이 되어 성기는 주소까지 알아내서 정희에게 말해서 미희네 부모님 댁에 갔다. 집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어 허탈하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나오기 전에 대문에 다녀갔다는 쪽지를 남겨놓았다. 혹시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성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부정했다. 미희가 누워 있는데 교통사고나 이런 일로 부모님도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말이다.

청량리로 가는 내내 성기가 근심어린 표정을 짓자 미희와 수진이가 옆에서 재잘거렸다.

"오빠! 돈도 많으면서 오늘 뭐 사줄거에요?"

수진이의 말에 성기는 성의없이 대답했다.

"뭐 갖고 싶은데?"

"저기, 오빠! 우리 운동만 하면서 한번도 나이트를 가본 적이 없거든요."

"나이트?"

"네! 오늘 가보고 싶은데. 오빠도 가서 기분전환해요?"

"그래?"

"저도 가고 싶어요. 오빠! 가자!"

"일단 돈부터 입금하고 생각하자. 정희씨는 어떡할거야?"

성기의 물음에 정희는 운전대를 꽉 잡으며 대답했다.

"저도 한번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노는 나이트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만 살아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노는 곳과 공부하는 곳 등등을 구경하고 싶거든요."

정희의 말에 성기는 잠시 생각했다. 기분이 꿀꿀한 것은 맞는데 왜 하필 오늘인지, 에라 모르겠다라고 결론을 내리며 성기는 입을 열었다.

"좋아. 정희씨 일단 트렁크의 현금을 은행에 입금한 후에 움직이자고."

평화 은행이 바로 보여서 성기 일행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젊은이들이 갖고 온 박스에 관심도 없던 은행원들은 상자에서 나오는 현금다발에 입을 쩌억 벌리며 굽신거렸다.

은행지점장까지 나와서 허리를 구부리며 성기 일행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왕처럼 대접을 받고는 은행을 나온 성기는 길거리 가판대에 실린 신문 1면 하단에 실린 광고를 눈여겨 보았다.

"힐탑! 국내 최고로 물 좋은 곳!"

나이트 클럽 광고였다. 힐탑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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