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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자국과 멍자국이 앳된 얼굴에 생채기처럼 자리하고 있어 성기를 비롯한 일행의 마음은 편치않았다. 좀 전에 부러진 코뼈 수술을 끝마쳐서 코와 눈에 붕대가 감겨있어 죽어있는 시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담당의사와 간호사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한 후에 성기는 정희에게 부탁해 어제 그 학생을 발견했던 곳으로 갔다. 미희와 수진이는 먼저 가라고 했고 둘만 따로 범행 현장으로 온 것이다. 인적이 드문 도로였지만 오늘은 경마가 열리는 날이어서 그런지 어제와는 다르게 왕래하는 차들이 많았다.
어제의 그곳으로 가보니 도로가를 따라서 걷는 중년 부부가 보였다. 근심스런 얼굴이어서 조수석에 있던 성기는 세상 살이가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했다. 고단한 농부의 삶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먼 일이라는 것을 성기는 고교를 졸업하고 깨달았다.
중년 부부를 지나쳐 르망은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비포장도로 한켠으로 겨우 차를 세워두고 지나가는 차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정희와 함께 가보니 어제 저녁 그대로 있었다. 비가 오는데다 인적이 드물어서 자전거와 여학생의 신발로 보이는 흙묻은 신발이 아스팔트 옆에서 잡초와 함께 너저분하게 있었다.
바로 앞은 경사진 잡초더미 였는데 밝은 대낮에 보니 교복으로 보이는 상의와 치마가 그곳에 있었다. 성기는 준비해 간 카메라로 정밀하게 찍고 그것을 다시 비닐 봉지에 담았다. 한참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발자국이 너저분하게 있었고 잡초더미가 한 방향으로 쓰러진 것이 어제 그 괴한들이 여학생을 눕히고 일을 본 장소이리라 짐작케 했다.
여학생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미희 여동생도 연쇄 살인마에게 죽었다지 않은가. 기필코 잡아서 남자 구실을 못하게 하리라 다짐하는 성기였다.
그 때 성기의 눈에 중년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 장소에서 여기까지 주변을 살피며 걸어온 것이다. 그 중년부부의 눈에 딸이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던 자전거가 보였다. 같이 있어야 할 주인은 보이지 않고 자전거는 바퀴를 옆으로 뉘여 있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여보, 여기야. 여기!"
중년 부부는 부리나케 달려와 자전거를 살폈다.
"미희야!"
"어디 있니?"
두 사람은 목놓아 딸의 이름을 부르며 성기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성기가 해코지 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기색도 보였지만 성기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 역시 저 상황이면 딸이 없어진 장소에 있는 누구라도 의심했을 테니까 말이다.
성기는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전거 주인은 모르겠고 어제 저녁에 제가 여기에서 위급한 학생을 발견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설명을 해주자 둘은 자신의 딸이 맞는 것 같다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죽은 줄로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년 부부는 한참을 울고 나서 성기의 차에 올라탔다. 성기는 정희에게 부탁해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나검사에게 연락해 이 놈들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병원에 도착한 후 중년 부부를 모시고 어제 그 학생이 입원한 병실로 들어갔다.
"아이고, 미희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미희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중년 부부의 눈에 한없이 예쁘게만 보였던 딸이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마냥 침대에 누워 있는 꼴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성기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거침없이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중년 부부도 딸이 험악한 일을 당했어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두분 여기는 다른 사람들도 입원한 병실이라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면 안됩니다."
"네, 알았어요. 고맙네요. 학생이 도와줘서 우리 딸이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어서."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수술이 아까 끝났으니 마취 끝나면 깨어날 겁니다. 그런데 의사 말로는 마취가 풀리면 무지 아플 거라고 합니다. 그때는 지체없이 간호사를 부르세요. 전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두 분 오시자마자 바로 가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학생도 일을 봐야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고맙네."
성기는 정희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너무나도 분개한 성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그 차를 보니 아우디였다는 것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일 가능성이 컸다. 조폭들은 검은색 세단을 선호하지 저런 외제차는 전혀 그들의 기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나와서 둘은 르망을 타고 다시 청량리로 향했다. 가게 앞 공중 전화에서 내린 성기는 나검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소파에 앉아서 비디오를 보던 나검사는 전화를 들었다.
"나검사님 댁인가요? 전 천성기라고 합니다."
"엉? 성기야? 왜 무슨 일 있어?"
"네? 어제 그 폭행 사건 말고도 다른 사건이 있거든요. 과천 경마장 부근에서 성폭행 당한 여학생을 발견했는데, 이것도 나검사님이 좀 해결해 주시면 안 될까 싶어서요?"
"뭐? 성폭행? 어딘데? 너 있는 곳이?"
"왜요? 그냥 전화로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이런 성폭행범은 빨리 잡아야 제 2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거야."
"네, 알겠어요. 아까 내려준 청량리 그 곳에 있어요."
"아, 그 588?"
"네, 여기 있어요."
"너 설마 그곳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
"아니에요. 피치못한 사정으로 이 근처에서 머무는 것뿐입니다. 전 깨끗해요."
"알았어. 내가 바로 갈게. 미궁에 빠져 있는 서울대병원 성폭행범이 그곳에서 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르지."
"네? 서울대병원 성폭행범이요? 그런 이야기 신문에도 없던데요?"
"모르지. 당연히. 1급 기밀이거든. 갈 테니깐 만나서 이야기 해줘. 알았지?"
"네, 나검사님! 아참, 여기보다는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만나요. 그곳에 환자도 나검사님이 봐야 하니깐요."
"응,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