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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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 되지 않아 말끔한 정장에 금테 안경을 쓴 사내가 서류 가방을 들고 파출소로 들어섰다. 차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누구시죠?"

"네, 저는 변호사입니다. 여기에 배일도란 분이 계시지 않나요?"

그 소리에 벤치에 앉아 있던 배일도가 일어났다.

"전데요. 제가 배일도입니다."

"한상봉 변호사님이 지시하셔서 왔습니다. 저는 이승만 변호사라고 합니다."

"이승만 변호사님이라고요?"

아래 위로 쥐색 양복을 입은 이승만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배일도는 가만히 있었다. 이승만 변호사는 뒤에 있는 파출소장에게 다가가 명함을 건넨 뒤에 사정을 이야기했다. 파출소장은 국내 최대의 법무법인인 김앤장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한 듯 허리를 숙이며 쩔쩔맸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야기에 배일도와 동기들은 파출소를 문을 당당히 걸어나왔다.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전한 배일도는 동기들과 함께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간단히 치료를 마치고 정문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그리고는 논현동으로 향했다. 

배일도는 기분이 더러웠다. 자신이 얻어 맞은 것도 그렇고 동기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도 그렇고 해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여학생을 건드린 부분이 걸리지가 않아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한편 철창 안에서 지켜보던 성기는 어이가 없었다. 쌍방 폭행인데 한쪽은 풀려났고 한쪽은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한다니 말이 되지 않는 현실에 가슴 속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그렇지만 난동을 피울 수가 없어 가만히 씩씩거리며 분을 삭혀야 했다. 

김태원은 맞아서 아까부터 이가 흔들린다고 했다. 선글라스도 부서져서 눈가에 살짝 핏물이 보이고 있었다. 정준교 역시 맞아서 입가가 터져 있었다. 성기는 상태가 조금 심각했다.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뒷목과 어깨와 발목에 파란 멍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활이시죠? 저 팬입니다."

"우릴 알아? 보컬 이승철이 떠나서 몰라보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뭘요? 제게는 들국화와 더불어 좋아했던 그룹입니다."

"인권이 형이 우리 보다는 낫지. 우리는 발라드만 불러서 록계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도 좋아합니다."

"반갑군. 이런 데서 만나서 좀 그렇지만 말이야."

"제가 더 영광이죠."

김태원이 악수 하기 위해 내민 손을 성기는 덥썩 잡고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학창 시절 들국화에 이어 두번째로 좋아했던 그룹이었다.

"제 학교 선배가 다섯 손가락입니다."

"그래? 학교가 어딘데?"

김태원이 반문했다.

"신림동에 있는 남강고등학교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어쩐 일로 대학로에 오셨어요? 공연 있나요?"

성기는 부활이 3집 음반 작업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더군다나 보컬 김재기가 죽은 사실은 일반인인 성기가 알리 만무했다. 김태원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처음 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리 가깝게 여겨지는 것은 아마도 같이 싸웠다는 사실일 것이다.

김태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만나기로 한 분은 어떡해 되는 겁니까?"

"아차, 그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재기 동생을 말이야."

"우리도 빨리 조서쓰고 보내주지."

성기는 주변에 힘이 될 만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한돌이한테 연락하기는 좀 그랬다. 작년에 같이 있어서 불렀지 오늘은 한돌이랑 같이 있던 게 아니어서 친구 부모님께 폐를 끼치기가 그랬다.

양순경과 김순경에게 연락하기도 망설여졌다. 소말리아라면 CIA에 연락을 취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이 소령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오늘 만난 진아에게 연락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성기의 머릿 속에 차도둑 유영철을 잡은 사건이 떠올랐다. 신고해 출동한 경찰과 형사들이 언제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었다. 철창을 손으로 잡고 성기는 소리쳤다.

"경찰관님. 저 급한데. 전화 한 번만 쓸게요."

"시끄러. 조용히 안해!"

"아까 나간 사람들도 전화 썼잖아요."

"너희하고 같은 줄 알아? 그쪽은 의대생들이고 너희는 양아치잖아."

성기는 양아치란 말에 발끈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것은 일반인이나 경찰관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분개한 성기였다. 더군다나 여기 갇힌 사람들은 한때 유명했던 부활이란 그룹인데 양아치라니. 대한 민국 경찰들 엿이나 드세요. 속으로 한껏 욕을 해주었다. 

"양아치라뇨? 조서를 쓰면 우리 신분도 나올텐데요."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고. 내일 조사할 테니까."

"내일 조사하면 여기서 자라고요?"

"너희같은 놈들한테는 길바닥보다 낫잖아."

그 말에 성기와 김태원을 비롯한 부활 멤버들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가기 위해서는 경찰관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성기는 부탁했다.

"제발입니다. 한 통만 하게 해주세요."

"이 양아치 새끼들. 조용히 안해!"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정준교가 일어나 소리쳤다. 

"뭐라고 시발 놈아! 경찰이면 다야? 우리가 어디가 양아치로 보이냐? 그리고 말 놓지 마. 민증까면 너보다 내가 많을 것 같은데."

"너.....너? 경찰한테 욕을 해!"

"그래, 했다. 어쩔래?"

"내일 조서 쓸 때 가만 놔두지 않겠어."

욕을 먹은 이순경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내일 조서를 작성할 때 가해자는 저 양아치 놈들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었다. 교대를 하기 위해 이순경과 차순경은 퇴근을 했다. 퇴근할 때 자신과 교대하는 신순경에게 신신당부했다. 

철창 안에 갇힌 놈들 폭행 사건의 가해자니 절대로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고 말이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철창 안에 갇힌 성기와 김태원에게 신순경이 문을 열며 말했다.

"다들 나와. 어서."

김태원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반말을 하는 것이 성기는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작은 파출소에서는 이들이 왕이었기 때문에 심사가 또 뒤틀리면 오늘도 이곳에 쳐박아 둘 것이 뻔했다.

"저 벤치에 앉고. 너희들 돈 있냐? 너희들 밥 시켜먹을 돈 있으면 시켜주려고. 없으면 그냥 굶어야지. 어떡할래?"

"설렁탕으로 시켜주세요."

성기가 그렇게 말한 후에 김태원에게 나직히 속삭였다.

"형님들 만난 것이 영광이니 제가 사겠습니다."

"우리가 사야지. 동생한테 신세지면 되나?"

"동생으로 삼아줘서 고맙죠. 제가 살게요. 부탁입니다. 형님!"

"이번 한번이다."

"네, 다음에는 형님한테 얻어 먹을게요."

말을 마치고 나서 성기는 경찰관들에게도 말을 했다. 

"경찰관님들 식사하지 않으셨으면 같이 드시죠. 사드릴테니." 

어제 있던 이순경과는 달리 신순경은 동네 쌀집 아저씨처럼 인상이 푸근했다. 사람 좋을 것 같은 넉넉한 인상에 눈매도 부드러워 성기 역시 공손히 대접하고 싶어졌다. 물론 반말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신순경의 마음을 얻어 전화 한 통화를 빨리 하는 것이 성기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야, 범인들한테 얻어 먹으면 되냐?"

"우리가 범인이라뇨? 쌍방 폭행인데."

"그래? 아까 나간 이순경 말로는 너희들이 일방적으로 휘둘렀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이어진 성기의 말에 의구심을 갖게 된 신순경은 전화를 건네 주었다. 음식점에 직접 전화하라는 배려였다. 게다가 전화가 끝나자 원하는 곳에 한통 하라고 허락까지 해주었다.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낸 성기는 꼬깃꼬깃한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펼쳐 전화를 걸었다.

"거기 강력3과 반장님 부탁드립니다."

"누구신데요?"

"얼마 전 차도둑을 잡았던 학생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요. 돌려줄테니깐."

"안녕하세요. 강력 3과 반장 강두식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접니다. 반장님. 차도둑을 잡았던 천성기입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지 수화기 건너 편의 형사 반장은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반가운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 기억난다. 하하하. 그래. 반갑군. 반가워. 어쩐 일이야?"

성기는 어제 주점에서 있었던 일과 이순경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하소연을 늘어 놓았다.

"잠시만 기다려. 그 때 차를 도둑 맞을 뻔한 집이 알고보니 검사 집인 모양이야. 내가 그집 사모님한테 연락을 할게. 일개 형사반장이 나서면 모양도 그렇고 말이야. 나보다는 더 큰 힘을 쓰시는 분이니깐 잘 해줄거야.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화 한 통화로 변호사가 왔다면 상대편은 대단한 집안일거야. 아니면 뒤에 배경이 있던가. 전화를 했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반장님. 이렇게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데요."

"내 곧 그집 사모님한테 연락을 할테니 기다리고 있어. 잠시만 그쪽 순경을 바꿔 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반장님."

성기는 수화기를 신순경에게 건네며 말했다.

"잠시 통화하고 싶다는데요."

"누군데?"

"받아보시면 알 거에요."

"전화 바꿨습니다. 혜화지구대 신순경입니다."

"나는 종로경찰서 강력 3반 강두식 반장일세. 어제 폭행 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들 잘 대해주게. 험한 말이나 폭행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 작품 후기 ============================

***** 경찰관들의 비리도 많지만 그들은 너무나 박봉이란 사실. 그 부분을 강조하고자 늘여서 썼습니다.

***** 너무나 므훗한 씬이 없었습니다. 다음편에는 나올테니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추석의 명절에 므훗한 씬과 함께 흐뭇하게 보냅시다.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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