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 회: 5 -- >
김영관은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더 크게 놀란 사람은 배일도였다. 자신이 보기에 성기는 덩치가 날렵하고 키는 174에서 176정도 밖에 되지 않아 신장이 180에 이르는 김영관을 쓰러뜨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영관아! 영관아! 괜찮아?"
"으응! 괜찮아. 무지 아프네."
임인제는 영관이의 상체를 끌어안고 일으켜 세웠다. 성기에게 배일도는 성큼 다가섰다. 자신의 덩치를 믿어 그렇게 한 것인지 몰라도 성기는 되려 고마웠다.
"뭐야? 나이도 어린 녀석이."
"나이 애기 자꾸 꺼내지 마라. 너보다 많아. 나이가 서른인데 어려보인다고 고등학생 취급하면 이 형이 열받지."
성기의 말에 배일도는 기가 막힌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흥! 그래! 야, 요즘 고딩들은 그렇게 뻥치고 다니냐? 공부를 못하겠으면 형이 도와줄까? 형은 공부는 잘했거든."
비웃는 말에 성기는 가만 있지 않고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경호원 박정희는 나설 타이밍을 살폈다. 자신이 먼저 나섰으면 좋았으련만 성기가 먼저 나서는 바람에 여의치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보아하니 그들은 무술을 연마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일반인이었다.
성기의 주먹에 맞은 배일도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이번에는 배일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성기의 얼굴에 맞은 주먹은 맞은 뺨과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뒤에 있던 배일도의 동기들이 성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성기 뒤에 있던 부활 멤버들은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싸움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박정희도 성기의 편에 서서 배일도 패거리들과 맞섰다.
"아악!"
퍽! 퍽!
주먹과 발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고 비명도 연신 터져나와 어둡고 흐릿한 주점 안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안개처럼 자욱한 담배 연기에 병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사장은 인근에 있는 혜화 파출소로 재빠르게 신고했다. 자신도 끼어들었다가는 경찰서에 수시로 드나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 사장은 싸움이 멈추기만을 바라며 지켜보았다.
"경찰이 올 겁니다. 손님들 그만 하세요."
정장을 입은 박정희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는지 어느덧 일어나 성기에게 다가갔다. 부활 멤버와 성기는 큰 탈이 없는 반면에 배일도 일행은 쓰러져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으악!"
"정희씨, 경찰이 올 것 같으니깐 먼저 사라져요. 미희와 수진이도 데리고 어서요. 정희씨는 한국 사람이 아니어서 불리할 겁니다."
성기는 일년 전에 나이트 클럽에서 몸을 부딪쳤다는 이유로 시비가 벌어진 경험이 있었다. 그 때도 손과 발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져 경찰서까지 다녀와야했다. 다행이도 한돌이 부모님이 손을 써서 빨리 나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때와 다를 것이라 여겨졌다.
박정희는 걱정하는 눈빛의 미희와 수진이를 이끌고 종업원에게 물어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인근 손님들도 한 켠으로 몰려가 싸움의 여파에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다행이도 마로니에 공원 뒤편에 있는 파출소에서 순경들이 들이닥쳐 싸움은 더는 크게 번지지 않았다. 하지만 패싸움으로 간주되어 그들 모두는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다행이도 파출소는 지구대규모여서 작지는 않았다. 나이 많은 순경이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다 우르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야?"
"요 앞 학사주점에서 패싸움이 나서 끌고 왔습니다."
"아니, 젊은 놈들이 그렇게 싸우면 어떡해? 대통령도 나서서 강력 범죄를 낮추라고 하는데 말이야. 아니, 저 놈들은 뭐야? 머리 모양이. 이 새끼들이 정신을 못 차렸나? 남자면 남자답게 하고 다녀야지."
전두식 파출소장은 자리를 벗어나 부활 김태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은 서류철로 머리를 내려쳤다. 탕탕 소리가 하도 커서 머리에 혹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새끼야. 꼴에 남자라고 싸움하고 다닌 거냐!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정의 사회 구현이 안되는 거야. 남자면 남자답게 하고 다녀야지. 여자도 아닌 새끼들이."
"우린 음악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음악하는 놈들은 머리를 길러도 되는 거야? 이 놈이 정신을 덜 차렸나?"
아래로 늘어뜨린 서류철을 잡고 몽둥이처럼 김태원의 머리에 내리쳤다. 곁에 있던 정준교가 답답한지 소리쳤다.
"우리는 록커들입니다. 백두산이나 시나위, 부활등 모르세요?"
"난 모르거든. 음악이라면 이미자지. 어디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르는 놈들이 음악이라고 떠드는 거야!"
전두식은 김태원의 머리를 벗어나 정준교의 머리를 서류철로 후려쳤다. 몇대를 맞자 정준교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개인의 스트레스를 푼다고 여길 정도로 폭력을 가하는 파출소장이었다.
보다 못한 성기가 입을 열었다.
"그만 때리고 말로 하세요. 말로. 여기 이분들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폭력을 가합니까?"
"어쭈, 요 나이 어린 녀석은 뭐야? 이런 맹랑한 새끼 보게."
그러면서 전두식 파출소장은 검은 서류철로 성기의 머리를 후려쳤다. 성기는 아팠지만 너무 과격하고 폭력적인 파출 소장에 열을 받아 애써 참았다.
"눈 안 깔아. 요놈 보게. 차순경 이 놈들 모조리 철창 안에 집어 넣어."
서 있던 차순경이 소장에게 주저하며 말을 건넸다.
"아직 조서를 꾸미지도 않았는데요."
"이 놈들한테 맞은 사람들 있을 거 아냐! 그 사람들 의견으로 먼저 조서를 꾸미고 여기 이 놈들은 내일 아침에 작성해도 돼!"
파출소장의 말에 차순경은 네라고 대답했다. 성기와 부활 멤버는 파출소 안쪽에 위치한 철창 안으로 들어가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일도 일행은 흡족한 듯 고소를 지었다.
"이봐. 당신들. 한사람씩 순서대로 와서 진술하면 됩니다. 조서를 작성할 것이니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럼, 당신부터 시작할게요."
차순경과 같이 출동했던 이순경이 책상에 앉아 볼펜을 놀리며 입을 열었다. 배일도를 시작으로 김영관과 임인재, 우태균이 차례로 불려 나가 진술했다.
얼굴이 퍼렇게 멍든 배일도와 얼굴 곳곳에 싸운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는 김영관과 배를 움켜잡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우태균을 보며 이순경은 일방적으로 맞았음을 직감했다. 이들과는 달리 철창 안에 있는 부활 멤버와 성기는 얼굴에 상처를 제외하고는 멀쩡한 상태였다.
물론 이럴 경우 쌍방 폭행으로 쉽게 합의가 되지 않았다. 형사 사건이 아닌 민사 사건이라 합의 보는데 꽤나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맞은 학생들이 고대 의대생이라니 뜻밖의 사실에 이순경은 놀랐지만 의사도 사람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한가지 이견이 있는 것은 김영관은 저 나이 어린 놈에게 맞았다고 줄기차게 말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정장을 입은 사내에게 무진장 맞았음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진술을 마치고 나서 서류를 작성하던 이순경에게 배일도가 울긋불긋한 얼굴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경찰관님. 제가 집에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되겠습니까?"
"이거 형평성 문제도 있어서 곤란한데......."
배일도는 서류 밑으로 지갑에서 꺼낸 10만원권 수표를 살짝 밀어 넣으며 나직히 말했다.
"급해서 그럽니다. 제가 외동아들이라 집안에서 걱정을 많이 하실텐데......"
이순경은 눈을 아래로 깔고 서류 밑으로 들어 온 수표를 서류철로 덮었다.
"딱해서 이번 한번만 허락합니다. 이 전화를 쓰세요. 용건만 간단히 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경찰관님."
배일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수화기를 들고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배일도. 지금 경찰서에 있거든."
"뭐야?"
전화를 받은 이는 다름아닌 한상득이었다. 한상득의 부모님이 유명 변호사였기에 배일도가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알았어. 내가 말해볼테니. 거기서 다른 말은 하지 말고. 좀만 기다려."
"고마워."
전화기를 내려 놓은 한상득이 같이 있던 박흥식에게 입을 열었다.
"이 새끼 우리랑 헤어져서 혜화동에서 술 먹다 옆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데."
"그래? 왜?"
"몰라. 이 새끼 말로는 그냥 노는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어왔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