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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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 들어간 성기와 미희와 수진은 의사로부터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을 들었다. 생명이 위중한 경우는 아니지만 코뼈가 부러졌고 눈가와 입술 속이 찢어져 바로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의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환자가 죽기를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환자의 의식은 지금 계속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판단해서 무의식으로 남아있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진단을 성기는 처음 들어봐서 뭐라고 해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젖가슴도 찢어져 있어 꿰매야 한다고 했다. 

여자의 생명같은 젖가슴을 베다니 참으로 흉칙한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응급실 의사는 성기가 보호자 인듯 여기며 안타까움과 함께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는 힐난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환자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찢어진 곳은 당장 수술을 하고 코뼈는 내일 성형외과 의사가 출근하는 대로 바로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성기는 흉터가 남기지 않게 촘촘히 꼬매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자신이 잘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해주지 않아 미심쩍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기가 데려 온 환자말고도 다른 환자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는 간호사와 의사 가운을 입은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피곤에 절은 모습이었다.

성기의 눈에는 그저 같은 의사로만 보였다. 여태 설명을 해준 의사에게 알겠다고만 말한 후에 나가려는데 간호사가 수납실을 가리켰다. 그곳에 가보니 오늘 수술할 비용이 빼곡히 항목별로 적혀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합계란에 50만원이 기재된 상태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50만원을 수납하니 성기도 이제 별로 여유가 없었다. 학생의 인적 사항을 적는 란에 아무 것도 몰라서 대충 적고 경찰서에 신고를 하자니 본인이 원치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했다.

보통 이런 사고는 친고죄여서 본인이 원치 않을 경우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공산이 컸다. 하물며 생면부지의 성기가 나선다고 경찰이 나설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집에서 엄마한테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김순경이나 양순경한테 도움을 얻었을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엄마가 보고싶고 다른 여인들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제발로 나간 것도 아니고 쫓겨난 마당에 뭐가 아쉽다고 제발로 기어들어간다는 말인가.

여기서 물러서면 평생 여자들한테 휘둘릴 거란 생각을 한 성기였다. 하지만 성기는 모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피에 중독된 여자들은 복종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 영수증이요."

수납실에 있던 남자가 도장이 찍힌 종이를 건넸다. 성기는 그것을 받아쥐고 응급실을 나섰다. 인적란에 아무 것도 없으니 내일 날이 밝는대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늦는 것 같기도 했다.

병원 근처의 가게에 들러서 랜턴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박정희에게 말을 했다.

"아까 그곳으로 가고 싶은데요."

"지금요?"

시간은 벌써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행이도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미희와 수진이가 다가와 물었다.

"오빠! 어딜 가게요?"

"나 지금 무지 배고픈데."

그렇게 말하는 두 여자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예쁘장한 것이 서양의 모델처럼 늘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면티를 입어서인지 젖가슴의 선도 뚜렷하게 나와있었다.

"미안. 밥을 먹고 너희들은 먼저 들어가. 택시타고 알았지? 오빠는 지금 그 여자가 폭행 당했던 곳으로 가볼려고 하니깐 말이야. 인적 사항을 알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혹시 아니? 그놈들 단서라도 잡을지."

"오빠, 너무 위험해."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어때요? 나는 오빠가 위험해지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자자, 밥먹으러 가자. 내가 위험해지긴. 여기 박정희씨도 있는데 말이야."

"말돌리지 말고. 오빠! 제발 가지 마."

"갈거면 내일 아침에 가요. 지금은 너무 위험해."

"오빠가 우리 말 안들을거면 우리도 따라 갈거에요."

성기는 미희와 수진이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두 손을 들고 뜻을 굽혀야 했다. 결국 내일 아침 일찍 그곳으로 가기로 하고는 병원 인근의 식당을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인근이 대학로여서 사람들이 길에 차일 정도로 넘쳐나고 있었다. 미희와 수진이 역시 이런 데는 처음 온 듯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호를 맡은 박정희 역시 구경하고 싶었지만 성기의 눈치를 살피는 듯 싶었다

.

"여기 처음 와 보니?"

"응, 오빠. 오빠는 여기 자주 왔어요?"

"자주는 무슨. 어쩌다 한번 와서 술마시고 놀았지."

"오빠, 우리도 술 사줘요."

"너희 잘 마시니?"

"오빠는. 우리 처음 본 날 술 먹었잖아요."

"아, 그렇지. 미안. 뭐 마실건데? 소주? 맥주?"

"오빠! 그냥 소주 마셔요. 돈 아껴야 하잖아요."

"저도 소주 좋아요. 맥주 마시면 돈 아깝잖아요. 어차피 속에 들어가면 모두 물로 변할텐데."

"정희씨! 괜찮겠어요?"

"전 괜찮습니다. 다만 술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알았어요."

성기는 미희와 수진이를 데리고 길을 건넜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술집과 주점이 보였다. 그곳에서 학생들이 찾을 것 같은 분위기의 주점으로 미희와 수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정희가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깔끔한 청바지 차림의 여학생이 성기 일행을 맞았다.

"몇분 이세요?"

"네명입니다."

"그럼 저기 어떠세요? 지금 자리가 그곳 밖에는 없는데요."

"네, 괜찮습니다."

넷은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술을 먹었다. 파전과 함께 소주를 먹는 기분은 정말이지 오늘의 피곤함을 날려 주기에 충분했다. 그 여자가 쓰러진 곳에 아우디가 있었다라는 것이 성기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성기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미희와 수진이에게 물었다.

"너희 아까 아우디 차량 번호판 보지 못했니?"

"정확히는 모르는데. 오빠. 서울 52가는 확실한데 그다음 숫자는 떠오르지 않아요."

"저도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다만 52가 다음에 77이었던 것은 확실해요. 그런데 오빠! 왜 물어보는 거에요?"

"딴게 아니고 그 아우디 차량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말이야. 여자를 그렇게 만든 놈은 잡아야 하잖니?"

"오빠! 잡아야 하는데 오빠가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았음 싶어요."

"응, 나도."

 미희와 수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성기의 양 옆에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던 몇몇 남자들이 성기를 쏘아보았다. 여자들은 그런대로 봐 줄만한 외모에 몸매였다. 얼굴은 그냥 이쁜 정도였지 아주 예쁘다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자신들 곁에 있는 남자들 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야, 이번주가 우리 방학 마지막인데. 어떡하냐?"

"모르겠어. 그나저나 오늘 화끈하게 쏘기로 한 배일도 이자식은 왜 안오는 거야."

"새끼가 집이 산다고 아주 우리를 부려 먹으려고 들어."

그때 한 사내가 입구에서부터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미안, 미안. 내가 오늘 약속한 것을 깜빡했어."

"쏴라. 미안하면 말이지."

"알았어. 그나저나 내가 부탁한 자료 다 했니?"

"그래, 여기 있거든."

"고맙다.고마워. 내가 오늘 밤 너희들에게 극락이 무엇인지 보여줄게."

"정말이지? 동기 좋은게 뭐냐. 부탁할 것 있으면 또 부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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