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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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 공사판에서 쫓겨난 이후로 이진아를 매일 쫓아다녔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진아는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짝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시내로 외출을 나갔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표정이 밝아있어 사내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는 자신만 봐야 하는데라고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진아를 멀리서 쫓아 갔더니 창가에 앉아 잘생기지 않은 놈팽이를 앞에 두고 히히덕 거리니 그 미소를 울음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사내 자신은 그녀를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데 진아는 딴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진아를 향한 증오가 일더니 시간이 지나자 진아 맞은 편에 있는 젊은 놈팽이에게로 증오가 옮겨갔다. 도살작의 소처럼 온몸을 난자하고 뼈와 살을 분리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다시는 진아의 곁에 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줄테다.

사내는 스쿠터로 빗속을 뚫고 벤츠를 따라갔다. 헬멧도 쓰지않고 그대로 빗물을 얼굴에 맞으며 질주했다. 승용차 뒤에 앉은 박정희는 뒤를 돌아보니 스쿠터를 타고 오는 사람이 보였는데 빗물이 번져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다. 그냥 음식점 배달부거나 가스통 배달부라고 여겼다.

차 유리창과 천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박정희는 한국은 참으로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위험한 가스통을 매달고 전력으로 질주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 배달부들은 헬멧도 쓰지 않았으며 가끔은 곡예사처럼 운전했기에 처음 본 박정희는 엄지 손가락을 쳐들었다.

1993년 8월 14일 개인마주제가 시행되어 유럽에서 마주로 활동했던 남승현이 6월부터 귀국해 개인마주제 관련 사항을 마사회와 문화관광부와 협의하는 중이었다. 이 개인마주제에 유명한 연예인도 참가했는데 유인촌, 노주현등이 그들이었다. 

외동딸 남승희가 유럽에서 귀국했는데 남승현은 오늘도 개인마주제 관련 사항을 논의하느라 집에는 가정부와 관리인밖에 없었다. 부인과는 일찍 사별해 그에게 있어 남승희는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과천 경마장 뒤쪽으로 주암2동의 한적한 주택골목을 지나 저택의 대문으로 승희의 차가 들어갔다. 진아의 벤츠가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스쿠터에서 내린 사내는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고 두 대의 차가 들어간 굳게 잠긴 대문을 쳐다보았다. 사내는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기다리기로 했다.

성기와 진아는 충격을 받아 멍해 있는 승희를 부축해 가정부가 안내하는 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진아가 승희를 안고 욕실로 들어갔고 성기는 급히 나왔다. 물기에 젖은 승희는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지만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곱게 자랐으니 쥐가 죽은 모습을 볼 리 없었을 테지. 하긴 쥐가 죽은 모습은 성기조차도 역겨웠다.

멍해있었지만 샤워를 하고 나와서인지 피부는 아까보다도 더 뽀송뽀송한 것이 탄력있게 보였다. 진아는 승희를 눕히고 가정부에게 꼬냑 1잔을 부탁했다. 충격을 받았을 때 돗수 높은 양주 1잔을 먹으면 심신이 안정되고 잠도 훨씬 잘 온다는 것을 진아는 알고 있었다. 가정부가 갖고 온 양주 한 잔을 승희의 머리를 부축하고 승희에게 먹였다.

승희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고 있었다. 승희에게 시트를 덮여주고는 진아가 나왔다. 진아는 거실에 있는 성기에게 갔다. 

"오늘 고마웠어요. 매번 이렇게 신세를 지다니. 성기씨! 정말 고마워요."

"뭘요!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알았어요. 차 한 잔 마시고 갈래요?"

"늦었으니 가야 되는 것 아니에요?"

"여기 지금 가정부하고 관리인밖에 없어요. 승희가 아까 아빠 오면 가라고 했거든요."

"그래도 되요? 초면인데?"

"괜찮아요. 오히려 승희네 아버님도 성기씨 애기를 들으면 고맙다고 할 거에요."

"진아씨. 알겠어요."

"승희하고는 여고동창이에요. 그래서 가끔 놀러오기도 했는데, 차 마시면서 구경시켜 줄게요."

"아하, 그래서 친하구나."

진아가 가정부를 불러 보이차를 시켰다. 중국에서 가장 비싼 상등품으로 국내 중국집에서 내놓는 보이차와는 맛이 다르다고 진아가 설명을 곁들였다. 가정부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가 스스럼없이 성기의 손을 잡고 승희네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물론 미희와 수진이도 뒤를 따랐지만 눈에서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오르는 상태였다. 박정희는 가만히 있겠다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개인마주를 할 정도로 오로지 관심이 경마뿐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소장품이 모두 말과 관련된 것 뿐이었다. 가정부가 가져 온 보이차를 마시며 말에 관련된 조각상과 자료를 성기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진아는 자신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하는 성기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흡족해했다.

"어제 종일 뒹굴었더니 아랫도리가 너무 뻐근해."

"새끼야. 너만 그렇게 오래 하면 어떡해?"

"너도 오래 하지 그랬냐? 어제 그 애 완전히 정신이 나갔던데."

한상득과 배일도, 박흥식은 고대 의대 본과 4학년으로 동기들이었다. 올해가 끝나면 내년에는 인턴으로 나가야 하기에 같이 놀 수 있는 시간도 올 해 밖에 없었다. 한상득은 산부인과, 배일도는 내과, 박흥식은 소아과에 지원할 생각이다. 물론 안암동에 위치한 고대병원일 것이다.

어제는 세 명이 호텔 나이트에서 꼬신 여자 애 한명을 세 명이서 돌아가면서 범했다. 여자 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술에 쩔어 있어 번갈아 덮쳤다는 사실 조차도 모를 것이다. 마지막 설겆이를 담당한 한상득이 침대에서 내려오며 잠든 여자 애 머리 맡에 수표로 100만원을 놓고 나왔다. 

창녀보다는 비싼 값이지만 세 명이 번갈아 범한 비용치고는 너무나 싼 값이었다. 여자는 이쁘장했지만 그곳은 이미 하얀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년에 인턴이 되어 삽질할 생각에 우연으로 저지른 것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주었다. 그 진한 감동은 세 명 모두를 같은 의식 속에서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다.

지금 그들 세명은 과천 경마장 인근에 위치한 박흥식의 부모님 별장에 있었다. 원래는 가평에 있는 한상득의 별장에 가기로 했지만 비가 와서 가기 귀찮아져 가까운 곳에 있는 과천으로 온 것이었다.

어제의 여운이 남아있는 한상득이 냉장고에서 캔맥주의 뚜껑을 따서 고개를 쳐들고 꿀꺽꿀꺽 넘겼다. 시원한 알콜이 속에 들어가자 한상득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는 소파에 누워있는 두 명의 동기들에게 말했다.

"나가 볼까?"

"야, 비오는데 어딜 나가냐?"

"쳐박혀 있으면 좋은 건수가 생긴다냐?"

"좋았어. 나는 상득이 의견에 찬성!"

세 명은 회색 아우디를 몰고 나갔다. 빗속을 빠르게 질주해 아우디는 별장에서 사라졌다. 

시간을 거슬러 진아와 성기가 승희네 집에 도착할 무렵 박미희은 집에서 9킬로미터 북동쪽 근처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비가 오전에 내렸다가 곧바로 그쳤다. 그러더니 비가 다시 내려 미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학교가 끝난 후에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흠뻑 젖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는 날엔 머리 위에서 내리는 비보다 다리 밑에서 튀어 오르는 흙탕물이 더 곤욕이다. 앞뒤 바퀴가 회전하는 힘에 의해 도로 위의 온갖 오염물질로 뒤범벅이 된 페달에 다리가 자칫 엉킬 수도 있었다. 

불길하고도 모순적으로 미희가 오르는 도로의 이름이 구렁고개였다. 솔직히 말하면 15년을 이곳에서 보낸 미희는 불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경마장 뒤편에 있어서 인적이 드물었고 화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순박했다.

비바람이 몰아쳐 도로 주변에 있던 나뭇 가지가 휘이익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주변은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다. 박미희는 두 발에 힘을 실어 자전거로 세차게 달렸다. 

산에 어울릴만한 매력적인 나무들은 아직 초록의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더 가면 집이 나오고 그 위로 더 달리면 경마장 뒤편이 나온다. 그 곳은 주차장인데 개인마주들의 주차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고급 승용차가 이길로 자주 들락거렸다.

경마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트럭과 봉고차만이 마을을 왔다갔다 했을 뿐이었다. 페달을 세차게 달리던 박미희는 옷이 흠뻑 젖어 교복이 몸에 착 달라 붙어 있었다. 흰색의 상의와 갈색의 치마는 젖지 않을 때보다도 더욱 박미희를 성숙하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공사로 인해 무거운 화물차들이 들락거려서인지 아스팔트 도로는 울퉁불퉁해서 박미희는 자전거 페달을 밟기가 힘들었다. 상체도 들썩거렸고 가파른 고개탓인지 자전거로 오르기가 힘겨웠다. 꺽어지는 부분이어서 그런지 무성한 나뭇잎이 주변 경치를 다 가렸다.

기를 쓰고 페달을 밟다가 너무 힘이 들어 자전거에서 내려 걸었다. 습기와 추위가 살며시 박미희의 몸에 배어들었다. 아버지의 봉고차가 눈에 들어왔다. 

10분이면 그곳에 다다를 터였다. 나무 사이로 굵직한 중저음 같은 비바람이 불어왔다. 아버지의 봉고차를 봐서 그런지 박미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벌써 다 큰 것처럼 느껴졌다. 빗속의 어두운 길을 헤치고 와서 그런지 자신이 강하고 든든하게 여겨졌다. 바로 그 순간 회색 아우디가 박미희를 앞질러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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