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3 회: 5 -- >
동대문 시장 입구에 벤츠가 서서히 멈추더니 이진아가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다. 이진아는 늘씬한 긴 다리가 돋보이는 청바지에 하얀 면티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새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도로 위 버스에 탄 승객조차도 창문을 열고 시선을 고정시킬 정도였다.
이진아는 만나기로 1층 시장입구로 가보니 흰색 샌들에 카라가 둥근 흰 블라우스에 인디언 핑크 톤의 주름치마를 입은 남승희가 보였다. 남들이 보면 자매라고 할 정도로 키와 몸매가 비슷했지만 용모는 확연히 달랐다. 남승희가 매력적이고 건강미가 넘치는 미인인 반면 이진아는 남녀노소 누구나가 첫 눈에 반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진아야!"
"승희야! 너 더 예뻐진 것 같아."
진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자 승희가 진아의 팔에 팔짱을 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이구, 관둬라! 너의 외모를 어떻게 따라가겠니. 내가 예뻐지면 얼마나 예뻐졌다고.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럴거야."
"암튼 반갑다. 그런데 왜 시장에서 보자고 우긴거야?"
"백화점은 외국에서도 많이 가봤어. 오랜만에 여고 시절로 돌아가서 너랑 순대하고 떡볶이도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쇼핑도 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리고 시장에서는 값을 깍을 수 있잖니."
"오케이!"
승희와 진아는 팔짱을 끼며 천천히 걸었다. 갑자기 생각난 듯 승희가 물었다.
"진아야, 수연이 소식 못 들었지? 어제 연락했더니 걔네 부모님이 수연이 실종됐다고 그러던데."
진아는 속상한 듯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도 속상해. 수연이하고 너하고 젤 친했는데 말이야. 경찰이 찾고 있으니깐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나도 몰라. 의대 공부하느라 전화 몇 통화 했을 뿐이거든."
"미치겠네. 우리 수연이가 무사해야할 텐데."
"그러게 말이야."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가게들을 지나쳤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1남 2녀 가운데 까까머리의 남자 모습이 진아의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에 진아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발길을 멈춰섰다. 걷던 승희는 팔짱을 낀 진아가 따라오지 않자 그자리에 섰다.
자신 보다 큰 두 여자를 데리고 쇼핑한다는 것이 쉽지않은 일임을 깨달은 성기는 황급히 돌아가기 위해 시장 입구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경호원 박정희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성기의 눈에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여자 두명이 띄었다. 특히 그 두 여자의 젖가슴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주변 옷가게 아저씨들도 힐끔 힐끔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아저씨들이 성기와 같이 있는 미희와 수진의 가슴도 훔쳐보았다. 역시 남자들은 젖가슴을 제일 신경쓰는 것 같았다. 취향 차이일 수 있겠지만 이왕이면 가슴이 큰 것이 좋지 아니한가 말이다. 성기도 미희와 수진이 곁에 있어 대놓고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맞은 편에 있는 여자들의 젖가슴을 훔쳐보았다.
미희와 수진이도 큰 것 같았지만 맞은 편 두 여자에 비하면 조금 부족했다. 성기는 면티를 입은 여자의 젖가슴에서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그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은 것이 처음 보는 여자가 아니다 싶었다. 성기 역시 진아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파헤쳤다.
그러던 중 이진아가 먼저 성기에게 다가왔다.
"혹시 몇달 전에 버스에서 깡패 다섯 분하고 다투신 분 아니세요? 그때 군복을 입고........"
"네? 아, 기억납니다. 네, 접니다. 그때 그 여성분 맞으시죠? 그 깡패들에게 곤욕을 치루던 여성분? 아닌가요?"
성기의 기억 속 진아의 모습은 한 송이 장미같기도 하고 국화 같기도 했다. 이불 속 꿈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여자가 바로 진아였기 때문이었다.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묘한 마력을 가져서 늘 출근 시간 때마다 그녀를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했던 성기였다. 그런 그녀가 바로 눈앞에, 그것도 자신을 반기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저 놀랍고 행복할 따름이었다.
곁에 있던 미희와 수진은 황당하고 기분이 묘했다. 마치 자신만의 장난감을 사촌 동생과 공유하는 유치원 아이의 심정이랄까.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이 것 하나는 확실했다. 진아의 등장이 썩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네, 저에요.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그러면서 진아가 덥썩 성기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미희와 수진의 얼굴은 초겨울 날씨처럼 싸늘해졌다. 그것도 모르고 성기는 그저 입을 헤벌쭉 벌려서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얼마나 용기있는 행동이었는지를 알았어요."
곁에 있던 승희가 끼어들었다.
"진아야, 무슨 일? 그리고 이분은 누군데?"
"아, 승희야! 잠깐만. 저기 실례가 되지 않으면 제가 밥이라도 사드리고 싶은데요."
성기는 꿈 속에 그리던 여자가 먼제 밥먹자고 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같은 일행인 미희와 수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자 미희 등은 속상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공주를 구한 백마탄 기사가 성기같아 그 고마움을 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성기 일행은 진아를 따라 움직였다. 멀리 가기도 어려워서 광장 분식 옆에 신라명과로 들어갔다. 빵과 우유를 시키고 나서 주인한테 메모지와 볼펜을 달라고 진아가 말했다.
주인이 빵과 우유를 테이블에 놓고는 볼펜과 메모지를 진아에게 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네, 고맙습니다. 사장님."
진아가 맞은 편에 앉은 성기에게 포크를 건네며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성기는 치아마저도 이쁜 것에 속으로 감탄했다. 곁에 있는 미희와 수진이때문에 활짝 미소를 짓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성기였다. 미희와 수진은 성기 옆에 바짝 달라 붙어서 저 여시같은 진아의 행동을 경계했다. 마치 포식자의 출현을 경계하는 미어캣처럼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 신라 명과 오래된 곳이에요. 그만큼 맛있으니까. 한번 먹어보세요."
"네, 잘 먹을게요."
"제 이름은 이진아에요. 지금 아주대 다니고 있어요."
"전 천성기라고 합니다. 경희대 전자공학과 1년 다니다 휴학하고 방위로 복무중입니다."
"아, 방위요?"
진아와 승희 역시 동시에 물었다. 호기심을 가진 것은 비단 둘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당당히 좋아한다고 성기에게 말하고 싶은 미희와 수진이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주인인 50대 사장님은 카운터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전에 주문한 딸같은 여자애들이 하나같이 미인이고 몸매도 날씬한데 남학생은 별로 그렇게 잘 생기지 않았기에 호기심이 자꾸 생겼다.
경호원 박정희는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들어오지 않았다. 가게 안에는 지금 구석에서 팥빙수를 먹고 있는 여고생 세명과 창가에 앉은 성기와 여자들 뿐이었다. 성기는 주변을 돌아보며 방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여자들은 설명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의 설명이 끝나자 승희가 진아에게 어떤 인연인지 다그쳤다. 진아는 차분히 버스안에서 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승희가 성기의 손을 덥썩 잡더니 말했다.
"고마워요. 성기씨. 제 친구를 구해줘서요."
"이러지 않으셔도 되요. 인사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거든요."
"오빠. 너무 멋있어요."
"우와! 백마탄 기사같아요."
미희와 수진이도 성기의 행동에 감탄했다. 그러면서 진아에게 보란 듯이 성기의 볼에 뽀뽀를 했다. 아주 쪼옥 소리가 날 정도로 해서 진아의 눈에 불꽃이 튀게 만들었다. 진아는 흥분하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두 여자와 성기의 관계를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성기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그럼요. 저도 진아씨라고 부를게요."
"네, 편하게 부르세요. 그런데 옆에 있는 두 분은 동생인가요?"
그러자 수진이가 나섰다.
"이렇게 뽀뽀하는 동생이 어딨어요? 우린 오빠랑 애인사이에요."
"한명도 아니고 두 명이 같이 좋아하는 사이라는 말인가요?"
"그게 뭐 어때서요. 남자가 능력있으면 여러 여자를 사귈 수도 있죠. 그리고 우리는 친구 사이라 그렇게 생각안해요. 오빠랑 떨어져서 지낸다는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순간 진아와 승희는 할 말을 잃었다. 두 여자가 같이 한 남자를 좋아한다라.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데다 유교적인 가치관이 있던 시대였기에 진아와 승희의 충격은 대단했다. 특히 성기를 내심 염두에 두고 있었던 진아는 그 충격과 상심이 더욱 컸다.
그 순간 문에 달아둔 종소리가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아침에 내렸던 비가 좀전부터 다시 내리는지 사내의 옷이 흠뻑 젖어있었다. 막노동하시는 분들이 신는 갈색 등산화에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사내의 얼굴은 대체적으로 음산해서 눈길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내였다. 게다가 때가 덕지덕지 낀 하얀 마스크를 끼고 있어 어찌 보면 흉악범처럼 보이기도 했다.
"네, 어서 오세요."
가게 주인인 50대 아줌마도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흠칫했다. 사내는 아줌마를 힐끗 보더니 창가에 앉은 면티의 이진아를 노려보았다.
"빵 사시게요?"
아줌마는 겁을 내면서도 물어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아줌마의 대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비닐을 이진아를 향해서 휙 던지고는 문을 열고 재빠르게 도망갔다.
이진아보다 바깥쪽에 있던 승희의 옷에 검은 비닐 봉지가 맞아 터지며 붉은 것이 보였다. 놀란 승희는 의자에서 튀어오르며 비명을 질렀다.
"카야악!"
"뭐야!"
진아도 놀라고 미희와 수진도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번쩍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섰다. 성기 역시 깜짝 놀랐지만 남자였기에 억지로 참고 바닥에 떨어진 그 비닐을 살짝 들추었다. 죽은 생쥐가 배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 끔찍했다. 성기는 여자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비닐을 냅킨으로 급히 덮었다.
카운터에 있던 아줌마가 뛰어오며 물었다.
"뭐에요?"
"죽은 쥐에요. 검은 비닐 봉지좀 주세요."
"네."
성기는 아줌마가 가져온 비닐 봉지에 찢어진 비닐 봉투를 쓸어 담았다. 징그러운 것이라 성기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여자들 얼굴도 마찬가지로 못볼 것을 본 얼굴들이었다.
"아줌마. 혹시 그 남자 얼굴 기억해요?"
"몰라요."
"애, 승희야! 괜찮아?"
진아가 친구인 승희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승희는 죽은 생쥐가 자신 몸에 닿았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쇼크를 먹었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진아가 찬물로 승희의 얼굴을 닦아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싶었다. 더는 여기에 있고 싶은 기분이 모두에게는 없었다. 남자인 성기조차 배가 찢어진 것인지 터진 것인지 모를 죽은 쥐 때문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줌마는 미안하다며 빵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놀란 것은 성기와 여자들 뿐만이 아닌 듯 구석에 있던 여고생들도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채 가게를 나섰다. 계단을 통해 내려오니 밖은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계단 입구에서 박정희가 있었다.
"정희씨, 혹시 좀전에 비맞고 올라온 사내 못봤어요?"
"봤어요."
"그 사람 계단 내려와서 어디로 갔는지 기억해요?"
"여기에 세워둔 이륜차에 올라타서는 총알처럼 저 골목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요?"
비가 오는데다 버스와 차들이 다니고 있어 맞은 편 골목으로 사라졌다던 그 사내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진아가 성기에게 말했다.
"성기씨,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승희네 집에 바래다 줄 수 있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오빠, 우리도 따라갈 거에요."
인근 유료주차장에 세워 둔 승희 차에 성기가 올라탔고 진아는 기사에게 삐삐를 쳤다. 연락을 받은 기사는 번호가 찍힌 주차장으로 전화를 했다. 주차관리인이 진아를 바꿔주자 진아가 위치를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기사는 주차장으로 잠시 뒤에 도착했다. 진아는 자신의 차에 미희와 수진이를 태우고 박정희까지 태웠다. 이어 진아 자신은 승희의 차를 몰았다.
수십 미터 떨어진 전신주 맡에서 스쿠터를 탄 사내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너는 내 여자야."
사내는 빗속을 뚫고 벤츠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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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월말 25일부터 31일까지는 직장일로 바빠서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기전이 연재되는 동안에 반복될 페이스 같네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