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 176 회: 5 -- > (176/230)

< -- 176 회: 5 -- >

도나까와는 그렇게 사라지는 성기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점점 작아지는 성기를 보며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흑인 새끼들, 어디에 입원했는지 찾아 내!"

"알겠습니다. 그런데 찾으면 보고만 할까요?"

"이 새끼야. 찾아서 소리없이 보내. 지옥으로! 감히 성기님을 건들이다니."

"알겠습니다."

성기는 정처없이 걸었다. 시간이 지나자 화도 점점 사라지더니 이제는 슬퍼졌다. 사랑하는 엄마와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여자들이 나가라니 너무나 슬퍼졌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미치도록 울고 싶어졌다. 도로를 보니 택시가 한대 지나가고 있었다.

성기는 무작정 택시를 세웠다. 택시 기사가 뒷좌석에 타는 성기와 검은 정장의 사내를 보고 한마디 했다.

"손님, 지금 교대시간이라 목적지로 가지 못합니다. 차고지로 가야하거든요. 미안합니다."

"뭐요? 그럼 차고지로 가요. 딱히 목적지도 없는데."

"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차고지가 상봉동인데요."

"네, 괜찮아요."

"너무 미안한데요. 그럼 제가 택시비는 절반만 받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멍하니 밖을 쳐다보던 성기였다. 기사가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손님, 다 왔습니다."

"벌써요?"

그제야 택시가 멈춰 선 것을 깨달은 성기는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주머니를 뒤져 택시비를 주고 내렸다.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성기는 저 멀리 보이는 산에 올라가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지만 자신은 이제 혼자라고 느껴졌다.

경호를 맡은 사내는 말없이 성기를 따라갔다. 성기는 목적한 산에 다다르자 배가 고파졌다. 버림받았는데 이렇게 배가 고프다니 정말이지 이율배반의 상황이었다. 마음과는 달리 본능에 충실한 육체는 신호를 보냈다. 꼬르륵. 소리가 나자 민망해진 성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산을 오르기 시작한 덕분인지 주변에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탈진 곳을 올라가 사람이 두 명 간신히 서 있을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털썩 주저앉은 성기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배도 고프고 여자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러다 성기는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 곁에 있던 경호원은 황당했다. 일본 사람들은 좀처럼 울지 않기에 더욱 성기의 울부짖음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경호원이었다. 하지만 성기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조직의 보스가 내린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시간 후 추워서 잠이 깬 성기는 또 다시 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보다 먼저 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성기 보다 위에서 우는지 울음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질 수 없다고 생각한 성기는 그 보다 더 크게 울었다. 그러자 그 사람도 아까보다 크게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용마산의 산자락에서 두 사람이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창문을 닫고 공포에 시달렸다. 때아닌 소동에 주민들은 경찰서에 신고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네? 여기는 중랑경찰서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저는 용마산 바로 아래 사는 주민인데요. 산에서 울음 소리가 계속 들려서 전화했습니다. 무서워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요? 언제 부터 그랬죠?"

"어제 부터 그랬는데 오늘은 소리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빨리 출동해서 귀신 잡아가세요. 빨리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형사는 너무 어이없는 전화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김형사! 전화를 받더니 웃고 말이야. 뭔 일인데?"

"나참 기가차서. 용마산에 울음 소리를 내는 귀신있다고 잡아가랍니다."

"또 장난전화야?"

사건과 실화 가십성 잡지사에도 전화가 걸려왔다. 

"거기 사건과 실화죠?"

"네, 여기 용마산에 귀신들이 울고 있어요."

"네?"

"용마산에 귀신이 출몰했다고. 빨리 와서 취재해!"

"여보세요? 왜 갑자기 반말하세요?"

"알려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리고 너네가 무슨 기자야! 야한 소재의 글이나 올리는 주제에."

"야! 이 씨발 놈아!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왜, 욕하고 지랄이야. 나도 욕할 수 있거든. 이 병신아. 육갑떨고 지랄이야. 나 낼모레 중학교 들어가야 하는데. 끊어 병신아!"

"야! 야! 야!"

"뚜우......뚜우......"

오늘 당직 순번이었던 대머리 김영관은 무지 열받았다. 가뜩이나 동남아로 가서 맞선 본 여자도 잘 되지가 않아서 열받는데 장난전화를 받으니 더 열이 뻗쳤다.

담배를 꼬나물고 창문을 열었다. 모두들 퇴근하고 이 밤에 혼자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장난 전화가 기름을 부은 것이다. 담배를 비벼끄고 서랍에서 허슬러 잡지를 꺼내들었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포르노 잡지를 보는 맛에 당직을 하겠다고 한 김영관부장이었다.

의자에 앉아 바지 지퍼를 내리고 물건을 꺼내들었다. 야한 포즈의 사진들을 보며 물건을 왔다갔다 하는데 갑자기 전화기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운데 물건을 내려놓고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한창 달아오르기 전인데 이런 일이 생기면 자위 행위를 하던 모든 남자들은 기운이 쫙 빠진다. 김영관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기는 사건과 실화입니다."

"거기 병신이 있나요?"

"누구요?"

"병신이요."

"잘못걸었습니다."

끊고나서 생각해보니 열이 뻗쳤다. 장난 전화였던 것이다. 다시 일분 후 전화가 울렸다. 또 다시 가운데 물건에서 손을 떼고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거기 병신이 있나요?"

"없거든요. 아 열받네."

"그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병신이거든요. 혹시 저한테 연락온 것 있나요?"

"뭐라고?"

"그래, 병신아. 찾아와 봐!"

한편 다음날 아침까지 울음 소리를 내던 성기와 위에 있던 사람은 더는 우는 소리를 낼 기운이 없었는지 각기 바닥에 누워 헐떨거렸다. 그러다 성기가 도저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위에 있던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갔다.

성기는 가던 도중 계곡 근처에서 밥 냄새가 풍기는 것을 맡았다. 체면 불구하고 그곳으로 갔더니 허름한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텐트를 쳐 놓고 밥을 푸는 중이었다. 노인이 밥을 푸다말고 성기를 보니 거지가 이런 거지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기 옷 여기저기에 흙과 나뭇잎이 묻어있었다.

"배고픈가?"

"네, 어르신. 한숟갈 먹고 갈 수 있나요?"

"젊은 놈이 일을 해서 먹어야지."

"죄송합니다.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요."

"여기 앉아서 먹어. 많이는 못줘. 나도 구걸해서 먹는 편이라서."

"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잊어도 돼. 뒤통수 치는 놈들이 하도 많은 세상이라."

걸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노인이 더러운 손으로 밥을 퍼주는데도 전혀 더럽다고 느끼지 못하는 성기였다. 지금 노인의 손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렵고 힘들 때 밥 한끼를 주는 손이었다. 경호원도 배가 고팠지만 애써 참았다. 무엇보다 그의 식욕을 떨어뜨린 것은 더러운 손과 더러운 노인의 옷때문이었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성기는 이렇게 용마산에서 또 한번 정신의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계기 일뿐 아직 깨우치지 않아서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성기가 한 숟가락을 뜰 무렵 30대 초반의 말쑥한 사내가 노인에게 정중히 말을 걸었다.

"어르신. 저도 배가 고픈데."

"이놈들 보게. 젊은 놈들이 일해서 벌어 먹어야지. 나처럼 힘없는 노인 것을 뺏어먹으려 들어."

"배가 고파서 그렇습니다."

"나 말고 청량리에 가 봐. 거기 최일도라는 목사가 자네같은 사람들에게 공짜로 밥을 나눠준대. 거기서 밥 얻어 먹고 제대로 살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