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 170 회: 5 -- > (170/230)

< -- 170 회: 5 -- >

그렇게 504호 병실은 한중령과 지혜, 다혜, 선혜, 그리고 아픔을 무릅쓰고 성기에게 달려든 정지연까지 합해 다섯 명의 여자와 성기가 뜨겁게 살과 살을 불태웠다. 다음날 새벽 뜨거운 몸을 달래려 김간호사를 비롯한 젊은 간호사 네 명이 잠긴 504호를 애타게 두들겼다. 

복도에 있어야 할 당직 간호사조차 무리에 끼어 한 시간 가량을 두들겨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비상키를 겨우 찾아서 잠긴 504호를 열고 들어간 네 여자는 벌거벗은 여자들이 널브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호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되었다며 그녀들은 문을 잠그자 마자 옷을 벗고 성기에게 달려들었다.

그날 새벽 두시부터 여명이 트는 시간까지 간호사 네 명과 또다시 살을 태운 성기였다. 새벽에 눈을 뜨고 나서야 이 모든 일을 깨달은 성기는 기겁했다. 자신의 몸은 실오라가 한올 걸치지 않은 나체였고 여자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체여서 잠들어 있을 동안의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몽둥이를 들여다보니 수많은 눈물이 묻혀져 끈적거렸다. 끈적거리는 몽둥이를 휴지로 닦고 속옷과 바지를 챙겨입었다. 주변을 보니 자신이 폭발하지 않았는지 여자들의 은밀한 부위는 핏물과 눈물만 범벅인 상태였다. 다행이라고 여기며 나머지 옷을 챙겨 입었다.

성기는 또다시 여인을 책임져야 하는 사태를 맞자 한숨을 내쉬었다. 여덟 명의 여자와 정사를 치뤘으니 기운이 없어야 하지만 도리어 성기의 얼굴은 피로가 싹 가신 사람마냥 기운이 펄펄 넘쳐났다. 

잠시 후 하나 둘 깨어난 여자들은 성기에게 안기며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이어 그녀들은 각자 옷을 챙겨입고 나갔다. 나가기 전에 그녀들은 이제부터 성기 당신만을 위해 살고 당신곁에 평생 머물고 싶다고 했다. 만약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뉴스에 한강으로 뛰어드는 여자가 나온다면 자신들이라고 말했다. 

전날 병원에서 봉변당한 김현철은 집에 도착하고 나서 이상한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이 폭행을 당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라며 애써 자위했다. 그리고는 살이 훤히 보이는 잠옷을 입은 부인 옆에 눈을 감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고 누군가가 자꾸 떠오르자 짜증이 밀려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의 젖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컹한 젖가슴이 만져지면 늘 가운데 물건이 섰던 김현철은 평소와는 다른 무반응에 놀랐다. 젖가슴을 만지면 만질수록 희미한 사내의 얼굴이 점점 뚜렷이 떠올랐다.

그 사내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잠든 부인이 깨어나 김현철을 부르며 안겨왔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은 김현철이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애써 눈을 감았다.

"여보! 잘거야?"

"응! 어서 자."

"자기가 날 깨워놓고. 이렇게 만지고 있는 손은 누구 손인데 그래?"

"그냥 오늘은 만지면서 자고 싶어서 그래. 어서 자!"

"알았어. 그리고 아까 일은 잊어. 미친 놈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고."

"신경안써."

안기는 부인을 꼭 끌어안으며 김현철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다행이도 불이 꺼져 있어 부인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김현철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분노가 들끓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좀 전부터 그런 일들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사내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김현철은 피곤했지만 샤워실로 들어가 찬물에 몸을 맡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그 사내 얼굴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부인이 차린 아침을 먹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로 향했다. 증권가에 근무하는 여자들이 계절이라 그런지 짧은 치마를 입어 날씬한 다리를 뽐냈지만 김현철의 눈에는 멋하나 없는 대나무로 보일 뿐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예쁘고 가슴이 큰 여직원 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눈길이 가지 않았다. 평소하면 한번 힐끗 쳐다보았을 몸매였지만 오늘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청와대 김보좌관님이 좀 전에 연락했었습니다. 아직 출근 전이라 말씀드렸더니 오시는대로 연락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직원이 녹차 잔과 신문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김현철은 어제 일을 보고 받으려는 김보좌관의 연락이 이전과는 달리 반갑지가 않았다. 냉랭한 표정으로 김현철은 말했다.

"알았어.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연결하지도 말고 들여보내지도 마. 집요하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모른다고 해. 알았지?"

여비서는 김현철의 지시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가서 일 봐."

"네!"

한 시간이 넘도록 창밖을 보았지만 머리 속에서 그 사내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을 떠올리자 키스가, 손을 떠올리자 부드럽게 쓰다듬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자위하고 바쁘게 일을 해야 생각이 덜 날 것 같아 의자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 김현철입니다."

"이 사람아. 내가 좀전까지 전화했는데 비서에게 말도 안하고 나가면 어떡하나! 지금 급한 일이 생겼어."

"어제 일로?"

"아니야. 자네 아버님이 김변호사 논현동 자택에서 비밀리에 그 여성분과 만나려고 하시나 봐."

"또요? 이제는 조심하셔야 할 위치인데."

그렇게 말하는 김현철의 표정은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그 남자 생각으로 가득해 다른 일은 들어오지도 않는 판국이었다.

"그러게 말일세.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는데 어떡하나?"

"알았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여자분의 지인이 오늘 김포 공항으로 귀국한다는 거야."

"그 일과 제가 무슨 상관이?"

"이 사람아. 말 끝까지 들어! 자네는 그 사람을 태워서 논현동에 내려주면 되는 거야."

"그런 일은 비서가 해도......"

"우리가 나서고 싶어도 여기 청와대 기자들이 일거수일투족을 보는데 어떡하나?"

"네, 알겠습니다. 도착 시간이 몇시고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사진이나 인상 파악을 팩스로 보내주십시요."

"딴 사람 시키면 안되네. 어르신이 부탁한 걸세."

"아버님이요?"

"그래!"

"알겠습니다."

몇시간 후 김포공항에서 사슴처럼 큰 눈망울에 긴 속눈썹이 돋보이는 금발의 여자를 김현철은 맞이했다. 자연스러운 황금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 걸을 때마다 찰랑 찰랑 흔들렸다. 

오똑한 콧날과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워 보이는 양 볼, 도톰한 붉은 입술까지 완벽한 미를 자랑했다. 탱탱한 엉덩이와 풍만한 젖가슴에 비해 한줌밖에 안되 보이는 허리는 남자들의 시선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금발 미녀 혼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귀여운 여자애 두명과 함께 있었다. 김지선(당시 13세), 김지영(당시 11세)는 금발 여자의 양손을 나눠잡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어렸지만 훗날 대단한 미인으로 자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예쁘고 귀여웠다. 겁을 먹은 듯 큰 눈에 잔뜩 경계심을 품고 있었고 금발 미녀의 손을 꼭 잡은 것이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금발 미녀는 출국장을 빠져나와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발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하얀 면티와 청바지를 입었지만 주위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공항내 이리저리 각자의 길을 가려던 남자들도 시간이 정지한 듯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현철의 머리 보다도 하나가 더 큰 금발 미녀는 김현철이 내건 피켓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다가갔다. 김현철은 그녀의 숨막히는 미모가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에 자리잡은 성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에 전혀 선망의 눈을 보내지 않는 김현철에 약간 놀라는 금발 미녀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31살로 하버드대를 졸업한 재원에다 1993년 현재 미국 레이시온사의 부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오늘 방한한 이유는 91년 부터 한국 정부가 추진한 백두사업에 시험평가를 받기 위함이었다. 평가에 참여할 기술진은 이틀 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시험 평가는 다음 주 수요일에 치뤄질 것이다. 그 전에 백두사업단의 실세들과 비밀리에 만나 리베이트를 전해주는 것이 그녀가 나선 이유였다.

프랑스 닷소사와 미국 세스나사가 투서를 보내 의혹이 일고 있다지만 한국 정부는 그리 깨끗하지 않다고 정보통을 동원해 알아낸 크리스티나였다. 경쟁에서 밀려난 떨거지들이 어디서 장난질인지 웃음이 나왔다.

그녀와 아이들은 김현철의 차에 올라탔다. 김현철은 기사에게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랜져승용차는 부릉 소리와 함께  빠르게 전진하며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