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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에 있던 간호사와 성기는 전복된 차에서 굴렀지만 천만다행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팔다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피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찌그러진 구급차에서 간신히 두 사람을 구해냈다. 구급차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타고 있던 구급대원은 안전벨트를 맨 덕분인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미군의 핏자국이 선명한 성기의 얼굴이 흉칙해 구급대원조차도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다.
여자들이 선뜻 나서서 성기를 업고 양지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혜는 무릎이 휘청했지만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사람에게 이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듯 싶었다. 아니, 그 보다도 더한 것을 해주고 싶었다.
성기친구들에게 다른 사람을 구하라며 세 여자는 성기를 업고 성큼성큼 걸었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친구들은 다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 다녔다.
옆에서 성기를 받치던 지혜와 선혜가 성기의 팔과 다리에서 흐르는 피에 손목이 핏물로 번져나갔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빨리 응급실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혜 역시 성기가 흘린 피로 등이 홍건히 젖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병원 현관에 나와 있던 한 중령은 여자에 업힌 사내가 매우 눈에 익숙한 성기임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설마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소말리아의 병원에 입원했던 성기였다. 성기의 이마가 살짝 찢어졌는지 피가 홍건히 흘러나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막는 한 중령이었다.
뒤를 이어 사람들에 업힌 사고의 피해자들이 속속 응급실 문을 통과했다. 난데없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대거 몰리자 당직을 서던 간호사와 의사의 손길이 바빠졌다.
"아악! 살려줘!"
"김간호사. 빨리 지혈해요."
"네, 선생님!"
"우리가 더 급해요. 의사 선생님! 여기 환자가 죽어간다고요."
"모두 다 중한 환자입니다. 좀만 기다리세요."
다음날 아침까지 성기의 상태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일단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의사의 말에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세 여자도 가까운 고시촌의 학원으로 돌아가 찢어진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가는 길에 성기가 외박을 하게 되어 걱정하실 것 같아 성기가 알려준 번호로 한돌이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 소리와 함께 낯선 여자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여보세요?"
혀짧은 소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외국 사람같은데, 한돌이는 생각했다. 어머님이 어디 가셨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돌이가 말했다.
"거기 성기네 집 맞아요?"
"네, 맞는데요."
"성기 어머님 계세요?"
"지금 주무시고 계신데요. 급한 일이 아니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이따 전해드릴게요."
성기의 상태도 나아졌는데 괜히 말을 꺼내 어머님에게 걱정 끼치는 것 같아서 사실대로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한돌이는 그냥 끊기로 작정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따 병원에 가서 성기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온 한돌이는 집을 향해 뛰어갔다.
한편 서울대병원 성폭행사건을 비밀리에 수사하던 나검사는 어제 오후 차장검사에게 불려나가 요즘 정신을 어디다 두고 일하냐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이어 차장 검사가 검은 파일을 던져주며 다미선교회 사건을 맡으라고 했다. 핵심 내용이 피고 김진선을 닦달해 어떻게든 빼돌린 자금을 알아내고, 일본측과 접촉한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내라는 것이다.
밤 늦게 들어온 나 검사는 부모님의 얼굴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 큰 처녀가 어딜 그렇게 늦게 들어오니?"
"엄마는. 내가 뭐 대학생이야. 일하다 늦게 들어온 걸 가지고."
"이것아! 어제 우리 차가 도둑 맞을 뻔 했어.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무서워서 나가지를 못하겠어."
"정말이야?"
말을 마친 나 검사의 어머니는 어제 그일을 떠올리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옆에 앉아 있던 반백의 중후한 남편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진정해. 그리고 머리 속으로 나쁜 일은 생각하지 마. 알았지?"
"네, 여보. 그래도 어제 도둑을 잡은 학생한테는 사례하고 싶거든요."
"내가 알아볼게. 그러니 어서 식사나 합시다."
"아니야. 아빠! 내가 알아볼게. 내가 누구야. 두 분의 사랑스러운 딸이자 대한민국의 검사잖아."
"그래, 그럼 아빠는 딸만 믿는다."
"알았어. 아빠. 내가 출근하자마자 알아 볼게요."
"아주머니, 집사람 국좀 다시 데우세요. 여보! 그만 신경쓰라니깐."
나검사의 아버지이자 부인의 남편이 시중들던 가정부에게 부탁했다. 가정부는 사모님의 국을 다시 가져가며 데우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어제 그 도둑 생각한 것이 아니고 잡아준 학생 생각했지. 요즘 그런 사람 드물잖아요. 안 그래요?"
"그래. 어제 들어와서 당신 이야기 들으면서 많이 생각했어. 내가 알아서 보상할테니 그만하고 식사해."
"네, 여보."
"흥! 아빠는 엄마만 보이는 거야?"
"이것아! 너도 결혼해 봐. 딸자식은 다 소용없다는 것을 느낄테니."
"난 결혼 안 할거야."
그날 오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의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지도자& 리더쉽 연구소입니다."
"여기 청와대입니다. 김현철씨 부탁드립니다."
"네, 김보좌관님. 바로 연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받은 여비서가 맞은 편에 앉은 비서에게 윙크를 했다. 그러자 알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철의 사무실을 노크했다.
"들어와!"
"네! 청와대 김보좌관님 전화입니다."
"그래? 빨리 연결해! 문닫고 나가고."
"네, 알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 여비서의 쭉빠진 다리를 훔쳐보며 김현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김보좌님. 오늘은 어쩐 일로 연락을 하셨습니까?"
"어쩐 일이긴요. 아무래도 아버님을 대신해 병문안좀 다녀오셔야 할 것 같아요."
"뜬금없이 무슨 병문안요? 신문을 매일 보는데 중요 인물들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는 없던데......"
김현철은 확신할 수가 없어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의 내연의 여자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것은 아니고. 오늘 새벽에 정덕진씨의 아들과 딸이 교통사고로 입원했답니다. 그래서 극비리에 다녀오라는 겁니다."
"아버님도 알고 계세요?"
"보고는 드렸지만 지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서들 하라고 말씀만 하셨거든요."
"음......알겠습니다. 제가 가 보죠."
"되도록이면 언론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갔다 오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것도 모르는 바보입니까. 신신당부 안하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님 수발이나 잘 살펴주세요."
"네! 이만 끊습니다."
"네!"
수화기를 내려놓고 김현철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씨 형제는 대선 전에 아버님에게 많은 정치자금을 댄 후원자였다. 그들은 대선 후에도 전화로 안부를 물어볼 정도로 친분을 유지했었다. 그러던 것이 저 좆도 모르는 홍준표라는 녀석이 칼을 대면서부터 정씨형제와의 사이가 급속도로 냉랭해진 것이다.
정씨 형제는 여태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던 자신들을 나몰라, 안면몰수하는 김영삼과 정치권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정씨 형제가 아직 밝히지 않은 것이 있다며 언론에 까발리지 않았던 사실까지 떠벌리면 입장이 곤란한 것은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었다.
그렇기에 김현철이 나서서 정씨 형제를 달래줘야했다. 이를 악물고 김현철은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는 무척이나 화창해서 이런 날에는 계곡으로 놀러가는 것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김현철은 양복 상의를 입더니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기사가 재빠르게 뒤를 쫓아 나갔다. 예쁘장한 여 비서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좋아했다.
닫히지 않은 사무실 문틈으로 그가 걸어둔 족구가 보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조심하자.' 는 표어가 아무도 없는 그의 책상을 내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