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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약속을 정하면 무작정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30분정도 기다리는 것은 예사였고 그보다 더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이유는 친구들 가운데 꼭 늑장을 부리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성기는 허겁지겁 뛰며 마부에 도착했더니 한돌이가 구석에서 술과 안주를 시켜놓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성기는 자리에 앉았다. 한돌이는 잔을 권하며 술을 따랐다.
"새끼야. 너 그럴 줄 알고 미리 술과 안주 시켜 버렸다."
"잘했어. 남순이는?"
"그 새끼 늦는 거 한두 번이냐. 술 먹다 보면 나오겠지."
"미안해. 오다가 차량 절도범 잡아서 경찰서 갔다 왔잖아."
"정말이야? 오우, 우리 성기가 그런 일도 하다니.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한돌이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성급히 물었다. 성기는 그런 한돌이에게 안주를 권했다.
"말할게. 우선 안주나 먹어. 그러다 속 버려."
"알았어. 빨리 말해 봐!"
성기는 아까 전의 상황을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밀 때와 똑같이 설명을 했다. 그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입구에서 큰 덩치의 남순이가 서성거렸다. 개구리 군복을 입은 모습이 남자다워 보이는 남순이였다.
"야, 남순아. 여기야! 여기!"
"새끼들, 왜 구석에 쳐 박혔냐?"
"오랜만이다. 남순아!"
"방위 세월 좋다. 근데 오늘 뭔 날인데 이렇게 일찍 끝났냐?"
"포상휴가야. 멍청한 놈!"
"가평에서 장갑차랑 뺑이 치는 날 줘야지. 방위를 왜 주냐? 이놈의 국방부는 정말이지 머리가 텅텅 빈 놈만 있는 건지."
"너도 훈련 열라 잘 받으면 나올 거야. 하하하."
"장난 하냐? 이것도 겨우 받아서 나온 건데? 일단 목마르니깐 맥주 한잔하고 소주먹자. 이 새끼들. 벌써 소주 때리면 어떡해?"
"또 크라운 타령이다."
"자식인 나라도 많이 먹어야지. 어떡하나."
남순이 아버님은 크라운 맥주에 다니셨는데 앞으로 5년 후에는 정년퇴직을 하신다고 했다. 남순이 아버지의 소원은 OB맥주를 매출로 이겨보는 것이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아 보였다. 아들 친구들조차 남순이가 없으면 OB 맥주를 먹으니 말이다.
"아가씨, 여기 크라운 맥주 세병 줘요."
"야, 호프 시켜!"
"나 오랜만에 사제 공기 마시는데 돈 아깝다고 안 쓸 거냐?"
"알았어. 알았어. 그만 해."
"이 새끼는 돈도 많으면서 안 그러냐? 성기야!"
"오늘은 한돌이 말고 내가 쏠게. 맘 편히 먹어."
"왜?"
한돌이와 남순이가 눈을 크게 뜨고 성기를 쳐다보았다. 성기는 가끔 쏘기는 했지만 오늘 쏠 차례가 아니었기에 둘은 놀란 눈을 한 것이었다. 소말리아 파병 이야기는 전역 후까지는 말하지 말라고 이 중령이 신신 당부했었다. 거기서 받은 훈장과 상금은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한다고 해도 친구들조차 웃을 것이다. 현역들도 지천으로 깔렸는데 방위가 파병을 가다니, 웃기는 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오늘 어머니가 용돈 주셨어."
"어머니가 힘든 일 하셔서 버셨는데 그냥 한돌이보고 내라고 해. 안 그러냐? 한돌아!"
"그래, 성기야. 내가 쏠게. 내가 너희들 보다는 여유가 있잖니."
한돌이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장이셨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선생들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한돌이 부모님은 용돈을 늘 풍족하게 주셨는데 그 용돈으로 친구들에게 술을 사준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한돌이네 집에서 잘 때 아버님이 아끼시는 양주를 몰래 먹곤 했다.
그럴 적마다 아버님은 모른 척 눈감아 주셔서 그게 오히려 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끼게 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 죄송스런 마음은 잠시였다. 한돌이 집을 들를 때마다 닦달해 평소 구경하기 힘든 양주를 꼴깍 꼴깍 입으로 쳐 넘기는 성기와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한돌이는 그 점에 대해서 한 번도 불평을 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점원이 다가와 남순이란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 남순이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갔다. 성기와 한돌이는 잔을 들며 의아해 하는데 남순이가 낯선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애들아. 우리 학교 선배야. 인사해."
"아, 그래. 선배님! 안녕하세요. 전 남순이 친구 성기입니다."
"전 한돌이라고 합니다."
"그래, 남순이 통해서 이야기 들었어. 난 남순이 학과 선배고 이름은 나성철이라고 해. 말 편히 놓을게."
"네. 그러세요."
"미리 말을 못했는데 이 근처로 와서 저녁 사준다고 해서 여기로 오라고 했어. 괜찮지?"
"응."
늘 보던 얼굴들에서 낯선 선배가 끼어서 분위기는 잠시 어색했지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니 금세 불편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남순이가 다니는 학과는 한신대학교 경영학과였다. 한신대는 전반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선배 역시 술이 들어가고 나니 남순이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민주화 투사 김영삼이 그가 평생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세력과 야합해 대통령이 되다니 미친놈이지. 또 그것을 뽑아 준 놈들도 병신 놈들이고 말이야."
선배의 말에 의하면 1990년 1월 22일 당시 대통령이자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3인의 청와대 회동과 더불어 3당합당 공동발표문이 나왔다고 한다. 그 때 성기와 친구들은 대입 재수를 하느라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3당합당은 통합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민주화세력의 분열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 분열의 효과는 기존 '민주-반민주' 구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으며, 기존 도덕 체계마저 뒤흔들었다고 성토하며 나선배는 분개했다.
"김영삼이 언젠간 이런 말을 기자들에게 한 적이 있지. 무신불위(無信不立 )라고 떠들던 소리가 기억나는군. 인간사회에서 신의가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하게 되어있지. 개 새끼! 저런 놈이 대통령이니 조만간 나라 꼴 우습게 될 거야."
"선배님! 주변 사람들이 들어요?"
"들으면 뭐 어때? 내 입갖고 내가 욕하는데."
"그만하시고 우리 건배해요."
그렇게 건배를 하고 잔을 비웠더니 나 선배가 또 말을 이어갔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속으로 담아두게 만드는 한국사회였다. 그렇기에 나 선배도 후배들 앞에서라도 울분을 토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미군에 의해 희생당하는 우리 나라 여자들이 불쌍하다. 죄를 지었으면 제대로 처리해야지. 미국 새끼들 눈치는 허벌나게 보면서 말이야. 작년의 윤금이씨 사건도 그렇고 석 달 전에 벌어 성폭행 사건도 언론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본국으로 송환될 뻔했어."
"알고는 있는데, 자세히는 몰라요."
"저도 조금밖에는. 선배가 애기 해줘요."
"새끼들아. 입시 공부에 쳐박히지 말고 그런 뉴스나 읽으면서 사회 공부를 해. 그러니 요즘 젊은 애들을 보면 답답하다니깐."
"선배님, 우리 재수하고 들어와서 작년에 신나게 놀았거든요. 미안해요."
"맨 술만 쳐 먹었는데."
케네스 마클의 윤금이씨 살해사건은 92년 10월 28일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씨(26세)를 미 8군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20세)이 머리를 콜라병으로 무차별 난타하고 자궁에 콜라병을 쑤셔 넣고 항문에는 우산대를 꽃아 살해한 사건이었다.
나 선배의 울분에 찬 설명이 이어졌다. 93년 5월 29일 서울 서초동에서 레벤호프를 운영하는 김국혜씨(53세)를 샬로이스 병장(27세)가 구타와 성폭행을 가해 뇌 골절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후에 샬로이스는 김영삼 정부의 8. 15 특사로 95년에 석방된다.
"이런 쳐죽일 놈들."
"아, 열 받네."
성기는 소말리아로 가는 준비 탓에 서초동 사건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그 여자와 아무런 친분이 없었지만 마치 아는 분이 당한 것처럼 느껴져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요즘 너희들 어학연수다 뭐다 떠나잖아."
"네, 근데 왜요?"
"왜긴. 이렇게 소식을 모르니 너희들 진짜 답답하다. 선배로서 말하는데 신문 좀 읽고 다녀라."
"읽을게요. 말하려던 것이나 먼저 말해줘요."
"어학원에 등록한 우리나라 여자애들을 학원 강사들이 그렇게 따먹고 돌아다닌댄다."
"그런 일이 있어요?"
"정말이요? 씨발 놈들이, 우리나라 여자애들이 열매라도 된답니까. 따먹고 돌아다니게."
마치 자신의 여자 친구, 여동생이 당한 것처럼 성기와 친구들은 화를 냈고 술을 마구 들이켰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셨더니 벌써 술집이 닫을 시간이 되었는지 이별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사장으로 보이는 젊은 아줌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손님들, 문 닫을 시간이에요. 마무리하세요."
성기와 친구들, 그리고 나 선배의 입에서 동시에 욕이 튀어나왔다.
"씨발, 좆도. 술도 마음 놓고 못 먹게 만드는 대한민국 엿 같아!"
"선배님, 술 사갖고 여관 가서 더 마실까요?"
"그러지 말고 저기 고시촌에 새벽까지 하는 술집이 있으니깐 그쪽으로 가자."
"정말? 너 위치 아는 거지?"
"알아! 믿고 따라 와!"
한쪽에서는 법을 따르지만 또 한쪽에서는 법을 우습게 알고 영업했다. 당시 모든 술집은 12시까지만 영업을 하게 되어 있어서 많은 술꾼들이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대한이를 한돌이로 변경했습니다. 나라를 비하한다나 어쩐다나.....
*****연재 속도가 느린 점!!! 학수고대하시는 매니아 분께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고증과 사건들을 스토리 라인에 배치하느라 힘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허접하게 쓸 수는 없잖아요.
매일 매일 한편씩은 꾸준하게 올릴 테니 완결까지
인내심갖고 지켜봐주세요.
늘 가정에 평안하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