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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5시가 되어 유엔평화유지군 사령부에는 군용 차량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대부분 각 나라에서 지휘관들이 타고 있는 차량들이어서 그런지 차량을 통제하는 헌병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나타나는 지휘관에게도 순서를 지켜 입장할 것을 권고하는 헌병이었다.
한국군 지휘관과 성기를 태운 3대의 지프에서 내려섰다. 모두 깔끔한 정복차림이었다. 방위인 성기도 어디서 준비했는지 A급 훈련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 중령의 특별 지시에 의해 여분의 개구리복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그렇다고 성기에게 입으라고 장교가 입던 개구리복을 내줄 수가 없었다. 이름이 새겨진 장교의 군복은 그 자체로 장교의 자존심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뜻밖의 반대에 부딪친 이 중령은 반대하는 장교들을 패주고 싶지만 귀국길이 멀지 않아 곧 부대도 해체가 되는데다, 오후에 수여식이 있는 기분 좋은 날에 화를 내고 싶지가 않아 우선 당장은 참기로 했다. 그렇다고 너저분한 훈련복 차림으로는 국격이 서지 않는 자리였다. 그동안 얼마나 삽질을 심하게 했으면 유격 때 입는 훈련복마냥 지저분했다. 그런 것을 입고갈 수는 없었기에 신품 훈련복을 주었기에 입은 성기였다.
사회를 맡은 미군 장교가 나왔는데 눈에 익은 수잔이었는데 그녀를 알아본 성기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간단한 인사말과 회원국 간의 긴밀한 협조로 소말리아에서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지만 국적을 초월한 우정과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기의 귀에 그녀의 나긋나긋한 말이 들려 온몸이 흥분되었다.
그녀는 성기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다음 순서로 사령관의 연설이 있다고 말을 한 후 마이크에서 입을 떼었다. 그녀역시 정복 차림이어서 커리어 우먼처럼 보였다. 무세 수디 알라하우 사령관이 연단에서 일어나 마이크 앞에 섰다. 이어 사령관은 앉아 있는 많은 수의 지휘관들의 얼굴을 두루 살폈다.
무세 수디 알라하우 평화 유지군 사령관은 무정부 상태의 소말리아를 위해 헌신하는 각 국의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내용으로 말하더니 바로 이어서 최근에 흑인 군벌들의 연합으로 뺏긴 모가디슈 공방전에서 위기에 빠진 연합군 병사들의 목숨을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도 두려움 없이 구출에 필사의 노력을 다한 한국군 천일병의 활약을 모두에게 전했다.
강당 안은 수많은 선풍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고 듣고 있던 성기는 사령관이 길게 이야기를 하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최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고장 난 라디오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 같아 속으로 성기는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곁에 있던 박 중위와 최 소위가 성기에게 어서 앞으로 나가라고 손으로 떠밀었다.
어리둥절한 성기의 눈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이 중령이 시끄러운 박수 소리에 묻히지 않게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천일병! 어서 나가!”
“네? 네! 알겠습니다.”
연단으로 뛰어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연단 구석에 있던 수잔이 나타나 성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녀는 안내하며 팔로 성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사랑한다는 기색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성기 역시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바로 키스하고 뜨거운 팔로 그녀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어졌다.
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성기의 눈에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였다. 사령관이 그에게 메달을 걸어주고 뒤에 있던 여군 장교가 꽃다발을 성기에게 건네주었다. 다시 한번 강당이 떠나가도록 박수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지휘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과 흠모의 눈빛으로 성기를 바라보았다. 성기는 사령관과 악수를 한 뒤 정면으로 차렷 자세를 취한 후 박수치는 지휘관들에게 경례했다.
“충성!”
와아!
사그라지던 박수 소리와 함성이 강당을 떠나가도록 울렸다. 성기는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성기는 수잔의 손에 이끌려 연단 뒤로 퇴장했다. 하지만 성기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박수 소리와 함성은 여전히 강당을 가득 메웠다.
강당 뒤로 가자 이번 성기의 훈장에 직접 내용을 상신했던 스웨덴군 장교들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성기가 나타나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성기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들 모두에게 인사하다 완전군장을 돌았을 때 성기의 스테이크를 잘라주던 여자가 정복 차림으로 있어 성기는 깜짝 놀랐다. 그때는 제대로 말도 못해 고마움을 전하지 못해 성기는 늘 마음에 걸렸었다. 물론 그 스테이크는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이 중사가 다 먹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칼 소령이 성기의 어깨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이어 다른 장교가 성기의 손을 잡고 스웨덴 말을 지껄이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이윽고 그 여 장교와 악수를 하는데 그녀의 손바닥은 마치 여자의 동굴 속살처럼 매우 부드러워 성기를 흥분시켰다. 그녀 역시 성기를 알고 있었는지 성기의 귀에 대고 영어로 뭐라 떠들었는데 성기는 그냥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있었다.
잠시 후 리셉션이 열리는지 수잔이 다가와 성기를 잡아끌었다. 성기와 악수하고 아직까지 손을 놓지 않는 그녀를 노려보는 수잔이었다. 수잔의 기세에 그녀는 대담하게도 성기의 볼에 뽀뽀를 하더니 뭐라 말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성기는 사라지는 그녀를 보다 수잔이 손을 잡고 보챘다.
수잔이 성기를 끌고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허름한 창고였다. 임시 가건물로 지어진 강당 깊숙한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빛도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인적도 드물었다. 창고 문을 닫고 그녀는 여군 들이 입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성기의 손을 자신의 은밀한 부위로 안내했다.
창고는 천정과 닿은 유리창이 유일한 빛의 창구였는지 성기는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 수잔의 옷을 벗겨 나갔다. 성기의 입은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고 두 손은 부산하게 움직여 그녀의 몸을 태초의 이브로 바꾸어 버렸다. 수잔 역시 성기의 옷을 벗겨 이브에 걸맞은 아담으로 만들었다. 둘은 창고의 먼지가 창문으로 빠져나가도록 살과 살을 들썩였다.
한참 후 성기와 수잔은 옷을 챙겨 입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리셉션에 참석한 성기는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녔지만 영어를 하지 못하는 성기로서는 그냥 묵묵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다행이도 이 중령을 비롯한 한국군 장교들을 바로 만나 함께 다니며 주위의 지휘관들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샴페인과 포도주로 건배했고 한편에서 구워지고 있는 바비큐를 뜯었다.
유엔 평화유지군 리셉션 관례에 따라 전 사령관과 보좌관들,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도 리셉션에 참석했는지 한국군 장교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영양가가 없다고 여겼는지 가볍게 목례를 나누고는 현직 사령관을 찾으러 자리를 떠났고 이 소령과 김중위는 배가 고팠는지 바비큐를 접시에 담기 위해 좀 전에 자리를 비워 성기와 김 대위, 박 중위, 최 소위가 있었지만 이내 김 대위는 이 중령을 쫓아갔다.
눈썹이 진한 사내가 선 굵은 목소리로 자신들을 소개했지만 박 중위와 최 소위는 영어가 서툴러 선뜻 나서지는 않았다. 성기 역시 영어에는 젬병이어서 그냥 눈만 멀뚱히 뜨고서 고개만 끄덕이고 입가에 미소만 지었다.
전직 사령관을 지냈던 로널드는 나이가 50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만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오년을 살았던 부인과 이혼했다. 로널드와 3개월 전에 결혼한 로라는 현재 33살로 미스 스페인을 수상하며 그 화려한 미모로 수많은 남성 팬을 거느린 스페인 영화배우였다.
그러다 파티에서 로널드를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의 사랑을 얻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로라가 로널드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돈 때문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로널드는 억만장자의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군을 떠나 자유롭게 살았던 것이다. 로라에게 접근한 남자들도 많았지만 돈을 보고 로널드에게 추파를 던진 여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이틀 전에 도착한 로널드는 음식이 맞지 않았는지 설사를 해서 오늘 리셉션도 참석해야할지 많이 고민했지만 로라가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보좌관들은 속이 불편하면 참석하지 말고 쉬라고 권유했지만 로라가 끊임없이 졸랐기 때문에 그 뜻을 꺽어야 했다.
로라는 요즘 욕구불만에 시달렸다. 기대와는 달리 잠자리에서 부실한 모습을 보이는 로널드는 최근 그녀를 기피했고 급기야 각방까지 쓰고 있어 더욱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젊은 남자들이 있는 리셉션이나 파티에 참석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날이면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의 관심을 샀던 로라와 뜨겁게 몸을 불살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로라와 로널드가 보좌관의 안내를 받아 성기 앞에 섰다. 성기의 눈에 중년의 남자는 무척이나 강인해 보였고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드레스가 터져나갈 듯 가슴이 풍만하고 다리는 훤칠하게 쭉 빠져있어 매우 육감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성기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부부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무어라고 떠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성기는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기의 군복을 예의 주시하던 중년 남자, 로널드가 성기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말했기에 성기 역시 그들의 부단한 대화 의지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콩글리쉬로 성의껏 대답했다.
“What's your job?”
“아르바이트 솔져!”
성기의 대답에 부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옆에서 가만히 있던 박 중위와 최 소위는 갑자기 웃음이 터지며 입안에 있던 샴페인을 뿜었다. 다행이도 박 중위와 최 소위는 손으로 급히 막아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 손으로 막으면서도 키득거리며 웃는 박 중위와 최 소위였다.
로널드와 로라, 그리고 보좌관들까지 성기의 말에 의구심을 표했다. 세상에 군인을 아르바이트로 하는 녀석이 있다니, 경외의 눈으로 성기를 바라보며 로널드가 재차 물었다.
“what do you mean?”
기본적인 회화여서 성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Arbeit soldier”
가까스로 웃음을 참던 박 중위와 최 소위는 배를 잡고 쓰러졌다. 그 모습에 로널드는 성기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고 버럭 화를 내다 갑자기 쓰러졌다. 보좌관들과 부인 로라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성기 역시 잔을 내려놓고 로널드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로널드는 꿈쩍하지 않았다.
보좌관들은 급히 의사를 부르러 가는 사람과 차량을 가지러 가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떠났고 성기와 부인 로라가 로널드의 팔을 잡고 그를 깨우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배꼽을 잡고 웃던 박 중위와 최 소위는 웃음을 추스르고 다가왔고 바비큐를 담으러 갔던 이 소령과 김 중위가 황급히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당시 방위병의 월급은 만원 전후였다고 합니다.
현역과는 달리 담배도 <솔>로 나왔다고.....
이제는 사라진 담배로군요.
솔, 백자, 청자도......우리네 할아버지가 줄곧 피우던 300, 400원 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