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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믹스는 기지 정문에 차를 세웠다. 성기는 내리면서 노믹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해주었다. 노믹스가 손사래를 하며 말했다.
"성기님,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성기님과 함께 귀국해서 한국에서 살테니 모른 척 마세요."
"알았어. 그만 가봐!"
"먼저 들어가세요. 들어가는 거 보고 떠날테니까요."
"그럼, 조심히 가!"
"네! 알겠어요."
성기는 자신이 사라져야 노믹스가 떠날 것 같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노믹스는 성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어서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을 찾고 싶었다. 부모님께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싶었다. 노믹스는 엑셀을 밟고 미군 기지가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K2 소총으로 겨누고는 관등성명을 대라고 했다.
"215연대 무기관리병 일병 천성기"
존대는 하고 싶지 않은 성기였다. 이곳에 파병 온 병사들 전부가 자기랑 같은 계급인 일병에다 방위였기 때문이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확인해 볼테니까. 그리고 너 복장이 그게 뭐야? 철모는 어디갔냐?"
반말을 내뱉으며 성기의 복장을 지적했다. 못마땅한듯 쳐다보는 병사를 성기역시 불쾌한 듯 바라보았다. 같은 일병인데 경계 근무선다고 아주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복장 불량의 잘못을 한 성기는 불리함을 깨닫고 나직히 말했다.
"알았어. 빨리 확인해! 나 들어가서 이대위님한테 보고해야하니까!"
병사는 옆의 초소로 들어가 전화를 걸고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한참을 통화한 병사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빨리 가봐!"
"그런데 장교님들 계신 곳이 어디냐?"
"것도 모르냐?"
이 새끼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왔더니 아주 새파란 놈이 시비를 거네. 성기는 많은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는 자였다. 여기에서 경계 근무나 서며 편안히 있지 않았기에 절로 성질이 다혈질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모르지. 장교님들 지시로 여기 오자마자 다른 곳에 파견갔었거든."
성기는 더 이상 애기하고 싶지 않아 둘러댔다. 병사는 철모 사이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부러운 듯 말했다.
"야아, 부러운데. 파견 어디 갔다왔는데?"
"나 바쁘거든. 어디냐구?"
"저기야. 새끼야!"
"뭐? 새끼? 너 이따가 이대위님한테 보고 드린 후 찾아갈테니깐 어디 소속이야?"
"뭘? 뭘 말해? 빨리 가기나 해!"
"빨리 사과 해! 너한테 내가 새끼라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거든."
성기는 성질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군홧발로 밟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지금부터 적응해야하는 자신이 속한 부대였기에 참아야 했다. 당장이라도 팰 것 같은 성기의 살기에 병사는 흠칫거렸다. 사람을 죽인자는 살기가 밴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미.....미안해."
"말 조심해! 이 새끼야!"
말을 마친 성기는 홀가분하게 병사가 좀전에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병사는 성기의 기에 눌려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새끼는 지도 욕하면서 지랄이야. 그나저나 저 새끼 갑자기 무섭게 느껴지는 거지?'
성기는 발걸음도 가볍게 동기들을 볼 생각으로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걸었다. 가는 도중 짚차가 앞으로 지나쳐갔다. 잠시 후 짚차는 후진을 하더니 성기 옆에 섰다. 성기는 호기심을 갖고 쳐다보았다.
짚차 안에는 완전군장을 메고 돌던 날 자신을 갈구었던 이중사가 타고 있었다. 성기를 보더니 얼굴을 확인한 그는 차에서 내렸다. 재수없는 이중사를 본 성기는 똥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곧바로 차렷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했다.
"충성!"
하지만 이중사는 성기의 경례를 받지도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로 성기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중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여태 어디 갔다 온 거야? 탈영이라도 할려고 그런거야? 그리고 철모는 어따 팔아먹은 거야? 이 새끼가 아주 빠져가지고. 잘하면 군복도 팔아먹겠다. 한심한 새끼!"
"아닙니다. 위험한 곳에 있었던 처지라 그렇게 된 겁니다."
"아니, 니가 어떻게 위험한 곳에 있었다는 거냐? 이제 아주 구라를 치네. 구라를."
스웨덴군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의 군에서도 성기의 생사를 매일 같이 확인하느라 영관급 장교들은 피곤했다. 그들이 성기의 영웅적 행동을 말해주었을 때는 이중희 중령과 이 소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국격을 높인 것이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렇지만 위관급이하 장교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자칫 소문이 나서 성기를 따라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거나 아니면 위험하다고 탈영할 수도 있었기에 극비로 취급했다.
당연히 말을 해주지 않아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위관급이하 장교들은 천성기 일병이 탈영했다고 판단했다. 수도 모가디슈가 공격 받은 날 이나경 소령이 성기를 구해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장교들은 부하의 탈영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이소령의 행동에 반한 장교들이 수시로 집적거렸다. 이 소령은 코웃음 치며 접근하는 장교들을 거부했다. 이미 그녀에게 평생을 함께 할 성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중사는 성기의 머리를 수차례 내리쳤고 성기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빨리 가봐! 이 대위와 이 소령이 널 찾으니깐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갔다와서 나좀 보자. 너를 아주 죽여주게 굴려줄 테니까. 너 때문에 그날 스테이크도 제대로 못먹었어."
"네! 알겠습니다."
성기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날 스테이크를 못 먹은 사람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금발 미녀가 잘라 준 스테이크를 뺏어가 혼자 다 쳐먹고서는 못 먹었다며 생떼를 부리다니 성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중사는 짚차에 올라타고 휭하니 가버렸다. 성기는 이를 부드득 갈며 노려보았다.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참아야 했다. 그것이 군대였기에, 계급이었기에 말이다.
성기는 머리를 굴려 이 대위보다는 이 소령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았다. 다행이도 지나가는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알려주었다. 그곳으로 걸어간 성기는 계단으로 올라가 여군 전용이라는 푯말을 보았다.
지금은 저녁 시간이 끝나가는 지라 소령은 숙소에 있다고 했다. 성기는 심호흡을 하고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마침 1층에 있던 김중위가 발견하고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거 남자 아니야. 여기는 여군전용인데. 혹시 그 날처럼 여자들을 덮치려는 변태! 그렇다면 그때처럼 내가 잡아서 짖이겨 놔야지.'
김중위는 좀전에 보았던 군인을 떠올리며 계단을 황급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