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7 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얻은 깨달음과 여자들 -- >
셰룸 소령의 지시로 흑인들은 성기와 노믹스 상병을 끌고 호텔샤모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가는 도중에 너무나 힘들어 성기는 여러 번 쓰러졌다. 완전 군장으로 지친 체력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급격히 피로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묶인 몸으로 10키로 이상을 걸었으니 기진맥진한 것은 당연했다. 노믹스 상병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쪽을 향해 쏘아대는 총소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총구에서 나오는 불꽃이 밤하늘을 밝게 했다. 가는 도중에 흑인들이 끌려가는 그들에게 침과 돌을 무수히 던졌지만 아무도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행이도 얼굴에는 맞지 않았지만 몸 여기저기에 날아든 돌멩이에 성기와 노믹스 상병은 죽을 맛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였기에 아픔은 배가 되었다.
밝아오는 여명에 어둠이 스러지듯 저 멀리서 빛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어둠의 자락을 헤치고 나타난 빛은 어제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성기는 그 빛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메마른 길을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칙칙한 기운의 마을이었다. 석회색으로 칠해진 건물에 잔뜩 때가 묻어 칙칙한 회색이 된 낡은 건물로 흑인들은 들어갔다. 성기와 노믹스 상병 또한 이끌려 따라갔다. 여러 방을 거쳐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자 카메라와 큰 침대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침대 옆에 미국의 국기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군벌들의 깃발도 반듯이 펼쳐 있었다. 성기와 노믹스 상병을 침대에 앉히고는 총부리를 겨누었다.
두 사람에게 아프리카어로 침을 튀어가며 말하는 것이 꼭 설교하는 목사님과 닮아 있었다. 성기는 속으로 저 새끼 강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겠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20분 가까이 흑인은 떠들었다.
입술이 두꺼워 밖으로 튀어나온 흑인은 자신의 말에 흡족한 듯 가슴을 탕탕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포로로 잡힌 두 사람을 가리키며 무어라 또 한참을 지껄이고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이어 군벌의 국기를 가리키고는 활짝 웃음을 짓는 흑인이었다.
성기는 귀찮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정신을 차려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감기는 눈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노믹스 상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졸았다. 한참 자기 흥에 겨워 떠들던 흑인은 노믹스 상병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으악!"
노믹스 상병은 깜짝 놀라 잠이 달아났는지 벌벌 떨며 예의 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용서를 구걸했다. 흑인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노믹스 상병의 따귀를 수차례 더 때렸다.
짝짝짝!
흑인은 노믹스 상병의 얼굴을 노려보고는 뒤를 돌아 나가버렸다. 성기는 뭐 이런 놈이 사내라고 생각하며 안쓰러움을 가졌지만 그 뿐이었다. 이 비겁한 놈때문에 미군 몇명이 죽었는지 호텔에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다 카메라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사진기가 아니라 비디오 카메라였다. 이 새끼들이 무얼 찍으려고 하나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물어본다고 알려줄 놈들도 아니고 영어도 모르니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좀 떨어진 방에서는 아름다운 자히라와 무기상 알리, 셰룸 소령과 자바리가 한데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자바리는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깐 소령은 사로잡은 포로들에게 소말리아 여성들을 강간하는 장면을 찍어 전 세계 방송에 뿌리겠다는 것이군."
사내답게 생긴 셰룸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순한 미제국주의는 우리를 침략했소. 그러니 우리 같은 힘없는 나라는 당할 수 밖에 없지 않소. 그 모습이 어찌 보면 미국이라는 강간범이 우리를 강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듣고 있던 자히라가 일어서며 진지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이 일과 무관한 여자들을 동원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만약 소령님 말씀대로 하신다면 우리가 미국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힘없는 여자들을 끌어다 희생삼는 것이.......전 이 계획에 동의할 수 없어요. 차라리 죽기 살기로 미국과 싸우는 것이 낫겠어요. 아니면 미국 본토에 자살 특공대를 보내든가. 이것 말고도 방법은 많잖아요."
셰룸 소령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살짝 나타났다. 그러자 자바리가 나서며 자히라를 자리에 앉혔다.
"소령님! 자비라가 무례하게 나선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자히라를 데리고 나온 것은 두 분에게 소개하기 위함이었는데 손님으로서 주인에게 감놔라 배놔라 하다니. 자히라가 아직 어리니 예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셰룸 소령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하하하, 미인의 투정은 보아 줄만하지. 괜찮소. 그나저나 오늘 계획대로 스웨덴 공주를 잡았어야 했는데 말이오. 아쉽게 되었소."
"그러게나 말입니다. 꼭 그년을 잡아 우리의 방패로 삼았어야 했는데.....제기랄!"
알리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 때 셰룸 소령이 자바리를 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곳에 있던 미군 병사도 무척이나 신분이 높은 분의 딸이 있었다고 하던데, 혹시 들은 바 없소?"
가만히 있던 자바리의 안색이 굳어버렸다. 그도 들은 정보가 있어 상원의원이자 군수 산업체의 회장의 딸이 호텔샤모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은 접했었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이 있는 군수 산업체라서 군벌들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를 내다본다면 스웨덴 공주보다도 수잔이라는 여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군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호텔샤모에 있는 중요한 자라면 스웨덴의 공주말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조직이 갖고 있는 정보를 빠짐없이 소령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바리가 말 끝자락에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셰룸 소령은 한 발짝 물러선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하하, 의심하는 것은 아니니 불쾌했다면 내가 사과하겠소. 내가 지금 스웨덴 공주를 놓쳐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오."
"괜찮습니다."
자바리가 능숙하게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내는 여러가지 생각을 속으로 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에 마흐붑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령님! 잠깐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그래? 뭔데?"
"여자들을 대령했습니다. 소령님의 지시대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호? 좋았어. 가자구."
셰룸 소령이 나가다 뒤를 돌아 자바리와 자히라, 알리에게 말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따라와도 좋소."
"네! 알겠습니다."
알리가 성큼 소령을 따라갔다. 하지만 자히라는 내키지 않았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할 때 쿠웨이트 모든 여성들은 이라크군에 의해 강간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자히라였다. 자바리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4살 먹은 어린 여자애부터 60먹은 할머니까지 이라크군의 무자비한 성폭행에 희생당했다.
그렇기에 자히라는 끝까지 셰룸 소령이 하던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바리의 제지로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좋든 싫든 셰룸 소령 역시 자신과 같은 소말리아인이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싸우기 위해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인데 의견충돌로 내분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히라는 마음 한구석에서 이것은 아니라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잡았다. 수많은 사내의 정액이 어머니의 비소에 넘쳐났던 사진이 떠올랐다.
자히라의 아름다운 얼굴에 굳은 의지가 엿보엿다.
============================ 작품 후기 ============================
파병 이야기는 100편까지 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국으로 가야죠.
지겨워한다면 뭐
한줄로 허접하게 끝낼 수도 있겠지만............
성기를 파병 보낸 음모세력들도 나와야겠죠.....
예상을 한 분들이 있으시려나.
자 누군지 맞춰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