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6 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얻은 깨달음과 여자들 -- >
빅토리아는 칼 소령에게 분노에 찬 눈빛으로 다그쳤다.
"되돌려서 그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칼 소령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적외선 망원경을 건넸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병사들이 수없이 희생당할 겁니다. 공주님! 자국의 국민이 헛되이 죽기를 바라십니까?"
"그를 구할 가치가 없는 겁니까? 우리 스웨덴군이 언제부터 이렇게 신의를 헌신짝 버리듯 했나요?"
빅토리아가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그는 우리 군인들을 구했습니다. 군인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지만, 우리 스웨덴군은 지금 도망가고 있잖아요? 내말이 틀렸나요?"
"공주님은 제 부하입니다. 공주님이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전 병사가 아니라 제 밑의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입니다."
칼 소령도 한국군 성기에게 정말 죽을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는 미안함같은 감정에 휘둘려서는 몰살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칼 소령이었다.
빅토리아는 칼 소령의 확고 부동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성기에게 죄송하고 죽을 죄는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스웨덴과 국민들을 위해 살 것을 가르침 받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큰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망원경을 들어 호텔을 조준했다. 그 작은 원 사이로 무수히 많은 흑인들이 호텔을 점거한 것이 보였다. 흑인들이 두 명의 군인을 붙잡고 밧줄로 묶는 것도 자세히 시야에 들어왔다. 흘러내린 눈물로 인해 맞은 상처 부위가 따끔거렸다. 수잔은 성기가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는지를 떠올리지 수잔의 눈가에도 맑고 영롱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호텔샤모의 주변에 귀가 멍해질 정도의 폭발음이 들렸고 밝은 섬광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시체와 파편들을 비추었다. 흑인들은 미군과 다국적군의 시체와 부상자를 마주치면 총을 쏘고 살아 있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날카로운 칼로 사지를 잘라버렸다.
미군과 스웨덴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의 공격에 잠시 후퇴했었던 아이디드파를 비롯한 군벌들은 이제 수도 모가디슈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방향을 돌려 공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난 흑인들은 어둠 속을 향해 무자비하게 사격했다.
군벌들은 미군과 다국적군이 흑인들의 포위를 뚫고 도망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명소리와 총소리, 그리고 폭발음이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셰룸 소령과 알리는 호텔샤모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여기 저기 죽은 흑인의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 피냄새와 화약 냄새가 섞여 셰룸 소령의 코를 찡그리게 만들었다. 셰룸 소령은 그의 측근인 윌슨과 마흐붑에게 발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흑인들 가운데 호전적인 병사들이 도망가는 장갑 차량에 대고 쏘지 않으면 그들은 조용히 모가디슈를 빠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둠 속에서 알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제일 먼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더러운 다국적군을 죽여버릴 참이었다. 셰룸 소령의 부하들이 두 명의 포로를 그들 앞으로 데려왔다. 성기와 노믹스 상병은 밧줄에 굴비 엮이듯 묶여 셰룸 소령 앞에 무릎 꿇려졌다.
성기는 죽는다고 생각하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수 많은 흑인들을 죽인 것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흑인들이 용서치 않을 것은 뻔했다. 이제와서 자비를 베풀어 살려달라고 한들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만 구겨지고 비참할 뿐이란 것을 성기는 깨달았다.
하지만 비장한 표정의 성기와는 달리 노믹스 상병은 울고 불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흑흑흑. 살려주세요. 제발!"
알리는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감히 자신의 가족들을 향해 총을 든 미군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사로잡힌 미군이 울며불며 애원하자 저런 겁장이 미군이 있다니 죽은 가족들을 더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죽더라도 용맹한 사람, 용기있는 사람에게 죽으면 이슬람 율법에 따라 전사로 기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리가 노믹스 상병의 가슴을 발로찼다. 노믹스 상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같이 묶인 성기도 쓰러졌지만 더 비참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으악!"
다른 흑인들이 다가와 둘을 일으켜 앉혔다. 노믹스 상병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흙과 섞여 지저분한 상태였다. 알리가 다시 발길질을 하려하자 셰룸 소령이 제지했다.
"그만! 알리, 자네는 빠지게!"
"네! 소령님!"
알리는 눈에 적개심을 가득 품고 뒤로 물러났다. 이 자리에 셰룸 소령이 없었다면 노믹스 상병은 발길질에 죽는 최초의 군인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알리의 눈빛은 매서웠다. 알리의 눈빛을 마주한 노믹스 상병은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노믹스 상병은 딸꾹질을 하면서도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셰룸 소령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딸꾹!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 준다면 뭐든지 딸꾹! 다하겠습니다. 삽질을 하라면 딸꾹! 하겠고 곡괭이를 하라면 하겠습니다.딸꾹!"
옆의 성기는 영어로 떠드는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살려달라고 비는 것을 눈치로 보아 알아차렸다. 저렇게까지 비참하게 빌어야 하나 싶은 성기였다. 성기는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못한 점, 수많은 여자들을 놓고 죽어야 한다니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러나 옆의 미군처럼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원치 않을 것이고 그의 여자들도 알게되면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라 성기는 생각했다. 장신의 삐쩍 마른 흑인이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이 무척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성기였다. 흑인의 옷차림은 아무렇게나 입은 차림이 아니라 과거 정규군 출신이었음을 밝히듯 깨끗한 군복을 입고 있었다.
"너희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죽든지, 내말에 따르든지. 나도 이대로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셰룸 소령은 성기와 노믹스 상병을 번갈아 보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성기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묵묵히 그를 올려다 보았고 노믹스 상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흑흑흑....감사합니다. 딸꾹!"
성기는 땡큐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죽을 것 같던 상황에서 한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앞의 흑인이 그들을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살아 남아 어머니와 여자들을 만나고 싶은 성기였다. 셰룸 소령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둘을 내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