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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 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얻은 깨달음과 여자들 -- > (85/230)

< -- 85 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얻은 깨달음과 여자들 -- >

빅토리아 공주는 수잔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번도 자신에게 이런 적의를 보인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잔 역시 빅토리아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년을 간호해주었더니 깨어나서 남의 남자를 탐하다니 분수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과 틀린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수잔의 꼭 쥔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 파란 힘줄이 도드라졌다. 빅토리아 공주의 파란 눈이 수잔의 파란 눈과 허공에서 부딪쳤다. 수잔이 갑자기 손을 들어 빅토리아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빅토리아가 살짝 뒤로 두세걸음 물러났고 얼굴 표정이 독오른 고양이처럼 변했다. 빅토리아의 주먹이 수잔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뻗어갔다. 수잔이 재빠르게 옆으로 피하며 눈에서 활활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듯 분노에 찬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성기가 말릴 사이도 없었고 더군다나 둘의 영어 대화는 알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렸다. 

어쩔 수 없기는 칼 소령과 스웨덴 병사들도 같은 처지였다. 빅토리아 공주의 표정이 평상시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평소 그녀의 성격은 천사가 재림했다고 할 정도로 착했지만 화났거나 고집을 피울 때는 악마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야, 미친 년아! 저 남자는 내 애인이야! 어디다 꼬리를 흔들어?"

수잔의 미친 년이라는 모욕적인 말보다도 성기가 자기 애인이라는 말에 속이 뒤틀리는 빅토리아 공주였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성기는 한국 군인이고 그녀는 미군이어서 애인관계라는 것에 의혹이 일었다. 언제 만났다고 사랑하는 사이란 것인지, 게다가 성기는 전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 빅토리아는 자신감을 가졌다. 이어 빅토리아는 수잔을 향해 비웃음의 썩소를 날렸다.

"미친 년은 너야! 언제 보았다고 저 남자가 애인이야! 걸레 같은 년! 너희 미국 부모들은 딸에게 아무나 보고 애인이라고 가르치냐!"

옆에서 듣고 있던 칼 소령은 빅토리아 공주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자 충격으로 창백해졌다. 성기 또한 두 여자의 대화 내용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욕설을 서로에게 퍼붓고 있다는 것은 분위기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Mother fucker!"

"Suck the foot!"

"Kick your ass!"

"Loser!"

수잔의 섹시한 입에서 거친 욕설이 마구 튀어 나왔다. 군에 와서 남자 병사들이 쓰는 것을 듣고 배운 것이다. 그만큼 군대는 전세계 공통으로 욕을 달고 사는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빅토리아 공주의 얼굴은 점점 벌개지고 있었다. 참다 못한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

"Shut up!"

빅토리아는 수잔의 손목을 신속히 휘어잡은 것과 동시에 발등으로 무릎을 가격했다. 물처럼 부드럽고 번개처럼 깜짝할 사이에 빅토리아가 먼저 공격을 한 것이다. 수잔도 만만치 않게 잡힌 손목을 공중제비를 돌아 풀고 동시에 날아차기를 시도했다. 

수잔의 공격에 빅토리아는 능숙하게 상체를 뒤로 숙이며 피했다. 이어 착지하는 수잔의 옆구리를 향해 주먹으로 타격했다. 이번에도 수잔은 당황하지 않고 피해 버렸다.

눈을 치켜 뜬 수잔이 재빨리 한 걸음 다가서더니 빅토리아의 뻗은 팔에 다리를 들어 발바닥으로 내려 찍었다. 황급히 군화발을 피하는 빅토리아였다. 이어 빅토리아의 스트레이트성 잽이 수잔의 턱을 향해 뻗어 나갔다. 황급히 수잔은 피했지만 살짝 스치며 살갗이 벗겨졌다.

왼손을 들어 턱을 어루만지며 침을 탁 뱉는 수잔이었다. 곧바로 수잔은 달려들며 주먹을 넣었다. 그녀들은 거의 붙어 있는 상태로 난타전을 벌였다. 둘 다 소나기 주먹을 날렸다. 클린치도 하지 않고 스텝도 밟지 않은 채 바닥에 두 발을 묶어 놓은 것 같은 상태에서 휘두르는 격렬한 주먹다툼이었다.

성기와 칼소령은 놀라며 두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칼은 빅토리아 공주의 허리를 잡고 뒤로 잡아 끌었고 그 와중에 칼 소령의 등판은 수잔에게 고스란히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남자가 때리는 것 같은 파괴력에 칼 소령은 신음을 터뜨렸다.

"아악!"

성기도 수잔의 앞을 막아서며 두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성기는 그녀를 잡아 끌며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도저히 일반 여자들처럼 싸우지 않는 모습에서 성기는 엄청 놀랐다. 아무리 여군이라지만 복서처럼 난타전을 벌인 그녀들의 모습이 강렬히 각인되었다.

두 여자가 떨어진 채 서로를 향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마도 눈에서 레이저가 나간다면 두 여자의 눈에서 당장이라도 발사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 가까이서 RPG가 터져 하얀 섬광이 어두운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호텔 한쪽 벽이 무너지며 돌조각과 먼지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엄청난 굉음에 일행은 귀가 먹먹해졌고 날아드는 먼지로 인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칼 소령과 스웨덴 병사들은 공주를 붙잡고 장갑 차량을 향해 뛰어갔다. 수잔의 손목을 잡고 성기도 다급히 뛰어갔다. 수잔이 벗겨진 철모를 향해 되돌아 가려고 성기의 손을 뿌리쳤다. 호텔 창문은 충격의 여파로 여기 저기 금이 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흑인들이 호텔을 향해 사격하기 시작했다.

성기는 뒤로 뛰어가는 수잔이 걱정이 되어 그녀를 쫓아갔다. 수잔은 철모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넣어두었다. 그 사진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기에 수잔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성기와 수잔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장갑 차량에 탑승한 상태였다. 칼 소령과 빅토리아 그리고 다른 이들도 성기와 수잔이 어서 타기를 바랬다. 칼 소령이 둘을 향해 외쳤다. 

"Hurry up!"

빅토리아의 얼굴은 여기 저기 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 얼굴은 조금 전의 난타전으로 인해 얼룩말처럼 보이게 했다. 그것이 묘하게도 보는 이로 하여금 섹시하게 여기게 만들었다.

성기는 철모를 집어든 그녀의 손을 잡고 차량을 향해 뛰었다. 잠깐 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기저기 멍이 들어 성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성기의 손에 한가득 느껴졌다.

성기와 수잔이 숨이 차도록 뛰어 장갑 차량에 도착했다. 성기는 땀을 흘리며 수잔을 먼저 태웠다. 그녀를 따라 올라타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손이 나타나 성기의 발을 잡고 늘어졌다.

수잔이 뒤를 돌아보며 깜짝 놀랐다. 불쑥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문을 닫고 사라졌던 비겁한 MB 노믹스 상병이었다. 저 혼자 살겠다고 문을 닫은 그가 나타나자 수잔은 분노했다.

MB 노믹스 상병은 2층에 숨어 있다가 깜박 잠이들었다. 그러다 RPG가 호텔 벽을 무너뜨리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진동에 깨어난 것이었다. 이미 차량은 시동이 걸려 있어 성기가 탄 줄 알고 출발한 상태였기 때문에 수잔과 빅토리아의 놀람은 더 커졌다.

특히 빅토리아는 미군의 마크가 붙어 있는 병사하나가 성기를 잡고 매달리자 죽일 듯 노려보았다. 수잔이 성기의 손을 잡고 끌었고 빅토리아 역시 한 손을 거들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매달린 노믹스 상병을 떼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일이 날 것 같아 성기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Go ahead!"

콩글리쉬로 말하며 두 여자의 손을 놓아버리는 성기였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수잔과 빅토리아는 성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뚫고 장갑 차량들은 호텔을 떠나갔다. 그리고 성기와 노믹스 상병이 덩그라니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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