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 회: 내가 왜 소말리아에 파병되는데? 왜? -- >
공항의 시설은 운항편수도 적고 손님도 많지 않아 엉성했지만 아프리카임을 감안해야했다. 준비된 군용트럭으로 갈아타기 위해 마중나온 유엔군 장교를 따라 모두들 움직였다. 트럭위에 올라탄 한국군은 한 명의 열외도 없음을 확인 후에 출발했다.
성기가 트럭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대지의 깊숙이 그 빛을 전하는 아름다운 일몰의 풍경이었다. 마치 한적한 시골마을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그들의 숙박지 사하피호텔과 호텔샤모에 벌써 도착했다.
"서둘러! 여기 가까이 반군이 있다."
"서두르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길을 마주하고 한쪽은 3층의 소말리아 기준에서 호화로운 사하피 호텔에 장교들이 투숙했다. 맞은편 3층의 낡은 여인숙같은 건물이 호텔샤모였다. 성기의 눈에는 625때 생긴 건물같이 낡고 금방이라도 총질 한번에 무너질 것 같았다.
유엔군 소속의 안내를 맡은 여장교가 서둘러 들어가라고 영어로 소리쳤다.
"Go ahead!, Go ahead!"
철모를 쿡 눌러써서 금발의 머리칼만 보이는 여장교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는 성기였다. 성기의 눈에는 금발의 여장교는 거기도 금발인지 알고 싶었다. 비행기에서 만난 금발의 러시아여성보다 더 진한 금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기의 웃음에 기분좋은 미소로 답하는 여장교였다. 역시 외국애들은 내 외모를 알아보는구나! 아우, 여기 아프리카여성들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성기는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호텔샤모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국군 직업 중사를 보게되었다. 이중섭 중사는 모두에게 크게 소리쳤다.
"잘 들어라! 각 방마다 4명이 들어간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부대원끼리 투숙하게끔 만들었다. 이국에서 그나마 안면있는 사람들을 보는 게 낫다고 판단한 부대장님의 배려다. 그럼 자신의 부대가 써있는 방에 들어가 쉬기 바란다. 내일 점호는 새벽 5시부터 한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여름이 길다고 한다. 그럼 좋은 꿈 꾸고 불침번은 여기 종이에 적어 놨으니 순서대로 근무에 임하기 바란다. 이상!"
"충성!"
성기와 동기들은 213호실에 투숙했다. 창문을 열어보니 밤공기가 한국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 순간 성기의 귀로 총성이 들렸다. 깜짝 놀라 창문에서 물러났다. 총성이 그치지 않고 밤하늘에 불꽃놀이처럼 이곳저곳에서 불꽃을 만들었다. 성기와 동기들은 바닥에 엎드렸다.
"전쟁터냐? 평화유지만 하면 된다며?"
"새끼야! 내가 어떻게 알아!"
"아이, 씨발. 열받네."
"난 아직 장가도 안갔는데!"
"누군 갔냐!"
지원이의 말을 받아서 수근이가 엎드린 상태로 짜증을 부렸다. 총성이 들리기 전까지만해도 히죽히죽 웃던 녀석들이었다. 자칫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자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이다.
성기의 머릿속으로 짧은 시간 동안 거친 여인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국에 있는 네 여자와 여기 비행기에서 만난 여자들에게 좀 더 잘해줄 것을. 장가라도 들고 죽어야 어머님께 한을 남기지 않았을 텐데라며 성기는 후회했다.
총성은 한시간 가량 지속되었다. 엎드리다 잠이 들었는지 장교가 와서 깨워도 몰랐다.
"일어나! 이 새끼들 봐라! 반군들이 총질을 하는데도 자네. 완전 태평성대야!"
그러면서 장교는 군화발로 성기와 동기들을 흔들었다. 피곤해서 누가 깨우는지도 몰랐다가 얼굴을 들어 확인해보니 이경규대위였다. 화들짝 놀란 성기와 동기들은 부랴부랴 일어나서 경례를 올렸다.
"충성!"
"야, 이새끼들아! 반군들이 총질을 좆나리하는데도 자빠져자고 있냐!"
그러더니 손으로 꿀밤을 먹이는 이대위였다.
콩콩콩콩!
"머리도 돌이라 존나 아프구만. 밖으로 나와!"
성기와 동기들은 서둘러 철모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호텔 뒷마당에는 육공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서 유엔소속 병사들이 총기박스를 땅으로 내리고 있었다. 한켠에는 한국군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병사들도 있었다.
이경규대위가 지휘봉을 꼬나쥐고 병사들 앞에 섰다.
"모두, 잘 듣길 바란다. 당초 내일 오전에 총기분출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긴박한 사정으로인해 지금 총기분출을 실시할 것이다. 총기번호와 이름, 군번을 상세히 적고 받아가기 바란다.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
UN소말리아활동(UNSOM) 결의하고 1차로 PKO 요원 4500명이 파병되어 450만명의 아사자를 막았고, 1993년 우리, 한국군이 포함된 2차 UNSOM2 는 1차보다도 대폭 증강된 30,800명이 파병되었다. 그러나 어제 6월 5일 PKO에 참여중인 파키스탄병 24명이 아이디드파 민병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UNSOM2의 지휘부는 아이디드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좀 전에 들렸던 총성은 파키스탄군, 인도군, 스리랑카, 덴마크, 스웨덴군등이 주축을 이뤄 아이디드파 민병대를 공격한 것때문이다. 바로 아이디드파가 격렬한 저항을 한다는 증거다.
수도 모가디슈의 반은 반군들이 점령하고 있다. 이곳이 언제 점령당할 지 모른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경계에 임하기 바란다. 이상이다. 총기분출 실시!"
"충성!"
병사들 선임으로 중사가 경례했다. 한국군은 호명한 순서대로 총기를 받아들었다. 자세히 보니 한국의 K2였다. 그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미국애들이 쓰는 M16이라면 총이 커서 들고 다니기가 불편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성기는 뒷마당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고개를 돌려보니 뒷마당 벽이 부서진 곳에서 흑인 꼬마애들이 깡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이수경 소령이 다가왔다.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고 버리려하자 이수경 소령은 그만두라는 손짓을 했다.
"계속 피워! 사내 녀석이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안 그래?"
"네? 네! 소령님!"
담벼락에 기대고 이수경 소령도 담배를 꺼내 입에 꼬나물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후우하고 연기를 날려보냈다.
"소령님, 저기 애들은 집이 없습니까?"
"있어도 없는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부모님이 없으니 저렇게 구걸로 생을 연명한다고 하데."
그러더니 이수경소령은 성기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더 재미난 사실을 말해줄까?"
"네? 소령님! 재미난 게 뭡니까?"
"여기 소말리아에서는 교사도 매춘을 한다고 하더라고.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도 몸을 파는 거지. 더 웃긴 것은 아이디드 반군인데. 이 녀석들이 여성의 브라착용을 금한다는 거야. 길을 가다 브라를 착용한 듯 보이면 누구라도 상의를 벗겨서 확인한대. 만약 착용한 것이 사실이면 사람들 앞에서 매질을 한다는 거야. 매질이 끝나면 사람들 앞에 다시 세워서 가슴을 흔드는 것까지 시킨다니. 이런 미친 놈들이 어딨나! 안그래?"
"네, 정말입니까? 소령님!"
"왜? 너도 남자라 혹하냐? 니 가족이라고 생각해 봐! 반 인륜적이지."
"그것은 소령님 말씀이 맞습니다."
"관둬라! 새끼가, 누가 니 시커먼 마음을 모를까봐! 걸레같은 자식!"
"네? 걸레라뇨?"
이수경소령은 담배를 발로 끄고 짜증이 나는지 한 번 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갔다.
"그래, 이 걸레같은 자식아!"
*****뜰에 오시는 분께! 마음껏 구경하시고 놀다 가시길 바랍니다.
*****퓨전란의 <야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참고: 소말리아 분쟁*****
1969년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Barre 군사정권이 자기 부족 위주의 정책을 펼치며 22년간 장기집권하자 이에 반발한 부족들이 통일소말리아회의(USC)를 결성하고, 1991년 1월 쿠데타를 일으켜 Barre를 축출하였다. 이후 통일소말리아회의(USC)에 참여한 양대 무장군벌인 아이디드, 모하메드(이후 Mahdi파로 변경), 아토 등이 주축이 되어 정권 쟁탈을 위한 부족간의 대립으로 격화되어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무정부 상태에서 아이디드파의 우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내전이 격화되어 사상자와 난민이 속출하였다.
소말리아의 사태가 국제적인 관심을 끈 계기로는 1991년 심한 가뭄에 의해 국민의 과반수가 넘는 420만명이 기아에 직면하여 죽음의 땅으로 변하면서이다. 1992년 4월 UN은 UN소말리아활동(UNSOM) 결의하고 1차로 PKO 요원 4500명을 소말리아에 파견하여 대량 아사를 막는데 성공했다. 또한 UN은 1992년 12월 내전의 조기 종식과 물자수송로의 확보를 위해 미군 중심의 다국적군을 파견하였다. USC의 모하메드 잠정대통령파와 반대파인 아이디드 장군파를 포함하여 범 군벌들이 1993년 1월 4일 아디스아바바에서 UN의 중개에 의해 소말리아평화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최대 군벌세력인 아이디드파는 UN에 의한 국민화해회의의 개최에 반대하고, 미군에 의한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였다.
1993년 5월에는 UNDOES1을 교대하여 1차보다는 인원이 30,800명으로 대폭 증가된 UNSOM2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1993년 6월 5일 PKO에 참여중인 파키스탄병 24명이 아이디드파 민병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UNSOM2의 지휘부는 아이디드의 체포를 명령하였고, 미군은 아이디드파의 주요 거점 및 시설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아이디드의 체포를 둘러싸고 구속, 재판 등의 곤란한 문제들이 발생하여 결국 1993년까지 사망자 70명을 포함한 279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위로 끝났다. UN은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 사태가 해결 조짐을 보이지 않자 결국 UNSOM2의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1993년 12월부터 단계적인 철수를 개시하였다.
1995년 3월 2일 UN PKO(파키스탄군)과 1500명의 미 해병대는 철수를 완료하였고, 이에 따라 아이디드파는 수도권에 대한 제압을 개시하여 동년 5월에는 아이디드가 일방적으로 대통령 취임 및 신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사태가 아이디드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보였으나 아이디드가 1996년 7월말 전투 중에 부상하여 8월 1일 사망하자 아이디드의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전투의 지속을 발표하였다.
그후 반군간에 정전을 모색하는 회의가 수 차례 개최되었으나 매회 각 군벌간의 이해 상충으로 결렬되고 있다. 그러나 최대파인 마디파와 아이디드파가 주축이 되어 협의는 계속 진행 중에 있다. 1996년 10월 15일에는 케냐 대통령의 중개로 무장 3파(마디, 아이디드, 아토)는 즉시 정전에 합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동년 12월 14-15일 수도 남부에서 아이디드파와 민병대가 충돌하여 정전합의는 붕괴되었다. 1997년 1월 모가디시오에서 26당파와 4명의 간사에 의한 협의의 결과 국민구국평의회(CSN)의 결성하는데 합의하였으나 각 군벌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결렬되었다.
1997년 12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아이디드파와 마디파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1998년 2월 15일 각 군벌 및 부족 대표 450명이 참여하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대해 각 군벌의 입장은 달라 일부 파벌은 카이로 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전투를 재개하였다. 1998년 1월 26개 파벌은 이디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아이디드파와 마디파가 합의한 내용을 검토하고 아이디드파에게 2월의 평화회의전까지 바이도아 지역을 반환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아이디드파는 이를 거부하였다.
한편 1998년 1월 31일 3대 파벌인 아이디드, 마디, 아토 등은 정전에 합의하고 공항 및 항구를 오픈하고, 연합군을 형성하기로 합의했다. 카이로 합의 이후 3대 주요 군벌은 정전에 합의를 하여 소말리아 분쟁 양상은 거대 군벌대 다수의 소수 군벌에 의한 투쟁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아이디드파는 바이도아 지역의 반환여부를 둘러싸고 Rahabwein 저항군과의 전투를 지속하고 있다.
2001년에도 군벌과 정부간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으며 소말리아는 이디오피아가 소말리아의 불안정을 의도적으로 도모하고 있다고 비난하나 이디오피아는 이를 부인하고 있슴. 케냐는 소말리아로부터 무기밀수를 봉쇄하기 위해 국경상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였으며 미국 테러 사건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이 소말리아로 은신할 수 있다는 소문에 의해 유엔의 감시가 더 심해짐. 그러나 무력으로 인한 신변안전문제 때문에 한때 유엔직원들이 모두 대피하였으며 육로상으로의 수도 진입은 아직 개통이 안됨. 유엔직원들은 항공로 사용으로 수도에 왕래하고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