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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회: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능력이 나타나다. -- > (29/230)

< -- 29 회: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능력이 나타나다. -- >

그는 겁에 질려 울상을 하고 있는 김진선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이미 수차례 얻어맞어 그녀의 뺨은 붉다 못해 아주 빨갛게 물들었다. 입술이 터지면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악!...흑흑.."

42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녀의 몸에 손찌검을 했던 사람은 없었다. 이런 종류의 물리적인 폭력앞에 김진선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보다는 치욕감이 들었다. 견딜 수 없는 서러움과 치욕감으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의 막무가내식 행동에 김진선은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쿵 소리와 더불어 큰 비명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란 순경과 형사, 여직원이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들 모두의 눈에 하검사와 겁탈당하고 있는 김진선의 모습이 보였다. 상의는 벗겨졌고 브래지어의 반쪽은 강제로 내렸는지 풍만한 가슴과 검붉은 젖꼭지가 선명히 드러났다. 하의 역시 벗겨져 달덩이같은 둔부가 훤히 보였다.

"헉, 자네들이!"

"검사님, 뭐하시는 겁니까?"

"흑흑흑..."

상의를 여밀고 하의를 끌어올려 옷을 매만지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 김진선이었다. 하검사는 욕구불만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너무나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수많은 목격자를 만들었다. 적어도 정직처분 내지는 감봉처분은 기본일 것이다. 물론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경우 자칫하면 옷을 벗을 수도 있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검은 정장차림의 50대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였다. 그는 차분하지만 노여움이 깃든 목소리로 호통쳤다.

"허, 하검사. 제정신인가? 자네 나좀보게. 그리고 자네들은 상황을 정리하게"

"네, 차장검사님"

북부지방검찰청 형사 3부의 나혜리검사의 집무실 안, 그곳에서는 황당한 제보로 인해 회의가 열렸다. 검사로 보이는 검은 투피스 정장차림의 나검사와 널찍한 어깨를 가진 40대의 남자와 맞은편에서 살집이 통통해 당당해보이는 20대 후반의 여자가 말을 하고 있었다. 

"나검사님, 제 동기가 그쪽에서 외사과를 담당하고 있잖아요. 확실한 제보가 틀림없어요." 

"김형사님, 그게 말이 되요? 십여 명이상의 여성이 강간당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누구하나 신고하지 않았다는게!"

"신고를 못한거죠. 그녀들 가운데 10명이 서울대병원의 간호사에요. 그리고 나머지 여성 6명도 룸살롱 한곳에서 근무했던 것을 알아냈어요. 간호사와 룸살롱 아가씨들 공통점이 서울대병원이라니까요."

"그러니깐, 김형사님의 말은 서울대병원에 희대의 강간범이 있다는 거에요?"

"네에, 검사님. 제 감이 틀린 적이 없잖아요. 이번에도 틀림없어요."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40대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야아, 김형사. 네가 언제 항상 감이 맞았냐? 말은 똑바로 해라."

"으이그, 박선배님. 확실하다니깐요. 삼성제일병원에 입원한 것을 우연히 종로경찰서 소속의 제 동기 박미란이 알게 되었다구요. 그리고 10명의 간호사와 룸살롱 아가씨 6명이 하루 간격으로 입원한 것을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구요. 게다가 그녀들 모두 자궁파열로 입원했다고요."

예쁘장한 외모에 뿔테 안경을 깊게 눌러 쓴 나검사는 날씬한 다리를 꼬았다. 그러더니 펜으로 탁자를 탁탁치며 말했다.

"김형사님의 말대로 심상치 않은 것 같네요. 그러면 서울대병원의 직원가운데 1명이 여성모두를 범했다는 거잖아요. 그게 가능할까요? 여성들 가운데 키가 훤칠한 여성도 있고 강력하게 저항하는 여성도 있을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 그 많은 여성을 하루 차이로 범한다는 것이 가능하냐구요?"

"쉽지는 않죠. 보통 강간범들이 며칠 간격으로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으슥한 골목과 한적한 곳에서 일을 벌립니다. 또 혼자사는 여성의 집을 노립니다. 그것들을 토대로 보았을 때 기존의 강간범과는 아주 양상이 다른 대담한 강간범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박형사님 말 그대로 아주 대담한 놈인 것 같아요. 좋아요. 김형사님과 박형사님은 병원에서 간호사들의 인적사항과 룸살롱 아가씨들 인적사항부터 조사하세요. 전 먼저 차장검사님한테 보고드리고 수사방향을 잡죠."

"검사님, 비공개로 할거죠?"

"당연히 비공개로 가야죠. 그래야 범인을 잡을 수 있죠. 이것이 언론에 노출되면 범인이 자취를 감출 수도 있는데."

"알겠습니다. 검사님.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두 분"

성기는 저녁 무렵에 다찌를 타고 다시 유격장으로 향했다. 훈련병들의 저녁을 챙기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부대로 복귀해 퇴근하면 일과가 마무리될 터였다. 하지만 세상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보다.

퇴근 무렵 병원에서 성기를 찾는 전화가 왔다.  성모병원인데 의식을 찾고 깨어난 여자 둘은 몸과 마음이 허약해 계속 입원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아빠를 찾고 있다는 말도 전했다. 병원 여직원이 화난 목소리로 아빠란 말을 반복했다.

성기는 순간 욱했다. 

"제가 왜 아빠냐구요?"

"아니 그럼 누가 아빠에요?"

"전 아빠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흥, 오빠가 아빠되는 거에요. 속으로 좋으면서....."

"여보세요. 절 언제 봤다고 그런 말을 막 하시는 겁니까?"

"언제보긴요. 환자들과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에요. 이 도둑놈아. 짐되니깐 병원에 버려두고 나몰라라 하는 거 내가 많이 봐왔거든. 맞빡에 피도 안마른 어린 녀석이 여자들에게 못된 짓이나 하고."

"이봐요. 아줌마. 제가 뭘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뭐어? 아줌마. 그래 아들같은 녀석한테 인생충고하는 거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너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성기는 전화를 홱 꾾어버렸다. 이런 거지같은 년이 어디다 대고 욕이야. 게다가 자기는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여자들 아닌가. 그냥 우연찮게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다 준것이지. 여자들을 짐짝 버리듯 병원에 팽개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도저히 분이 안풀려서 퇴근 시간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시간이 되어 점호를 끝낸 그는 사복으로 서둘러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병원을 향해 달렸다.

성기와 통화를 한 병원의 여직원은 30대 후반의 이미선이라는 여자였다. 나름대로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사생아였다. 어머니가 재벌의 아들과 살림을 차려 낳은 자식이 바로 이미선 그녀였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 특히 여자를 차버리는 남자들에게 병적으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딸을 낳자 아버지란 재벌가의 놈팽이는 딸을 낳은 이미선의 어머니를 버리고 또 다른 재벌가의 여식과 결혼을 약속한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꾾임없이 키워 주었다.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열이 불같은 딸을 안고 병원에 내려 놓고는 바로 도망을 갔다. 아픈 딸자식과 한때는 사랑했던 자신의 여인을 병원에 팽개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머리 한쪽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이미선이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내 남자 직원들이 수시로 집적댔다. 어쩔 때는 의사들조차 회식을 가장해 옆자리에 앉아 수작부렸다.

하지만 남자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은 수작부리는 남자들에 대한 방패역활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녀는 퇴근 시간이 임박하자 좀 전의 싸가지 없는 군바리가 또 다시 떠올랐다. 청순한 여자들을 병원에 버리고 간 것이라고 짐작한 그녀는 끝을 알 수 없는 증오심으로 성기를 저주했다.

버려진 두 여자가 마치 자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가까운 마트에 가서 그녀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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