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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에 빠져 의식불명의 상태인 성기에게 거대한 크기의 시바가 다가왔다. 시바는 엄청난 자신의 몸 크기에 놀라 입을 떡 벌린 성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은 신의 존재로 긴 시간 인류와 함께 했지만 그가 인류에게 나타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시바, 자신이 나타난 것은 성기를 통해 위험에 처한 여인들을 구하고 불순한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잔악하고 폭풍같이 변덕스러우며 파멸의 신인 시바가 여성들을 걱정하는 이유는 자신의 부인들이 당한 일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지구상의 인류를, 특히 여성을 걱정하곤 했다.

시바는 아주 드물게 지상의 왕으로 현신해 신과 인간사이의 중재자역활을 담당했다. 시바는 신계에서 10개의 팔과 4개의 얼굴을 가졌으며, 눈은 셋이고 용의 독을 마셔 목이 검붉었다. 시바의 배우자는 성애를 중시하는 설산의 처녀라는 광폭한 여신 두르가와 칼리가 있었다. 

시바의 두 부인을 흠모하는 신들이 있었다. 시바가 히말라야로 묵상여행을 떠났을 때 시바의 부인들을 유혹하고 범하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지막 수로 그 무리들은 사랑의 신인 까마에게 부탁하여 두 부인에게 사랑의 화살을 맞추어 달라고 부탁했다. 까마는 향기로운 꽃이 달린 사랑의 화살을 두 부인의 가슴에 쏘았다.

이윽고 사랑의 화살을 맞은 두 부인은 남편 시바가 떠나고 없는 집에서 다른 신들과 질퍽하게 시간을 보냈다. 하루 이틀 삼일 그녀들은 온몸이 타오를 정도로 수 많은 신들을 엉덩이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허리를 감고 죽을 듯 허리를 움직였다. 입에서는 결코 시바와 내 뱉은 적이 없는 쾌락의 신음을 죽어라 질렀다.

그 사실을 안 시바는 분노하며 원인제공자인 까마를 검은 재로 만들어버렸다. 그 순간 시바는 아름다운 파르바티를 보게 되고, 그 매력에 끌리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시바는 파르바티와 결혼하여 전쟁의 신인 스칸다를 아들로 얻었다. 그리고 까마를 불쌍히 여겨 다른 형상인 크리슈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다.

재탄생을 거친 까마는 시바에게 두려움과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바가 파르바티와 아들 스칸다를 놔두고 또 다시 히말라야로 묵상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틈을 탄 까마는 생식과 성애를 담당하는 뱀을 훔쳐 달아나게 되었다.

하지만 까마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이 뱀의 생식과 성애능력은 그를 관장하는 시바조차도 버거워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시바의 눈을 피해 인도를 벗어난 까마는 이제는 발걸음을 떼기조차도 힘이 들었다. 인도를 벗어난 신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탈이었던 것이다.

황량한 사막과 거친 모래바람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둔황이었다. 까마는 잠시 쉬어가고자 뱀을 가둔 망태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망태기를 벗어난 뱀은 조그만한 주둥이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은 사람몸통이 들어갈 정도로 넓어졌다. 뱀은 깊은 잠에 빠져든 까마의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까마를 삼킨 뱀은 나무 밑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자꾸만 배가 아파왔다. 이 역시 뱀이 신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였던 것이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사람을 상해케 한다면 딱딱한 돌로 변할 것이란 시바의 경고를 말이다.

하지만 생식과 성애를 담당하는 뱀에게 구제의 길을 열어줬으니 인간들이 흔히 천하게 여기는 똥이나 오줌에 몸을 닿게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그 배설물이 사람것이든 동물들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금제가 있었다. 음기가 강한 곳에서 배설물에 닿아버리면 까마와 뱀의 능력이 배설을 한 자에게로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 날인가 신라에서 혜초라 불리는 승려가 둔황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헤진 의복에 거칠어진 피부는 도저히 비루먹은 걸인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에 서린 기운은 범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719년(성덕왕 18) 남인도(南印度)의 밀교승(密敎僧) 금강지(金剛智)에게 불도를 배웠었다.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러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동서남북중- 등 40여 개국을 거쳐 727년(성덕왕 26)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지었으나 전해지지 않았는데 1906~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학자 폴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석굴에서 구매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사학(史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혜초가 723년 중국의 광저우에서 시작해 수마트라와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 부근 그리고 카슈가르라 불리는 카슈가르(喀什, 그 당시의 소륵국(疏勒國))와 이곳 쿠차(庫車, 그 당시의 구자국(龜玆國))를 마지막으로 하는 그의 8년간의 여행기를 기초로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왕오천축국전》의 내용대로라면, 혜초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다녀온 사람이다. 혜초는 여행을 마치고, 787년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3058미터)에서 입적했다는 기록만 나온다.

기록에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둔황을 지날 무렵 나무 그늘 아래서 양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은 멈춘 혜초는 그 부분을 지팡이를 이용해 파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눈에는 오래된 머리에 이고갈 수 있게 만든 작은 방석 형태의 석상을 발견했다.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짐작한 혜초는 보따리에 석상을 챙겼다. 그리고는 장안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천축을 돌아본 혜초는 중국의 오대산에서 불경 공부를 하였다. 언제부턴가 혜초의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미칠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향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 먹은 혜초는 간단히 짐을 꾸려 주위 승려에게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나갔다. 고향 경주를 돌아본 후 많은 것이 그대로인데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죽거나 노인이 된 것을 보고 새삼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가 삼성산 자락을 지나가던 중 산꼭대기에서 오색무지개가 어리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음의 기운이 형형색색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지나가던 과객들에게 그곳의 위치를 물어보니 현 시대의 박달동이었다.  고구려때 박달동과 석수동지역은 잉벌노현(仍伐奴懸)이라 칭하고 그후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잉벌노현은 곡양면(穀壤面)으로 칭했다.

필시 이런 기운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정토의 반대기운 고해정토였던 것이다. 이런 곳은 인가가 살면 안되는 곳이다. 만약 그곳에 한 명이라도 산다면 이름모를 고통에 필시 자살은 할 것이었다. 그만큼 고해정토는 무서운 장소였다. 

잉벌노현의 지세를 살펴보니 동물 닭(鷄)을 의미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닭은 새의 일종이지만 날지 못하는 새이기에 학(鶴)이 양(陽)을 상징하는데 비해 음(陰)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러한 내용은 풍수지리학의 기본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혜초는 서둘러 산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둔황에서 거둔 뱀모양의 석상을 어둡고 습한 곳에 파묻었다. 그 후 혜초는 중국의 오대산으로 돌아갔다.

"까마야!"

"까마야!"

수차례 불렀음에도 대답이 없자 뱀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몸은 비록 움직일 수 없는 석상으로 변했음에도 말이다. 잠시 후 뱀의 귀에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뱀의 조그만 몸통에 갇혀버린 까마는 죽지않고 크기가 줄어들어 있었다. 

*****주인공의 능력을 키울 시기가 온 것같네요, 그래야 글을 계속 이어나갈수 있으니 말이죠. 

*****신화와 접목해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해서 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더불어 말이 안되는 부분도 있겠다 싶지만, 그냥 설정이라고 여기시고 지나치시길......

독자님들의 넓은 아량을 기대해 봅니다.

주인공이 활약할 시기가 다가오는군요. 너무 깊은 잠에 빠뜨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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