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하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관둔 남수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성격을 대변하는 서글서글한 눈매. 날카로운 곳대. 호선을 그리는 입. 정말 잘생기긴 잘생겼다. 문제는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것 같다.
오히려 그게 그녀의 입장에서는 더 나을지도 몰랐다. 저 정도 외모면 아무여자 후려치며 살 수 있을것만 같았다. 자기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이여자 저여자 건드리지는 않을테니까.
자기는 여자친구 사귄적이 없다는데 사실 믿지 않았다. 저 외모정도면 주위에 여자가 없을리가 있나. 잘생기면 여자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법이다.
"자?"
조용히 말을 건내는 그녀. 이인하는 잠에 빠진듯 쌕쌕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을 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몰라."
누구 들으라고 꺼내는 말일까. 남수림은 무엇에 홀린것 마냥 중얼거렸다.
"삐진거 보니 불안하고 무섭고.... 당장 풀어줘야만 할것같고..."
그녀는 생각치도 못했다. 자신이 먼저 빨아주겠다며 나설줄은. 그녀는 성욕이 많은편이 아니였다. 관계를 맺은 남자는 이인하를 포함 세명이 전부였다. 이안하를 앞선 두명과의 관계는 성욕이 아닌 사랑을 확인한다는 생각으로 한 행위였다.
이인하와의 관계는 그녀를 바꾼다. 없던 성욕이 돋아나고, 설레기 시작한다.
"넌 대체 뭐니?"
"....."
"내가 나이에 콤플렉스를 느낄줄은 몰랐는데."
열살이다 어리다 보니 역시나 나이가 신경쓰인다. 나이에 대해서는 한번도 자신이 나이가 많다. 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여태껏 만난 남자는 다 연상이였고 결혼도 때되면 하겠지. 하며 살아왔으니 나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없었다. 최근에서야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어린남자를 만나고 나서야 생각해보게 되었다.
"불안해."
역시나 불안했다. 그의 옆에는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있다. 그 여자아이들에게 질투심이 나고 괜히 불안해졌다.
'서희.'
그녀는 항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 자기 고등학교 시절 같았으면 얼짱이니 뭐니하면서 주위에 관심이 들끓었을거다.
'잘한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서희와 만나보라며 부추긴게 잘한행동인지. 머릿속으로는 잘했어. 라고 말했지만 가슴은 질투심에 쿡쿡 저리다. 괜한행동을 한것만 같았다. 그 때로 되돌아간다면 그런말을 하지 않았을텐데.
"바보같긴."
유치한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후회해도 늦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만큼 왔다. 지금와서 무르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 자신을 봐주길 바라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랑해."
한번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 말. 생각해보니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해준적이 있었던가? 괜히 심통이 나서 볼을 움켜쥐려다가 그가 자고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후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말해주는지 보자."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아직 생기가 넘쳐나는 시기인 만큼 붉디 붉은 입술. 입술을 맞추고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그에게 닿지않게 틀어올린 뒤 그의 입술을 취했다.
입술을 뗀 그녀의 두 눈은 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은 눈빛이였다. 그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바보."
모의고사날이다.
누구에게는 목숨거는 날이면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냥 일찍마치는 날이다.
굳이 정하자면 나는 후자쪽이랄까.
"종쳤으니까 맨 뒤에서 정답지 걷어와."
마지막 시간 사회탐구. 뭐 배워먹은게 있어야지... 덕분에 20분 만에 모두 풀고 숙면을 취했다만....
얼마안가 담임선생님 백진수 선생님이 답지를 한아름 안고 나타났다. 답지를 각각 배부하고 채점을 시작했다.
맞고 맞고 맞고 맞고.. 맞고 맞고...
앗 하나 틀렸다.
모두 메긴 뒤 확인해보니 92점이다. 3점짜리 2개 2점짜리 하나 틀렸다. 이정도면 1등급 내지 2등급 나올것같다.
넘겨서 수학.
수학도 다를거 없다. 문항수도 워낙 적은지라 금방 채점을 마쳤다. 74점. 요것도 잘하면 1등급 나올것같다.
영어는 98점. 어이없게 한문제 틀려먹었다.
탐구는 뭐 둘다 20점대 초반에서 중반 왔다갔다 거린다. 배웠어야 점수가 나오던가 말던가하지.
담임선생님이 따로 배부해준 종이에다가 점수를 적는다. 92점 74점 98점 23점 27점
옆에서 시발시발 거리면서 채점을 하던 태진이 내게 어슬렁 어슬렁 다가왔다.
"시험망했어 시발. 너는 잘쳤냐?"
그러더니 내 점수를 확인하다. 그러더니.
"이 새끼 미쳤어. 야야. 지웅아 이 새끼 공부 왜이렇게 잘하냐?"
태진의 옆자리에서 채점을 하던 지웅이 녀석이 이쪽으로 시선하나 주지않으며 대답했다.
"걔 원래 사기캐야. 국어랑 수학은 타고났고 영어는 어렸을 때 부터 외국살다와서 네이티브급이더라."
뭐. 그런거지.
"와 이 새끼..."
태진이 세상은 불공평해 부터 시작해서 투덜투덜 거리면서 자기자리에 앉는다. 옆에있던 서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내 점수를 확인하더니.
"우와... 인하 너 시험 되게 잘쳤네?"
"네가 그러면 안되지."
전교 탑을논하는 실력의 소유자가 바로 서희다. 역시나 국어 만점 수학 96점 영어 98점.
확실히 선생들한데 귀여움 받을만하네. 얼굴도 예뻐. 성격도 좋아. 공부도 잘해.
미워할래야 미워할수가 없겠다.
"샘 할일 태산이니까 먼저간다. 서희야. 종이 싹 다 거둬서 나한데 갖고와."
서희는 어제 있었던 실장선거에서 압도적으로 1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남녀대결에서도 서희가 우위. 게다가 외모가 외모인지라 맘속깊이 사모하던 사내놈들도 하나둘 있었는듯 이탈표까지 생겨나 거의 압도적이였지.
"시험 끝났다아앙!"
"놀러가자!"
하루일찍 마쳤을 뿐인데 지랄발광이다. 누가보면 수능친줄 알겠다.
"잠깐만 애들아 종이 주고가."
서희의 말에 앞다퉈서 종이를 건낸다. 서른명에 가까운 숫자가 종이를 날리듯이 건내니 여간 복잡한게 아니다.
덕분에 서희옆자리에 있는 나한데도 피해가 온다.
"에휴..."
교실이 텅텅비자 서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희의 책상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심지어 바닥에 까지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내 발밑에 있는 종이 두장을 주워 서희에게 건냈다.
"고마워."
서희는 자리에 남아서 번호대로 종이를 정리했다. 그 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지웅의 전화였다.
"나 전화좀 받고올게."
"아, 응. 그럼 난 이거 담임선생님한데 가져다 드리고 올게."
서희는 종이정리를 끝마친듯 자리에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핸드폰을 귀에다가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너 왜 안내려와?]
왠 뜬금없는 소리?
"왜?"
[애들끼리 놀기로 했어. 너도 어서 내려와라.]
내가 서희를 나두고 수컷냄새 나는 곳에 갈것같으냐.
"오늘 선약있다."
[뭐? 지랄하지말고 얼른 내려와라.]
안믿는것 같다.
"싫으면 믿지말고. 어쨌든 같이 못논다."
학기첫날에 날 매몰차게 버릴땐 언제고 지들 아쉬우니까 지금 찾고있네.
[여자냐?]
"어."
[혹시 서희?]
"어."
[....이 새끼 서희랑 서희랑 놀러간다는데?]
뒤이은 진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야. 냅둬라 걔네들. 그냥 우리들 끼리 놀자. 여자애들 몇명 부르면 되지.]
[이인하 너 임마 잘먹고 잘살아라.]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
내일 보면 몇대 어루어만져 줘야겠다.
"전화 다 끝났어?"
아, 깜작이야.
뒤돌아보니 서희가 소리도 없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더니 서희가 큭큭 웃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창피함에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이제 하교하면 되?"
"응."
"가자 그럼."
각자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역 앞에 먼저 도착한 나는 서희를 기다렸다. 주위를 지나가며 여자들을 구경했다. 저 여자는 동그라미, 저 여자는 세모. 저 여자는 엑스표. 이런식으로.
휘유, 저 멀리서 압도적인 포스를 내뿜는 여자가 보인다. 저건 얼굴안봐도 동그라미다.
베이지 색 치마와 흰 티 그 위로 걸친 베이지색 가디건. 전체적으로 베이지색상으로 통일하면서 봄느낌을 물씬 풍긴다.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어째 많이 본듯하다. 서서히 다가올수록 얼굴윤곽이 뚜렷해진다.
근데 어찌 많이 본듯하다...가 아니라. 방금전에도 함께있던 여자다.
"먼저왔네?"
"금방왔어."
서희는 생긋 웃으며 내 옆에 따라붙었다.
"가시죠 사모님."
"이왕이면 아가씨로 해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 장난이 마냥 웃긴지 서희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서희를 옆에두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우와. 사람많다."
퇴근시간대가 시작되어서 그런지 사람수가 어마어마하다. 인파를 뚫고 지하철을 탑승했다. 서희를 반대편 문쪽에 세워두고 서희와 마주봤다.
굉장히 밀착한 상태. 음, 이거 굉장히 민망한데?
한정거장, 두정거장...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서희가 까치발을 들더니 내 귓가에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답답해."
"조금만 참아."
두정거장 남았나. 그때까지만 참자.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어마어마한 인파가 들이닥친다. 그러다 보니 떠밀리면서 자연스럽게 서희와 더 밀착됐다.
"앗."
그 때문에 서희의 이마가 내 입술에 닿았다. 서희도 놀란듯 작은 비명을 토해냈다.
"아, 미,미안."
절대로 고의가 아니였다.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 단순한 실수일 뿐이다.
"괘,괜찮아."
서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대답했다. 덩달아 내 얼굴도 빨갛게 변해버릴것 같다.
그 상태로 몇분을 더 가서 드디어 내릴역에 도착했다. 서희의 손을 꽉 붙잡고 인파를 헤쳐 지옥철을 빠져나왔다.
하, 이럴 때 느끼는거지만 서울공기도 나쁘지만은 않아.
아 맞다. 아직까지 서희손을 쥐고있었지.
"아, 미안."
사과를 하며 꽉 쥐었던 손을 떼어냈다.
"그게 사과할 일이야?"
"응?"
"됐어. 가자."
화난건가? 아닌가?
긴가민가 하며 서희와 함께 지하철역을 나와 영화관에 입성했다.
"음, 뭐볼까?"
"인하 넌 어떤영화 좋아하는데?"
"음, 그냥 이것저것 좋아해."
"남자니까 그래도 액션영화 좋아하겠지?"
남자랑은 별 상관 없는것같은데... 그래도 액션영화 싫어하는것도 아니니까.
"액션영화도 괜찮지."
"그럼 액션영화 보자."
그렇게 해서 보게된 물 건너온 액션영화를 끊고 상영시간까지 기다렸다. 운좋게 바로 코앞에 상영시간이 잡혀있어서 십분정도 기다리니 상영관이 열렸다.
내가 영화티켓을 끊는동안 서희는 팝콘을 비롯한 음료를 샀다. 근데... 구성물을 보아하니...
"커플콤보야?"
"응. 왜? 싫어?"
"그럴리가."
영광이지.
서희는 화장실을 간다며 훌쩍 떠나갔다. 자리에 앉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음, 역시 서희가 제일 예쁜것같다. 저기 저 여자도 예쁘지만 저 여자보다는 서희가 낫지. 아무렴.
주위여자와 서희를 비교하고 있는데 서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등뒤로 들려왔다.
"그렇게 여자구경이 재밌니?"
"응? 아, 그게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너보다 예쁜여자가 안보이길래..."
"....됐거든?"
진짠데.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듯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상영관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오,오. 주인공 잘생겼는데? 저 근육좀 봐. 나도 언젠간 저런 근육을 키워보고싶다.
영화는 빠른속도로 전개됐다. 굉장히 재밌게 봤다. 서희가 보자고 한건데 그러길 잘한것같다.
역시나 액션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나쁜놈들은 다 때려잡자. 라는 주제를 남기고 영화는 끝이났다.
"재밌었어?"
"...."
대답이 없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리니 서희가 새근새근 잠에빠져 있었다.
"서희야. 일어나."
툭툭 건들여 주니 그제서야 눈이 뜨인다.
"끝났어?"
"응. 너한덴 별로였나봐."
"음.. 괜찮았는데 보다보니까 너무 피곤해서 그래."
기지개를 쭉 핀 뒤 서희는 몸을 일으켰다. 그 때 다리에 힘이 풀린듯 서희의 몸이 휘청거렸다. 재빨리 서희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괜찮아?"
"아..응. 미안."
서희는 몸을 추스린 뒤 걷기 시작했다. 옆에 따라붙자 서희가 물었다.
"재밌었어?"
"응. 되게 재밌더라. 근데 액션영화 싫어해?"
내 말에 서희는 입을 가리고 하품한 뒤에 대답했다.
"좋아하는것도 아니고 싫어하는것도 아니고."
"그럼 뭐 좋아하는데?"
"음, 코미디? 로맨스? 특히 눈물 쏙 빼는 로맨스 좋아해."
역시 여고생답게 소녀감성이 흐르고 있구나. 나 때문에 액션영화 본건가? 그런거면 너무 미안한데...
"그럼 다음에 그런거보자."
"흠..."
내 제의가 심통치 않은듯 게슴츠레 눈을뜨고 나를 쳐다본다. 뭐, 마음에 안드는게 있었나?
"왜?"
"선수네 역시."
갑자기 선수는 왜 나오는거야?
억울한 목소리로 말해다.
"선수? 내가?"
"약속 잡으려는게 되게 자연스러워."
그게 그렇게 되는건가? 내 몸속에 선수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건가? 내 표정을 보던 서희는 피식 하고 웃더니 말했다.
"뭐, 됐어. 했던말 잊지말기다?"
다음에도 보자는것 말인가? 그거라면 내가 오히려 해주고 싶은 말이다.
"당연하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맛있는게 사줄게."
내 말에 서희가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되게 비싼거 먹어도 되?"
음. 이탈리아 레스토랑같은데서 고기라도 썰 생각인가?
"맘대로."
서희가 재차 묻는다.
"진짜지?"
"응."
오늘 돈도 두둑히 들고왔다. 그리고 카드도 있고말이야.
"가자. 내가 오늘 인하 네 등꼴 다 빼먹을거야."
그러면서 서희의 손이 내 손을 휘감는다?
어떻게 된게 남자랑 여자가 바뀐것같다.
영화보자던 것도 그렇고. 먼저 이렇게 다가오는것도 그렇고. 남자로써 체면이 구겨질만하지만... 그래도 뭐 어때?
좋으면 됐지.
서희는 나를 잡아 이끌고 음식점이 몰려있는 거리로 향했다. 아직 삼월달이라 그런지 해는 금방 꺼졌고 그 덕분에 거리는 네온샤인으로 반짝였다.
"와.. 사람많다."
"그러게."
오늘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마실나온 고등학생들이 제법 많아보였다.
"뭐 먹고싶어?"
"저기!"
서희는 어느한쪽을 가리켰고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부대찌게집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저기."
아니 등꼴 빼먹는다는곳이 부대찌게 집이야? 한 이십인분이라도 먹을생각이야?
"저걸로 내 등꼴 빼먹을수 있겠어?"
"못할것같아?"
응. 못할것같아.
"어쨌든 가자."
본인이 먹고싶다는데 어쩌겠나. 부대찌개집으로 들어가서 한켠에 마주보고 앉았다. 알바가 가져다준 물을 한모금 들이키며 물었다.
"부대찌개 좋아해?"
"응. 완전."
"너도 부대찌개 좋아하는구나."
내 말에 서희는 의아한듯 물었다.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럼. 우리집에 부대찌개면 좋아죽는 요물하나가 버티고 있지.
"우리누나가 부대찌개에 죽고못살거든."
"아...선생님... 그럼 네가 직접 하는거야?
"응."
내 말에 서희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중얼거렸다.
"맛있겠네. 나도 한번 먹어보고싶다."
서희의 말에 피식 하고 웃으며 물을 삼켰다.
"나중에 해줄게."
"정말이지?"
"주문 받겠습니다."
그래. 라고 대답하려는데 여자알바가 주문을 받기위해 다가왔다. 나는 서희에게 메뉴판을 슬쩍 내밀었다. 서희는 메뉴판을 한번 훑은 뒤 말했다.
"부대찌개 삼인분이랑요. 라면사리 햄사리 추가해주세요. 공기밥은 두개로 할까?"
"응."
"그럼 공기밥 두개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부대찌개 삼인분 라면사리 햄사리 추가... 공기밥 두개."
부대찌개 먹는데 소주가 빠질수야 없지.
"그리고 소주 한병 갖다주세요."
"네. 소주한병.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알바가 자리를 떠나자 서희가 물었다.
"술마시게?"
"응. 왜?"
소주에 부대찌개만한 안주가 없지. 내가 소주먹을 때 국물있는 안주를 선호하다보니 이런데 올때마다 소주 한병정도는 꼬박꼬박 마셨다.
"술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는건 아니고..."
그냥 먹을 기회가 있으면 먹는정도지. 그게 서희눈에는 애주가로 보이는 모양이다.
금방 부대찌개가 준비되어 테이블 위 버너에 얹혀졌다. 서희는 두 눈을 반짝이며 부대찌개가 익기를 기다렸다.
이정도 익었으면 먹어도 될것같은데?
"이제 먹자."
"응. 잘먹을게."
서희는 밥 한숟갈을 크게떠서 입속에 집어넣은 뒤 국물과 건더기를 먹기 시작했다. 어째 나보다 더 잘먹는것같다.
"잘먹네."
서희는 입에 한가득 넣었던 라면을 마저 삼킨 뒤 대답했다.
"내가 좀 잘먹어."
"그렇게 먹으면 살 안쪄?"
내 물음에 서희는 대수롭지 않은듯 대답했다.
"먹어도 안찌는 타입이야."
우와. 만인의 적이 여기있어! 먹어도 안찌는 타입은 아무리 먹어도 안찐다던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듯 서희는 빠른속도로 밥을 헤치워갔다. 저렇게 먹으면 안찔리가 없는데... 걱정스러울 정도로 잘머는다.
"그러다가 채한다?"
입에 음식물이 찬 서희는 대답대신에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테이블 위에 얹혀진 소주병을 까자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소주 한잔을 들이키니 알콜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부대찌개를 안주삼으니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지.
"크으..."
내 반응이 흥미로운듯 서희가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잔만."
한잔정도는 괜찮겠지?
딱히 내가 말릴주제도 안되고 해서 소주잔을 채워줬다. 서희는 소주를 한번에 털어넣더니 굉장히 쓴듯 인상을 썼다.
"아으 써.... 소주는 무슨맛으로 먹는지 몰라."
"나중에 먹다보면 알게되. 그나저나 아직 애기네 애기."
머리를 쓰다듬을까 했지만 왠지 너무 앞서가는것 같아서 관뒀다.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요?"
"동갑이면 다 똑같은가 뭐."
서희와 함께 수다를 떨며 식사를 끝냈다. 내 등꼴을 빼먹네 마네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싼 가격에 저녁을 해결했다.
취기도 은은하게 올라오겠다. 술기운이 가시도록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입에물고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이번에는 앉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고 약간 걷자 우리가 만났던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한편으로 가면 우리집. 다른한편으로 가면 서희네 집이다.
"오늘 재밌었어. 밥도 맛있었고."
"밥만 맛있던게 아니라?"
내 말에 서희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영화는 재미없었어."
"미안해."
"그래도 너랑 같이 있는게 즐거웠으니까 됐어."
"...."
"어제 내가 영화보러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하면 어떡하나 했거든."
영화를 보자고 한것은 서희였다. 어제밤에 갑자기 내게 연락이 와서 영화를 보자고 하더라. 서희면 거절할 필요도 없고해서 바로 승락을 했다.
승락을 한 뒤에도 기쁘기도 했고 괜히 설레기도 했다.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거든. 어쨌든간에 고마워."
서희는 그 말을 끝으로 무언가 말을하고 싶은듯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뭔가 하고싶은말이 있나?
"왜? 무슨일 있어?"
"그... 인하야."
"응."
"전에... 내가 했던말 있잖아."
아.
잠시 잊고있었다. 서희와 해결해야 할 일을.
"답변... 아직이야?"
사실 어떻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했었다. 갑자기 서희를 불러세워놓고 말을 꺼내는것도 좀 그렇고 해서 보류해두고 있었는데...
"아니."
서희가 굳은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좋아."
내 대답을 잘 못들은듯 서희가 되물었다.
"응?"
"좋다고."
순간 서희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는것 처럼 보였지만 이내 금방 가라앉으며 말했다.
"...너무 간단해."
"어떤걸 기대한거야?"
"몰라."
창피한듯 얼굴을 잔뜩 붉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걸까.
"그럼...우리 이제 사귀는거야?"
"아,아마도?"
아마도라니. 내가 대답했지만 참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다.
그런데 막상 사귄다고 하니까 민망함이 몰려든다. 이러나 저러나 나에게는 첫 연애라고 할 수 있으니까.
"너 나빴어... 기다리게 하고."
"아하하... 미안해. 그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무슨사정?"
"그건..."
이걸 어떻게 둘러대야할까. 내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서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묻지않을께. 지금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응."
그 "때 서희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서희는 전화를 받지않았다.
"안받아도 되?"
"응. 엄만데... 집에 빨리 들어오라는거겠지."
"대려다줄까?"
서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괜찮아. 너도 얼른 집에 들어가봐. 선생님 걱정하겠다."
누나가 날 걱정하겠냐만은...
"알았어. 그럼 내일보자."
"응. 학교에서 봐."
대답을 들은 나는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하야."
"응?"
"사...좋아해!"
"...."
그 상태로 몸을 돌려서 냅다 뛰어간다. 이거... 그 뭐냐 90년대 말 청춘드라마에 나올법한 장면이 아닌가?
소름끼치도록 유치한 장면이지만... 지금 내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