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잔~"
모습을 나타낸 누나. 가장 먼저 들어오는것은 강렬한 붉은색의 치마. 그 아래로 쭉 뻗어내려오는 검은색 스타킹. 검은색 블라우스에 하얀자켓을 걸쳤다.
"어때?"
빙그르르 한바퀴 휙 하고 돌아보는 누나. 그 모습이 마냥 어린애 같아 귀엽기만하다.
"예뻐."
"왠지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지 않은것같아."
"진짠데."
누나는 마냥 좋은지 내 옆에 착 하고 달라붙었다. 누나에 비해서 꽤 볼품없는 옷. 마트 나가는데 굳이 옷에 힘줄 필요가 있나싶다.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자꾸만 달라붙어서 떼놓는데 애좀 먹었다.
집에서는 키스를 하던 섹스를 하던 볼 사람이 없지만 아파트 내에서는 누가볼까 두렵기만하다.
"아파트 내에서는 붙지좀 마. 누가보면 오해할라."
"왜? 오해하라고 해. 지들이 뭔 상관이야. 평생 볼 사람들도 아닌데."
거 참 쿨하셔서 부럽소.
주차장 한켠에 주차된 아반떼.
산지 얼마안된 차라 그런지 광이 번쩍번쩍 거린다. 전에 외제차를 사려는것을 내가 억지로 말렸었다. 그 때 내가 억지로 말린 이유가 바로 남수림 선생님처럼 이상한 소문이 돌지않을까 싶어서다.
남수림 선생님의 차 메이커가 BMW다. 확실히 여자교사가 타기엔 무리가 있는 차량이다. 이것 때문에 말이 많았었는데 결국 연결된게 스폰서설이였다. 누나가 그런꼴 당하지 말란법이 없어서 정말 뜯어말렸다.
게다가 미모도 어마어마하니 가십거리에 딱이지.
출발한 아반떼. 누나 운전실력이 미숙한지라 굉장히 불안하다. 본인입으로는 믿으라지만 그게 어디 쉽게 믿어지나?
아반떼를 타고 근처에 있는 마트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카트를 끌고 마트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니까 꼭 신혼부부같네."
"그러게."
꼭 부부가 아니라도 커플로는 보이겠지.
"나,나 저기 맥주!"
"집에있는거 다 마셨나?"
"응!"
"알았어 가져와."
마트에서 장보는건 전적으로 내 권한이다. 이게 우습게 된게 경제권을 내가쥐고있다. 누나 월급까지도.
내가 돈관리는 누나가 해라. 이런식으로 말했었는데 자기는 용돈받아 쓰는게 더 편하다면서 나에게 월급을 휙 하고 떠넘기더라.
누나 개인적으로 지출하는게 월급보다 많은것 같으니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지도 모르지.
누나는 맥주를 가지러 저기 냉장고로 갔고, 나는 음료수를 카트위에 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에 적힌 목록을 확인했다.
채소... 고기... 소금...면도기...라면....어우 많기도 해라. 이거 두명에서 될려나?
우선 바로옆에 있는 채소코너에 가보자. 채소코너에 가서 감자를 사는데 세상에 가격좀 봐.
감자를 카트위에 올려놓고 상추를 사려는데 누나가 다가와 맥주를 카트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딸기우유를 얹어놓는다.
"나 딸기우유 먹고싶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왔다.
"더 커지려고?"
"응?"
"아,아냐."
다행히 못들은것 같다?
그 때 누나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거 좋아하나?"
"....."
들었구나?
거 참 민망하구만. 큼, 상추는 이정도면 됐고 삼겹살이나 사러가자.
민망한 나머지 나도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얼굴이 뜨겁다.
때 마침 시식코너에서 삼겹살을 팔고 있었다. 누나가 한입 먹어보라며 삼겹살을 내밀었다.
"어때?"
"맛있네."
"내가줘서 더 맛있지?"
"응."
대답을 한 뒤 삼겹살을 꽤 묵직하게 샀다. 이정도면 한달은 먹겠지.
"아.. 맞다 인하야. 나 그거사야되 그거."
"뭐?"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내 귀에다가 작게 속삭인다.
"생리대."
"....그런건 눈치좀 가져와라. 응?"
다분히 날 놀릴려는 의도가 보인다. 전에는 잘도 알아서 가져왔으면서.
"난 라면사러 간다?"
누나를 보내고 나는 라면코너쪽을 돌아봤다. 역시 한국인은 머니머니해도 신라면이지.
신라면 한묶음에 맵기로 소문난 볶음면 한묶음을 샀다. 그 때 누군가가 내 등뒤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누나인가? 빨리오네?
"벌써왔...어?"
"맞네?"
"서희야."
참, 예상지 못한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버렸네.
"여긴 왠일이야?"
서희의 말에 나는 카트를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아.. 맞다. 부모님 해외에 계시다고 했지?"
서희는 우리집 사정을 약간 알고있었다. 누나와 단둘이 산다는것도.
"응. 내가 장봐야지 뭐."
"보통 그런건 누나가 하지않나?"
"...그러게."
주부가 되어가는 느낌이야.
"혼자왔어?"
"아니."
"그럼...."
"저기오네."
때 마침 누나가 눈에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서희는 누나가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서희네?"
학교에 부임한지 몇일 되다보니 눈에띄는 인물 이름정도는 외운 모양이다.
인사를 받은 누나는 생리대를 카트위에 올려뒀다. 좀 구석에다 나둬라 이 여자야.
나는 생리대를 구석에다가 슬쩍 밀어넣었다.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한듯 서희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서희눈에는 교사와 학생으로 보이겠지.
"아, 미안. 나 지금 가봐야겠다. 부모님이랑 같이와서. 선생님 먼저 가볼께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라면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서희. 나도 모르게 서희의 뒷모습에 시선이 간다.
아직 답변을 못해줬는데.... 서희에게 고백을 받은 그 날 이후 어색해질줄만 알았던 우리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고백을 받았는지 헷갈릴정도로.
선생님은 오히려 부추기기 까지하며 허락을 했지만 누나가 신경쓰인다.
전에 남수림 선생님의 냄새를 묻히고 돌아왔을 때 반응을 보면 싫어할것 같기도 한데... 전에 내가 은근히 떠보니 상관없는 투로 말하고.. 나도 잘 모르겠다.
딱!
"악!"
왜 뒷통수를 후려갈기고 그래?
"왜?"
내가 억울함이 담긴 눈으로 누나를 쳐다보자 누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구멍나겠다 아주."
"그,그래?"
나도 모르게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뭐 더 사야해?"
"아, 과자좀 살까하는데?"
"가자 그럼."
누나가 팔짱을 껴오며 카트를 밀었다. 그래. 지금은 누나와 함께 있으니까 서희생각은 하지말자.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니까.
"198200원 입니다."
뭐 산것도 없구만 이십만원씩이나 나온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지갑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아직도 이 카드 가지고 있네.
묵빛을 띄는 카드가 아직도 내 지갑 한켠에 모셔져 있다. 대충 들어본적만 있는 블랙카드.
전에 돌려드리러 갈게요. 라고 했더니 가지고 있으란다. 필요할 때 쓰라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내가 이걸 어떻게 펑펑 가져다 쓰나. 내것도 아니고 내돈으로 갚는것도 아닌데. 그래서 지갑 한켠에 늘 보관중이다.
블랙카드 밑에 꼽혀있는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끝내고 짐들을 박스에다가 집어넣으니 두박스넘게 나온다. 결국 비닐봉지까지 대동했다.
"와... 엄청많다."
감탄할때가 아니야 누나.
이걸 가지고 올라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안그래도 요새 안쓰던 허리를 쓰는데...
트렁크에 짐을 실고 출발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마트에서 사온 양갱을 쩝쩝거리며 먹었다. 내심 누나도 먹고싶은 눈치였는데 운전초짜가 그런데 신경쓸 여유가 있나.
"왜? 먹고싶어?"
"응."
장난기가 돋았다.
"주세요~ 해봐."
"뭐어?"
양갱을 까서 입가로 알짱거리니 눈동자가 양갱을 쫓는다. 먹고싶다. 라고 눈동자가 말하는것 같다.
"주,주세요."
"안들려. 뭐라고?"
"주세요."
씨익 웃으면서 양갱을 누나의 입쪽으로 내밀었다. 누나가 입을 벌려 그것을 베어먹으려는 찰나에 살짝 빼서 내 입으로 한입 베어먹었다.
"야!"
순간 열받쳤는지 운전대를 놓고 내 팔뚝을 내려친다. 아악, 아프다! 아니, 그것보다...
"누나! 신호! 신호!"
내 말에 깜작놀란 누나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마터면 사람 칠뻔했네.
"너...가서 봐."
누나도 놀란듯 두 눈을 크게 있다가 나를 쏘아본다. 그러면서 한손으로 내 손에 양갱을 가로채갔다.
오물오물 거리면서 양갱을 씹으며 화낸듯 눈썹을 찌푸리는데 귀엽기만 하다.
얼마안가 집에 도착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시동이 꺼지고 차키를 뺀 누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주먹을 쥐고 말 그대로 나를 후드려패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때리면 얼마나 좋을까. 옷도 두툼하고 좋을텐데. 여자라고 주먹으로 때리면 아프지 말란법 있나.
내가 잘못한게 있는지라 반격도 못하겠고. 결국 그 폭력을 모두 감내해내야했다.
탁탁!
"내리자."
깔끔하게 손과함께 감정도 털어낸 누나는 웃는낯으로 내게 말했다. 사람이 저래도 되는거야?
트렁크에서 두박스를 꺼냇다. 누나에게는 비닐봉지를 쥐어주고 나는 박스를 옮겼다. 한번에 두 박스 모두 드는것은 불가능해서 엘레베이터 까지 두번을 오갔다.
낑낑 거리며 짐들을 집안에 가져다 놓았다.
"아.. 겁나 힘드네."
"수고했어."
그러면서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거린다.
하이고 허리야... 끊어질것만 같은 허리를 툭툭치며 내방으로 기어들어갔다. 나이 열여덟에 요통이라니.
침대에 내 몸을 던지고 옷을 주섬주섬 벗어던진 뒤 편한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아... 이대로 잠이 들것만 같다.
3월의 나른한 일요일 오후.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한 나는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남고생에게 체육시간이란?
그저 축구하는 시간, 또는 농구하는 시간이다.
날씨도 축구하기 딱 좋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
축구 유니폼을 입고 상의에 져지를 걸친다. 한손에는 축구화를 들고 운동장으로 향한다.
"내가 일요일날에 1학년 애들이랑 놀았거든? 거기서 1학년 여자애를 봤는데 장난아니더라. 얼굴도 얼굴인데 몸매도 장난아냐."
"그래?"
예전 같았으면 관심이 갔겠지만 요샌 여자얘기 해봐야 뭐 그러려니 한다. 있는자의 여유랄까.
"이번주에 한번 보기로 했는데 어때?"
"뭘?"
"같이 놀자고. 주말에. 너 요새 못놀았잖아?"
못논건 아닌데... 놀긴 놀았다. 그게 사내놈들이 아니였을 뿐이지.
"글쎄."
썩 내키지도 않는다. 귀찮기도 하고 선생님이나 누나, 서희가 맘에 걸리기도 하고.
"글쎄는 무슨. 가는거다. 오케이?"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말되면 잊어먹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진용과 함께 수다를 떨며 운동장으로 내려가는데 저편에서 누나가 걸어오고 있다. 수학교과서를 끼고 작대기를 든 누나. 그 옆에는 올해 같이 부임한 남교사 하나가 알짱거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진용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냈다. 누나는 상냥하게 응 안녕. 하고 받아줬다. 그 옆에있는 남교사는 인사를 받지도 않은 혼자 신나서 누나에게 말을걸고 있다.
그 둘과 지나치고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진용이 나에게 물었다.
"야. 너 왜 이수연쌤한데 인사안하냐?"
"왜? 안할수도 있지."
"그렇긴 한데..."
"그건 그렇게 저 옆에있는건 누구야? 전에 몇번 본것같은데."
"1학년 담당 영어라고 하던가? 그럴걸? 저 선생도 인기 좀 많아. 여자애들한데."
아, 그러냐?
"그래도 이수연 쌤이 훨씬 아깝지. 저 정도 외모에 여교사 타이틀이면 부잣집 아들이랑 결혼해도 되겠다."
"그 정도야?"
"남수림 선생님만 봐도 딱 견적 나오잖아? 스폰서설부터 시작해서. 재벌 3세 cc설까지. 애초에 비쥬얼 부터 안되면 그런소문은 나지도 않아. 그럴만 하니까 소문이 나는거라고."
그런가. 고개를 뒤로틀어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놈 말대로 재벌이랑 눈맞아도 전혀 이상할게 없어보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관계는 끝이나는거겠지.
그래. 우리는 남매사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서로를 속박할 수 있다지만 남매관계인 우리에겐 그것은 불가능한 얘기다.
쉽게말해 우리의 관계는 기약할 수 없다는거다. 언제든지 '우린 남매니까 그만하자.' 라는 말 한마디면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거다.
그것이 십년후가 되었든 이십년후가 되었든. 바로 내일아침이 되었든. 그리고 추억하게 될거다. 한때의 불장난으로.
"그래도 이수연쌤은 악의적인 루머는 안도는것 같더라. 딱히 트집잡을 건덕지도 없어보이고."
"...."
"너 왜그래?"
"뭐가."
다짜고짜 왜그러냐고 하면 뭐 어떡하라고?
"표정이..."
"표정이 어떤데?"
나도 모르게 내 표정에 변화가 생겼나보다. 진용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뭐 열받은거 있냐? 내가 말실수 했어? 뭐랄까. 분한표정? 억울한 표정이라고 해야되나."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에 세어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분하다? 억울하다? 맞다. 지금 내가 가진 이 감정은 그것들과 같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건가.
뻔하잖아? 누나에게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척 가식을 부리면서, 어느새 누나에게 감정을 느끼고 있는거다. 애정을 느끼고 집착하고 있었다.
누나옆에 다른 남자가 있는것을 보고 질투를 했다. 그리고 진용의 말을 듣고 다시한번 절감했다. 우리의 한계를.
그래. 우리는 끝까지 갈 수 없는거다. 끝까지 간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간폭탄과도 같다.
나는 그저... 우리가 남매라는 관계에 얽매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할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