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0)

성북동은 부촌이다. 뼈대높은 양반집의 후손인 외할아버지는 성북동 토박이다. 올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위압감이 어마어마하다.

성북동은 재벌들이 모여사는 동네다 보니 꽤나 한산한 면이 없잖아 있다. 높은 담장과 으리으리한 집. 그러한 집들을 거치다 보면 외할아버지의 댁이 보인다.

외할아버지댁에 도착한 뒤 초인종을 누르니 이곳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받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초록빛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런 디자인을 자랑하는 이층자리 집. 이곳이 외할아버지의 집이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거실로 들어가니 외할아버지가 가만히 앉아 독서를 하고 계신다.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책을 덮었다.

"앉거라."

인사 한마디 조차 건내지 않는다. 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년만인가."

"네. 작년 설날때 뵈었어요."

"시간 참 빠르군. 뭐라도 마실테냐?"

"아뇨. 괜찮아요."

대답을 한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몸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이 불편했다.

"쯧, 옷 좀 깔끔하게 입고오지."

내 옷차림이 어때서? 지극히 정상적인데.

"가는길에 옷이나 한벌 해입혀 가야겠군."

가? 어딜? 묻고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널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아버지는 일하시는 아주머니께 차 한잔을 가져다 달라고 한 뒤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좀 만나야 겠다."

너무나도 어정쩡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사람좀 만나야 겠다고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누굴 만나야 됩니까.

"남 회장한데 손녀가 하나있다."

남 회장?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회장이라는 직함에서 풍겨오는 오러가 장난이 아니다.

"네."

"원래 네 엄마는 네 애비와 결혼해선 안될 사이였지. 네 엄마에겐 약혼자가 있었다."

엄마에겐 '네 엄마'고 아빠에겐 '네 애비'다. 기분이 나빴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보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제법 심각해 보였다.

약혼자.

그런소릴 들어본적이 없다. 약혼자라니. 그 때 엄마는 갓 스무살을 넘긴 스물한살이였다. 스물한살이면 연애를 시작할때다. 그런 나이에 약혼자라니.

"근데 그 멍청한 것이 해외여행 간답시고 덜컥 애를 달고왔지."

"...."

"지금 생각해보면 고의인것 같다. 내가 정해준 짝과 결혼하기 싫어서 다른남자들의 애를 밴게지."

역시나, 약혼자란 것은 외할아버지가 정ㅎ준 짝일 뿐이였다.

"그 때 약혼자가 남회장의 아들이였다. 남회장 셋째아들이였는데 네 누나를 배고 외국에서 눌러앉았다. 그 땐 나도 몰랐지. 임신한 상태였다는걸."

"....."

"임신했단 사실을 귀국해서야 알았다. 외국에서 친구랑 같이 지내고 있다. 잘 지내고 있다. 주기적으로 연락을 했지. 물론 표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 때 일하는 아주머니가 차를 내오셨다. 차를 건내받은 외할아버지는 그것을 한모금 들이켰다.

"어디 남자 하나 물어서 동거할 수 있겠다. 생각은 했다. 그 애가 내 말을 어길줄은 상상도 못했고 결혼못한다. 지들끼리 사랑하게 내버려 둬라. 이런말 해도 떼 놓을 자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람이다. 외할아버지는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무뚝뚝한 얼굴로, 차가운 목소리로 이런말을 내뱉는 외할아버지가 무섭다. 그리고 혐오스럽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말끝을 흐렸다. 임신을 할줄은 몰랐다. 이런거겠지.

"몇달을 외국에서 보냈지. 이미 귀국했을때는 낙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낙태라.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지금 멀쩡한 누나를 내버려 두고 할 소린가? 분노가 끓어올랐다.

"결국 애를 지을수 없게 되었다. 낳을 수 밖에 없었지. 결국 남 회장과는 파혼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결혼을 허락하진 않았다. 사정사정 하기에, 나는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조건...이요?"

"그래 조건."

"...."

"내 외손자들 중에 한명은, 내가 결혼상대를 정해준다. 이게 내 조건이였다."

"....."

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뭐 이런 막장 드라마가 다 있을까?

"네 어미는 승락했다. 그래서 지금 네가, 이자리에 있는거다."

내 표정을 힐끔 쳐다본 외할아버지는, 계속 입을 열었다.

"믿기지 않나?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봐도 좋다."

아니다. 믿는다. 너무 잘 믿긴다. 이 사람에 대해 알고있는 나라서 충분히 그럴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있다.

"내키지 않나?"

"...."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네가 싫다면 네 누나가 있다."

덜컥.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것만 같았다.

"내 조건은 내 외손자들 중에 하나다. 네가 싫다면 네 누나를 부를 수 밖에."

"그런..."

"싫으냐?"

"예."

"그럼?"

"제가 할게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외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신."

"대신?"

외할아버지는 조건을 거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소짓던 얼굴을 굳히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걸려는것은 조건이라기 보다는, 부탁이였다.

"누나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누나가 알면 슬퍼하겠지. 차마 그런 누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내 조건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않는다는 듯 외할아버지는 흔쾌히 승락했다. 외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외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아. 남 회장 날세, 약속장소로 나가면 될것같으이."

그 남 회장이라는 분과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으시더니 웃으시며 전화를 끊었다. 그 남회장이란 분과는 많이 친해 보였다. 그러니까 약혼따위를 추진하는 거겠지.

기사를 호출하신 외할아버지는 오분정도는 걸린다는 얘기에 자리에 앉아 차를 마저 마시기 시작했다.

"약혼녀에 대해서 궁금할텐데."

"예."

"나도 잘 모른다. 일년전쯤에 보긴 봤는데... 너 보단 나이가 있어보였다."

얼마나 많을까. 대학생인가?

"미술을 한다고 들었다. 얼굴 하나는 예쁘더구나."

하하...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가.

"보면 너도 맘에 들거다. 그러니까 너무 죽을상 하지마라."

내 감정이 나도 모르게 표정에 들어난 모양이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기사로 부터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에 외할아버지는 옷을 갈아입으신 뒤 말했다.

"가자꾸나."

"예."

외할아버지를 따라가니 리무진 한대가 집앞에 대기해 있었다. 아우디마크가 달린 리무진을 보니 다시한번 경외감이 든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차에 탈때는 타는 위치까지 예절을 지켜야한다. 내가 운전석의 뒷자리, 외할아버지는 조수석의 뒷자리. 외할아버지 앞에서는 이러한 예절까지 지켜야했다.

차에 올라타니 시트에서 느껴지는 승차감에 절로 감탄사가 나오려고 한다. 외할아버지만 아니였다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을거다. 10인치 정도의 TV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차는 얼마나 하려나?

"어디로 모실까요?"

"청담동으로 가지."

"예."

초호화 리무진 답게 부드럽게 미끌어졌다.

"어떠냐?"

"예?"

갑자기 어떠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이런 차, 갖고싶겠지?"

"아..네.. 물론 갖고싶죠."

능력이 안되서 문제지만.

외할아버지는 뒷자석 사이에 구비되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저게 냉장고인지 생각도 못했다. 하긴 뒷자석에 TV가 달려있는데 냉장고가 있는게 신기한 일도 아니다.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말을 덧붙혔다.

"내말대로 하면."

결국은... 꼭두각시 노릇이나 해라. 이건가? 은근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표정에 감정을 들어내고싶지 않았다.

"내겐 남은 자식이라곤 네 엄마 뿐이다."

"네."

엄마는 혼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보다 어린 외삼촌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난 네 엄마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도둑놈.. 아니 네 애비랑 결혼한 그 순간부터 네 엄마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사라졌다."

도둑놈. 외할아버지는 은연중에 아빠를 도둑놈 취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 어이가 없어서.. 팔이 안으로 굽는다. 그건 철혈한인 외할아버지도 그런 모양이다.

"차라리 물려줘도 죄없는 자식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였다만. 첫째는 딸. 시집가면 남의집 사람이다. 결국 너밖에 없단거다."

"...."

"내 말대로 해라. 그러면 수천억대의 부를 손에쥘 수 있다."

수천억대의 자산. 그정도면 흔히들 말하는 준재벌 급이다. 준재벌이 된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지만...

"모르겠어요."

"음?"

"그렇게 하라는대로 해서 얻은 수천억의 돈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내 표정을 빤히 쳐다보던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껄껄껄 크게웃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얼떨떨했다. 지금 비웃는건가? 아니면 정말로 웃겨서 웃는건가?

"놈. 제법 그릇이 크구나."

반응을 봐서는 기분이 나쁘거나 비웃는건 아닌것같다.

"그래. 아직은 어리다 이거냐? 그래. 나도 아직 죽을생각 없다. 지금의 너에겐 이해가 안가는 일일수도 있겠지."

"예..."

"그래. 이런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하자꾸나. 아직 시간은 있으니."

꿀꺽꿀꺽. 물을 들이킨 외할아버지는 다시 물을 냉장고 안으로 집어넣었다.

"네가 지금 몇살이지?"

"아, 올해 열여덟이요."

"열여덟이라... 아직 결혼은 이르긴 하군."

"결혼이요?"

깜작놀란 나는 그만 소리를 높히고 말았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외할아버지는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그래 결혼."

"전 아직 고등학생인데요?"

"그러니까 아직 이르다고 하지않았냐."

"..."

"흐음... 남 회장은 조금 서두르는것 같던데..."

외할아버지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결혼은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해야겠지?"

"아..네.."

벌써 결혼얘기라니. 맙소사.

"그래도 미리 약혼 상대와 알아두고 연락정도 하는건 나쁘진 않겠지."

외할아버지는 안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더니 입에물고 불을 붙혔다. 그러더니 나에게 담배곽을 내미시며.

"너도 필테냐?"

"저 고등학생이에요."

"허헛, 내숭은. 술한모금 입에 안댔더냐?"

"그건 아니지만..."

외할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왜이러실까. 평소 같았으면 말도 잘 안거실분이.

외할아버지와는 평소와 다르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주고받았다. 학교는 어떻고 성적은 어떻고 하고싶은건 뭐냐. 이런 아주 소소한것 까지.

대화를 주고받다보니 어느새 청담동에 위치한 어느 한 빌딩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내리자꾸나."

차에서 내린 나는 외할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꽤나 높아보이는 이 건물에는 명품매장의 건물같았다. 처음 들어와 보는 명품매장에 기분이 묘하기만 했다.

"여기도 내 건물이다. 지하2층 지상 4층짜리 건물이다."

아.. 그렇군요.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처음들어보는 이름의 명품매장에 들어서니 그곳 직원으로 보이는 30대 초중반의 미모의 여성분이 외할아버지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어머, 민 회장님."

"내 손자녀석 옷좀 봐줬으면 하는군. 지금 당장 입을걸로."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파악한 듯 나에게 시선을 돌린 그 여성분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유진씨? 여기로좀 와봐요. 민 회장님은 어떻게?"

"앉아서 쉬겠네. 계산은 이걸로."

외할아버지는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를 여성분에게 건냈다.

"아, 안그러셔도 되는데..."

"그러면 못쓰지.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외할아버지의 말에 여성분은 미소를 지으시며 카드를 받아들인 뒤 부름에 다가온 여직원에게 카드를 건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 유진씨. 유진씨는 이분 옷좀 봐드려. 민 회장님 손자분이야."

"네. 그럼..." 

그 유진이란 분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지나가는 동안 이리저리 구경하는데 한눈에 봐도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사이즈좀 제겠습니다."

대답할 새도 없이 나의 신체 사이즈를 잰 유진이란 여성분은 잠시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근처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여성분에게 무언가를 명령했다.

"신체 벨런스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모델하셔도 되겠어요."

유진씨는 기다리는 동안 내가 지루할것이라 생각했는지 말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민 회장님의 손자라서 그런지 굉장히 잘생기셨고. 하하...."

뭐야. 왠지 꼬리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아, 실례가 안된다면 나이가 어떻게?"

"열여덟이요."

"네?"

"열.여.덟 살이요."

내 나이에 굉장히 당황했는지 얼굴이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웃음이 나올뻔했다. 띠동갑이 넘는 나이는 어떻게 감당하기 어려울걸?

"하,하핫.. 굉장히 조숙해 보이시네요."

"그런소리 종종 들어요."

명령을 받은 부하직원분이 옷을 가져왔고 나는 그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탈의실 내의 거울에 비춰진 내 옷을 쳐다보니... 내가 봐도 좀 생겨보였다. 역시 옷이 날개라더니. 혹시 정장같은걸 주지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정장은 아니였다.

탈의실에서 걸어나오니 유진씨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떠오르는듯 보였다.

"아주 좋아요. 어떠세요? 다른옷 더 입어보실래요?"

"아뇨. 외할아버지께서 기다리셔서... 옷도 맘에 들고요."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유진씨는 나를 계산대로 이끌었고 아까 외할아버지가 건냈던 검은색 카드로 결제했다. 서명까지 한 나는 검은색 카드를 받아들인 나는 그 유진씨에게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디에...?"

"점장님 사무실에 계실것같은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갈게요. 어디있는지 위치만 알려주세요."

위치를 전해들은 나는 점장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계자외 출입금지구역 인데다가 직원들은 모두 매장에 나가있으니 사람한명 보이지 않았다. 문을열려고 문고리를 잡을려는 찰나에 몸이 굳어버렸다.

"흣..하악...회장님... 좀 더...좋아요..."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틀림없는 신음소리였다.

지금 여기 난입할수도 없고... 화장실에 간다면서 시간이나 떼워야 겠다.

매장으로 나온 나는 눈에 들어오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나는 화장실 칸에 들어가 변기위에 앉았다.

그래. 외할아버지는 돈도많을테니 스폰서주는 여자정도야 있겠지. 돈 많은사람한덴 오히려 스폰서주는 여자가 없는 경우가 적지않을까?

혐오감이 든다는 생각보다는 이해가 갔다. 엄연히 외할머니가 살아계시지만, 글쎄. 아직까지 부부관계를 이어온다는건 불가능한 이야기일테니.

십분정도 화장실에서 시간을 떼운 나는 화장실을 나와 다시 점장사무실로 향했다. 섹스가 끝난듯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소리대신에 문이 열렸고 점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과연 방금전까지 외할아버지 아래 깔려서 신음소리를 내던 여자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깔끔한 모습이였다. 다만 살짝 붉어진 얼굴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 민 회장님. 손자분 오셨는데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그만가보지."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점장을 뒤로하고 외할아버지는 사무실을 나섰다. 외할아버지 옆에 따라붙은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옷은 마음에 들더냐."

"네."

리무진에 다시 올라탄 뒤 오분채 가지 않아 멈춰서 곳은 고급일식집이였다. 문을 여니 일본풍이 잔뜩 묻어났다.

"아, 민 회장님."

카운터에 앉아있던 40대 초반의 남자가 외할아버지를 알아봤다. 혹시 이곳도 외할아버지것인가?

"남 회장은? 와있지?"

"네. 오분전에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 남자의 뒤를따라 도착한 곳은 제일 구석에 위치한 룸이였다. 미닫이 문을 열자 넓직한 내부가 들어났다.

"허헛, 자네왔는가?

외할아버지를 반긴것은 인상 좋아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와는 정반대의 느낌이 나는 노신사 분이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헉."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저,저사람이 여기 왜 있는거야?

안돼, 이건 아니야.

우리학교에는 흔히들 세명의 여신이 있다고 한다.

이 여신은 교직원에 국한된 것으로 구성은 이러하다.

국어의 여신 한정민

지리의 여신 박연정

여신 남수림

간단한 예를 들자면 무협소설로 설명이 가능한데 한정민 선생님과 박연정 선생님은 지역을 대표하는 미녀라면 남수림 선생님은 천하제일미쯤 된다.

남녀불문하고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하는 남수림 선생님은 미술과로 못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다못해 불까지 질러버리는 1급 방화범이다.

나 역시 그녀를 볼 수 있는 미술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한서희와 남수림, 누굴 선택할래? 라고 묻는다면 여기서 취향차이가 갈린다.

연상의 취향인 이들은 남수림을 꼽을것이며, 그렇지 않은 이들은 한서희를 꼽을것이다.

이도저도 취향이 아닌 내가 평가하기를, 그 둘은 그야말로 용호상박, 막상막하, 용쟁호투 등등의 성어로 표현가능하리라.

그녀에게 한가지 흠이 있다면 좋지않은 소문이다. 사실파악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를 시기하는 일부의 여학생들로 부터 퍼진것으로 추정되는 소문은 그녀의 이미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남수림은 걸레다.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에 얼굴을 팔면서 미술을 했다!]

(스폰서와 밥먹는 것을 봤다! 상대는 40대의 아저씨더라!)

등등의 출저모를 악소문이였다.

그런 악소문에도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나도 티는 내지않았지만 그녀에게 동경이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 약혼자라면?

글쎄. 기쁘기 보다는, 당황스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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