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몽전
01
악질적인 사채업자인 동호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고는 거실로 나와 몸을 던지듯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동호는 손에 든 맥주 캔 한 모금을 마시고는 소파 앞에 놓인 탁자에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이상한 조각이 새겨진 황금목걸이다.
이것은 낮에 어떤 고대문학 전공의 대학 교수에게 빛 대신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마 안 나가는 금목걸이다.
그 많은 물건 중에서 이 목걸이를 가지고 왔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마치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느낌으로 이 목걸이를 가지고 왔다.
이 목걸이를 보고 있으니 골치가 아팠다.
이상한 기분에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고, 탁자 옆에 있는 종이박스에서 무협소설을 꺼냈다.
동호는 어린 시절부터 하루에 최소 두세 권을 읽을 정도로 무협 소설을 좋아했다.
인근 책대여점에 있는 무협소설은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10년간 단골이었던 책대여점이 결국 폐업이 되었다.
대여점 사장이 단골이라고 가지고 무협소설을 한 박스를 준 것이다.
지금 동호의 손에 들린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호는 이미 과거에 읽은 책이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한번 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학생시절 보았던, 지존천하라는 소설로 당시 유명했던 야한 무협소설로 유명한 와OO의 흉내낸 아류작이었다.
당시 학생시절, 막 인터넷이 도입되는 시기라, 야동같은 것은 청계천 비디오에서 간신히 구했던 시절, 이런 무협소설이 다시 혈기왕성 했던 학생시절의 혈기를 풀어주었던 것들이었다.
고아인 주인공이 전대 천하제일 고수의 제자가 되어, 스승과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거기다 아류작답게 너무 많은 미녀들과 섹스와 기연이 많아 중도에는 무협의 재미가 사라지고 야한쪽의 내용만 생각나는 그런 소설이었다.
나름대로 나이가 들고, 옛 추억이라 기분이라서인지 몰입을 할 수 있었다.
1권을 다 읽은 동호는 곧바로 2권을 읽기 시작할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집에 들어올 때 시킨, 치킨이 배달 온 것 같았다.
동호가 현관문을 연 그 순간.
“커억!”
불에 데인 것 마냥 화끈한 통증이 옆구리에서 시작되었다. 아찔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
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절로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와중에도 시선은 자신의 옆구리로 향했다.
길게 찢어진 셔츠.
그 사이로 꾸역꾸역 비집고 나오는 선혈.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상처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끈뜨끈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
상대가 무언가 말을 할여고 하는 것 같았지만, 동호는 상대를 밀고 빠르게 문을 잠그었다.
빨리 전화를 해야 한다는 그 생각뿐이었다.
휴대폰은 탁자위에 있었다.
탁자로 걸어갈수록, 점점 힘이 없어지는 것 느껴졌다.
간신히 탁자에 도착했지만, 휴대폰을 만질 힘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간 것은 휴대폰이 아닌 그 옆에 있는 무협소설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어린 시절, 무협소설처럼 천하를 제패를 한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었다.
먹고 살기위해 소설속에 주인공이 아닌 거의 엑스트라정도의 악당이 되었다.
죽음이 다가오니, 한 번이라도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휴대폰이 아닌 소설책에게 손에 간 것이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펼쳐진 페이지의 글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초지일관 잘생기고, 머리 좋고, 재수 좋고, 성격 좋은 주인공이 기연을 얻는 장면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동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렇게 죽는 바에야 다른 소설처럼 자신도 어딘가로 번쩍하고 이동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호의 의식의 끈을 놓쳐가고 있었다.
그 순간 동호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에서 휘황찬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거실 안을 장악한 황금빛 기운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 듯 동호의 손이 단 무협소설책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집안은 보일러가 꺼진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일어나! 언제까지 잘 거야?"
누군가 옆구리를 툭 차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흐릿해졌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화가 치밀었다.
“어떤 새끼가 환자의 상처를 걷어차는 거야?”
눈을 떴다.
거친 광목천이 먼저 들어온다.
“응?”
이처럼 까끌까끌한 느낌의 천을 병원에서 쓸 리가 없다. 더구나 바닥도 딱딱하다.
한순간 철렁하는 마음이 든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없다. 피가 철철 흘러넘치던 상처인데 말이 안 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뿐이다.
거실에서 쓰러진 후 119 구급대가 오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상처가 완치된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납치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천을 딱딱한 바닥에 깔고 누워있게 할 곳은 없으니까.
목을 들려하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긴 깊은 상처가 깨끗이 나았을 정도면 꽤 오랜 시간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을 것이다.
목이 굳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요상한 헤어스타일을 한 소년들이 보인다. 옷을 입고, 이불을 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어라? 납치가 되었는데 눈앞에 어린 아이들이 있다?)
얼굴에 홍조가 가득한 열예닐곱 살 남짓의 소년들이 입고 있는 회색 옷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 나오는 옛날 스타일의 옷이었다.
“뢰형! 뭐 해요, 그렇게 꾸물대다간 오늘도 냉누님에게 혼나요.”
눈 꼬리가 쭉 째진 소년 하나가 동호에게 급하게 말을 했다.
(이 꼬마가 누구보고 친한척? 응? 오늘도?)
동호는 소년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판에 오늘도......라니?
그럼 어제는?
"좀 쉬게 해 줘. 어제 고생이 많았잖아."
어쩐지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
짙고 깔끔한 눈썹.
반짝이는 두 눈과 날카로운 콧날.
붉디붉은 입술과 강인한 턱선.
(응? 이게 무슨 무협지, 주인공 묘사 같은.....)
어쨌거나 텔레비전에 나오던 그 어떤 아이돌스타보다 훨씬 잘생긴 소년이었다.
"뢰는, 좀 더 눈을 붙이도록 해. 나머지는 우리가 정리할게."
(응? 뢰? 날 보고 하는 말인가?)
동호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TV에서 튀어 나온 것과 같은 저 소년은 자신을 향해 뢰라고 불렀다. 그것도 매우 친근하게.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따로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뢰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래봤자, 일각도 안 되는 시간인데......"
눈이 째진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후후, 반각이라도 눈을 더 붙이는 기분, 너도 잘 알잖아."
잘생긴 소년은 너무도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눈이 째진 소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다른 소년 하나가 이불을 정리하고 미소년에게 물었다. 앞선 두 소년에 비해 나이가 좀 어려 보였다.
“비강이 형은 너무 사람이 좋아요.”
여드름의 소년은 약간 걱정스러움 눈으로 잘생긴 비강이라는 소년에게 말했다.
“하핫, 괜찮아. 오늘은 뢰가 쉬고, 내일은 내가 쉬면 되는 거야.”
소년들의 대화를 듣던 동호는 불현 듯 느껴지는 게 있어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만져 보았다.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 윤기가 느껴지는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이어졌는데, 얼마 전에 이발한 자신의 머리는 결코 아니었다.
이 몸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것을 따지기 전에, 자신이 왜 다른 사람의 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문득 장르 소설의 단골 소재 중 하나가 된 영혼 빙의가 떠올랐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동호는 지근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동호의 상식선에서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장르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보네. 이런 황당한 꿈도 꾸고 말이야.)
철석같이 꿈이라 믿은 동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프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우웃~!!”
머리에 통증과 함께 이 몸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몸의 이름은 적뢰.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인 지존천하의 등장인물이다.
주인공과 같은 자애원에서 성장을 하였지만, 주인공에 대한 열등감으로 주인공을 죽일려고 했다.
그후 자애원을 빠져 나왔지만, 나름대로 천부적인 자질덕택에 암중세력의 부하가 되어 거의 소설 중반까지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이었지만, 결국에 어느 삼류 악당들처럼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스토리였다.
저쪽에서 웃으면서 말하는 잘생긴 소년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용비강이다.
이렇게 혼란에 빠진 체로 용비강과 아이들에게 이끌러 방안에서 나오니 마당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동호는 한 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무영화 냉약빙.
무림이기의 한명이자 자애원의 원주인 천기무영자 냉곡의 손녀.
현재 나이, 대략 26세로, 주인공 용비강과 11살차이고, 이 몸인 적뢰와 10살 차이의 연상이다.
현대의 미인 모델과 맞먹는 미인이었다.
삼단같은 긴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묵고, 무공을 연마한 무인답게 몸에는 쫙붙는 검은색 경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 검은색 경장이 냉약빙의 살갗에 찰싹 휘감겨 있었지만, 비록 옷이 몸을 가리고 있으나 육감적이고 뇌살적인 냉약빙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풍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몸매였다.
거기에다 상아같이 뽀얀 목덜미, 그 아래로 무겁게 매달린 한 쌍의 육중한 젖가슴...
나름대로 큰 호박을 반으로 쪼개어 놓은듯한 한 쌍의 젖가슴은 냉약빙이 숨을 쉴 때마다 물결치듯 아래 위로 출렁거렸다.
냉약빙이 자신들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코끝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육향이 사방에 가득찼다.
주인공 용비강의 첫사랑.
그리고 이 몸인 적뢰역시 냉약빙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냉약빙의 감정은 용비강에게 있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 눈치챈 적뢰는 더욱더 용비강을 증오하게 된 것이다.
확실히, 한참 혈기왕성한 나이의 적뢰가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재 자애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이 적뢰였고, 두 번째가 용비강이며, 그 다음번부터 4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러므로 냉약빙을 여자로 느끼는 사람은 적뢰와 용비강뿐이라는 것이다.
“늦게 나왔구나, 뢰와 강아 너희들이 가장 큰형인데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요령만 가르치다니.....”
“특히 뢰는 내년이면, 이곳 자애원을 떠나야 하는데....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어떻게 세상에 나가 살아갈 생각이니.....”
“미안해요, 냉누이 이제 이곳 자애원 떠날 때가 가까우니, 약간 마음이 복잡해서, 간만에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재빨리 미안한 표정을 짓고 사과를 하자.
냉약빙역시 찡그렀던 인상을 피고 미소를 지었다.
“어서 늦었으니, 빨리 단로생법 수련을 하고 아침을 먹자.”
“네에~!!”
단로생법.
자애원의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기초적인 기공술로 알려졌지만, 천기무영자 냉곡의 기본이 되는 현문정종 수련법이다.
가장 순수한 자연지기를 통해 그릇이 되는 육체를 단련하는 수련법이다.
단로생법으로 단련이 된 용비강은 얼마후에 이 수련법 덕택에 적뢰의 암수에서 목숨을 구하고 기연을 얻는다.
그렇게 적뢰와 용비강을 필두로 자애원의 아이들은 단로생법을 수련하고, 아침을 먹은 다음 어느 아이들은 글공부 아직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놀고 있었다.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동호는 자신의 기억과 적뢰의 기억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간차를 두고 띄엄띄엄 떠오르던 기억들은 이내 그 속도를 높였고, 마지막에 가서는 동호가 미처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떠오르며 동호의 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동호의 의식은 마치 컴퓨터가 데이터를 저장하듯 적뢰의 기억을 저장했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것이고 낯설어야 하거만 동호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원래부터 자시의 기억인 듯 전혀 괴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자칫 의식적인 혼란을 겪을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호는 적뢰라는 인간에 대해 일체감을 갖게 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뢰라는 인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적뢰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데다가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이미 이곳 자애원에 들어오기 전에 거지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미 어린 나이에 목욕하는 냉약빙을 몰래 훔쳐볼 정도로 여색을 탐하는, 그야말로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인간이었다.
싫다. 정말 싫었다.
하지만 좋으나 싫으나 이제 적뢰는 자신이었다.
적뢰로 살아가야만 했다.
동호는 결심했다.
자신이 적뢰가 된 이상 지금까지의 적뢰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소설처럼 악당이 되어 비참하게 죽지 않고, 주인공인 용비강처럼 영웅이 되어 악당을 물리치고 꽃 같은 미녀들과 꿈같은 사랑을 나누는 흐뭇한 상상을 해 보았다.
자신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존천하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으니, 주인공 용비강이 얻게 되는 일부 기연과 인연을 자신이 가로채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었다.